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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국 Feb 23. 2023

[23] 1986년 최종일의 기적과 '운명교향곡'

베팬알백 | 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1986년 9월 17일 정규시즌 최종일. 최동원의 역투는 갈수록 힘이 넘쳤고, 2-1의 롯데 리드는 8회를 거치면서 오히려 3-1로 벌어져 OB는 점점 절망의 벼랑 앞으로 물러서기만 했다. 롯데에게는 승부에 연연할 필요가 없는 게임이었지만 에이스 최동원 개인에게는 3년 연속 20승을 성취하는 귀중한 한판이었다.

운명의 9회말. 선두 김광수가 좌전안타로 나갔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최동원은 김형석을 투스트라이크로 윽박지르며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김형석은 최동원의 실투일지도 모르는 3구째 안쪽 직구를 걷어 올렸다. 순간 OB 팬들로서는 일찍이 감상해 보지 못한 감동의 흰 궤적 하나가 라이트 펜스 바깥쪽으로 그려졌다. 3-3.

김형석의 홈런이 일으킨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신경식은 신경질적이 된 최동원의 초구(공식기록지에는 볼카운트 1B-0S에서 2구)를 강타, 좌중월 3루타를 뿜어댔다. 최동원이 침착했던들 아직은 위기를 넘기고 승부를 연장시킬 여지는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미 기세가 꺾인 최동원은 3루 커버를 게을리한 채 구경만 하고 있었고, 유격수 정영기의 릴레이를 거쳐 3루로 온 볼은 김용철의 글러브를 통과, 신경식은 단숨에 홈까지 뛰어들어 4-3 역전승의 구두점을 찍었다. 전주에서 해태에 이긴 MBC 선수들은 시외통화로 들린 OB의 역전승 소식에 넋을 잃고 말았다.』 <KBO 발행 한국프로야구 1987년 연감 60페이지>


1980년대를 돌아보노라면 추억의 순간순간들이 우리의 기억 속에 알알이 박혀 있다. 빛바랜 사진처럼 흐릿하지만, 가끔씩 앨범 속에서 꺼내보면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며 씩 웃게 만드는 그런 추억들. 베어스 올드팬들이라면 영원히 잊지 못할 순간들이 있다. 1986년 정규시즌 최종일 9회말에 터진 김형석의 극적인 2점홈런도 그 기억의 이정표 중 하나일 것이다.


[베팬알백] 23번째 주제는 최동원과 세상을 울린 ‘미스터 OB’ 김형석의 홈런에 얽힌 추억이다. 오늘날 ‘두산’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미러클(기적)’이지만, 그 원조를 찾는다면 어쩌면 1986년 정규시즌 최종일의 기적일지도 모른다.


'미스터 OB' 김형석의 9회말 기적의 동점홈런. 롯데 투수 최동원이 허탈한 표정으로 마운드에 서 있다.  ⓒ한국야구위원회



7구단 시대 개막…사상 첫 플레이오프 제도 도입


 김형석의 이 홈런은 한국야구사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다. OB 베어스의 역사뿐만 아니라 KBO리그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홈런이었고, 이로 인해 얽히고설킨 투수 개인 타이틀의 주인공들도 줄줄이 뒤바뀌는 운명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기적 같은 김형석의 홈런 맛을 제대로 음미하려면, 1986년 KBO 제도 변화를 먼저 알 필요가 있다.


가장 큰 변화는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이후 유지돼 오던 6개 구단 체제가 바뀐 것이다. 1985년 3월에 창단한 신생팀 빙그레 이글스가 1986년부터 1군 리그에 뛰어들면서 7개 구단 시대를 열게 됐다.


OB와 빙그레의 경기 모습 ⓒ두산베어스


 그러면서 사상 최초로 플레이오프가 펼쳐졌다. 1985년 삼성 라이온즈가 전기리그와 후기리그를 휩쓸어 통합우승을 차지하면서 한국시리즈가 무산되자 뭔가 클라이맥스 부분이 빠진 영화처럼 허전했다.


 그래서 무조건 한국시리즈가 열리도록 포스트시즌 제도에 손질이 가해졌고, 이에 앞서 플레이오프가 열리도록 만든 것이었다.


 정규시즌을 전기리그와 후기리그로 나눠 치르는 방식은 그대로였지만, 전·후기별로 1위와 2위팀에 각각 포스트시즌 진출권을 부여하는 것이 골자였다.


