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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국 Feb 25. 2023

[27] 김진욱-선동열 15회 완투 맞짱 무승부의 전설

베팬알백 | 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워메, 또 진욱이 너냐? 꼭 고로코롬 우리 게임에 나와야 쓰겄냐 잉?”


 해태 타이거즈의 간판타자 김종모는 경기 전 OB 베어스 선수들이 훈련을 시작하자 투수 김진욱을 보더니 농담을 던지며 얼굴을 찡그렸다.


 “아따, 징글징글허다.”


 지나가던 해태 4번타자 김봉연도 한마디 거들었다.


 선발투수 예고제가 시행되지 않던 1980년대 후반, 양 팀 라인업이 교환된 뒤에야 김진욱이 OB 선발투수로 등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해태 선수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실 고개를 더 흔들어야 하는 쪽은 어쩌면 OB 타자들이었는지 모른다. 해태 선발투수는 선동열이었으니까.


 선동열이 누군가. 1985년 후반기에 해태 유니폼을 입은 뒤 KBO리그를 폭격한 당대 최고 투수. 1986년엔 KBO리그 사상 최초로 0점대 평균자책점(0.99)의 신기원을 개척하기도 했다. 나아가 1987년(0.89)과 1993년(0.78)까지 총 3차례나 0점대 평균자책점을 작성했다. KBO리그에서 지금까지 0점대를 기록한 투수는 선동열 외에는 누구도 없다.


 그러나 그런 선동열에게도, 또 최강의 위용을 자랑하던 해태 타자들에게도 껄끄러운 상대가 있었으니 바로 OB 최일언과 김진욱이었다. 둘 다 ‘해태 킬러’라는 별명이 붙었고, 1980년대 후반 KBO리그에서 선동열과 ‘맞짱’을 뜨는 몇 안 되는 투수들이었다.


 0점대 평균자책점을 자랑하는 선동열이라면, 해태는 확률적으로 1~2점을 내면 이길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만 상대 선발투수 역시 1~2점 뽑기 힘든 투수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 시절 김진욱은 해태 타자들에게 그런 존재였다. 이