 포스트시즌 진출 시스템을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전·후기리그에 걸쳐 티켓 두 장(1위와 2위 상관없음)을 쥔 팀은 한국시리즈에 직행하고 나머지 두 팀끼리 플레이오프를 거행하며 ▲티켓을 가진 팀이 모두 다를 때(4개 팀일 경우)는 전기 1-후기 2, 후기 1-전기 2위가 플레이오프를 거쳐 한국시리즈에서 진출한다.


 막상 이렇게 제도를 만들었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가장 큰 모순은 전기리그와 후기리그에서 2위 안에만 두 차례 포함되면 한국시리즈 직행 티켓을 따낸다는 점이었다. 다시 말해 기별로 1위와 게임차가 아무리 크게 벌어져도 2위만 차지하면 1위나 2위나 차이가 없게 됐다. 각 팀들이 기별 우승이 아니라 2위 확보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시즌을 운영할 가능성이 크다는 부분은 이 제도가 가진 가장 큰 맹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1986년 전기리그에서 2위를 차지한 해태는 후기리그에서도 2위를 했지만 한국시리즈에 직행했다. 플레이오프는 전기리그 우승을 차지한 삼성과 후기리그 우승팀이 티켓을 놓고 싸워야 하는 상황이 됐다.



잠실 라이벌’ OBMBC의 후기리그 우승 경쟁


1986년 잠실야구장 ⓒ두산베어스


 [베팬알백] <21편>에서 설명했듯이, OB는 1985년 서울 입성 후 동대문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쓰다 1년 후인 1986년부터 잠실야구장을 사용하게 됐다. 그러면서 MBC 청룡과 잠실 한 지붕 두 가족 시대를 열었다. 양 팀은 이후 잠실에서 공존과 경쟁 속에서 프로야구를 지탱하는 라이벌로 성장했고, 잠실야구장은 프로야구의 메카로 자리를 잡았다.


 공교롭게도 1986년 후기리그는 잠실 라이벌 OB와 MBC가 선두 다툼을 벌이는 양상으로 전개됐다. 해태는 1985년 후기리그에 맞춰 입단한 선동열이 본격적으로 가동된 1986년부터 강호로 거듭났고, 여기에 당시 3만 명 이상(3만154석, 2022년 현재 2만2990석)을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롯데 자이언츠의 홈구장인 부산 사직구장이 개장되면서 프로야구 전체의 흥행에도 불이 붙었다.


 OB 선수단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의 영웅으로 1983년 OB 유니폼을 입었던 한대화는 간염으로 훈련을 많이 할 수 없는 몸 상태가 되면서 이렇다 할 활약을 펼치지 못한 채 해태로 트레이드됐다. 대전 출신의 한대화는 당초 고향팀인 신생 구단 빙그레로 트레이드를 요청했지만 해태로 방향이 바뀌자 트레이드를 거부하고 산사에 잠적하기도 했다. 프로야구 역사상 트레이드 거부를 이유로 임의탈퇴 처리된 1호 선수 한대화는 그해 개막을 앞두고서야 산에서 내려와 해태에 들어갔다. 대신 한대화와 트레이드 대상이었던 양승호와 황기선이 OB 유니폼을 입었다.


 원년부터 OB의 홈런포를 담당해 오던 김우열은 은퇴 말년에 고향(충북 옥천)을 프랜차이즈로 탄생한 신생팀 빙그레 이글스로 이적하게 됐고, 맏형 윤동균은 플레잉코치로 승격했다.


 장강의 앞 물결이 흘러가면, 뒷 물결이 들어오기 마련. 선린상고 시절부터 투타에 걸쳐 아마추어 최고 스타로 자리 잡은 고려대의 박노준은 1986년 계약금만 5000만 원을 받아 선동열(1985년 1억3800만 원) 다음으로 많은, KBO 역대 두 번째 최고 계약금 기록을 쓰면서 OB에 입단했다. 야수로만 따지면 역대 최고액이었다. 선린상고 시절부터 원투펀치와 중심타선을 이뤘던 김건우가 같은 해 MBC에 입단할 때 계약금 2500만 원을 받은 점과 비교하면 당시 박노준에 대한 기대와 스타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1986년 초대형 신인으로 평가받고 입단한 박노준. 투타겸업을 했던 그는 데뷔 첫 해 투수로 33경기에 등판해 5승 6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2.28을 기록했다. ⓒ두산베어스


 한대화가 떠난 3루수 자리엔 일본프로야구 히로시마 카프에서 활약하던 재일교포 박창언을 영입해 메울 계획이었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박창언이 부진하면서 이승희가 그 자리를 대신해 3할대 타율(0.307·규정타석에는 미달)을 올리며 쏠쏠한 활약을 펼쳤다. 중견수 박종훈은 연봉 3150만 원에 계약해 OB 선수로는 최초로 3000만 원을 돌파하기도 했다.


 시즌에 앞서 중위권 전력이라는 평가를 받던 OB가 후기리그 우승을 다투는 팀으로 변모한 데에는 무엇보다 1984년 입단한 3년생 재일교포 투수 최일언의 괄목할 급성장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중간과 선발을 오가며 1984년 9승(6패3세이브), 1985년 10승(14패3세이브)을 올린 최일언은 1986년 19승4패1세이브에 평균자책점 2.56을 기록하며 단숨에 에이스로 도약했다. 무엇보다 '해태 킬러'로서 주가를 높였다. 1986년에만 해태에 7승무패를 기록했다.


 MBC 역시 1983년 한국시리즈 준우승 이후 이런저런 이유로 팀이 어수선했으나 모처럼 가을잔치에 참가할 기회를 잡았다. 전기리그에서 28승4무22패(승률 0.620)의 호성적 올리고도 6개 팀 중 4위에 그쳤던 MBC는 후기리그에서 그해 신인왕이 된 김건우(18승6패, 평균자책점 1.81)와 1년 전 입단한 김용수(9구원승 26세이브, 평균자책점 1.67)의 맹활약 속에 무서운 상승세로 치고 올라왔다.


 결국 후기리그 우승 레이스는 막바지에 OB와 MBC, 해태 삼파전으로 전개됐다.



OB-MBC-해태, 후리리그 최종전 '경우의 수'

1986년 OB와 롯데의 경기 장면 ⓒ두산베어스

 먼저 해태는 9월 13일 잠실에서 MBC를 2-0으로 꺾은 뒤 16일 전주에서 다시 MBC를 4-1로 격파하면서 후기리그 33승2무18패를 기록, 잔여 1경기(17일 전주 MBC전)에 패하더라도 후리리그 공동 1위를 확보하게 됐다. 공동 1위 팀이 나오면 대회요강에 따라 추후 3전2선승제의 1위 결정전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전기리그에서 이미 2위를 차지한 해태로선 후기리그에서 2위만 확보해도 한국시리즈 직행 티켓을 잡기 때문에 최종전은 사실상 의미가 없었다.


 OB는 놀라운 뒷심을 발휘하며 막판 스퍼트를 펼쳤다. 12일 해태를 7-3으로 누른 뒤 14일 더블헤더에서도 해태를 각각 5-1과 11-3으로 연파했다. 그리고 16일 청주 빙그레전까지 11-3으로 이겨 파죽의 4연승을 내달렸다. 최종전에 앞서 후기리그 성적은 32승2무19패를 마크했다.


 MBC는 후기리그 우승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듯했으나 13일 잠실에서 해태에 0-2로 패하고, 16일 전주에서 다시 해태에 1-4로 지면서 2연패를 당해 곤경에 빠졌다. 결국 최종전을 앞두고 30승4무19패로 OB에 1게임차 뒤지게 됐다.


 OB나 MBC나 일단 플레이오프 진출권 확보가 최우선 목표. 최종전 1경기씩을 앞둔 상태에서 1게임차로 앞서 있는 OB가 유리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마냥 낙관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MBC의 최종전 상대가 해태였기 때문이다. 해태는 이미 한국시리즈 직행 티켓을 따내 MBC전에 전력을 다해 싸울 이유가 없었다. 하루 전 축배까지 들었으니 심신이 풀어질 대로 풀어졌을 가능성이 컸다. 이변이 없는 한 MBC가 이길 가능성이 큰 상황이었다. MBC가 승리하면 후기리그 54경기에서 31승4무19패(승률 0.620)로 마감하게 된다.


 그렇다면 OB는 최종전 상대인 롯데를 무조건 이겨야만 했다. 패할 경우 32승2무20패(승률 0.615)를 기록해 MBC에 게임차 없이 승률에서 밀려 3위로 떨어지게 된다. 물론 무승부를 기록하면 OB가 0.5게임차로 2위를 차지할 수 있지만, 무승부를 목표로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베팬알백_24]에서는 '최동원과 세상을 울린 김형석의 운명의 한 방' 스토리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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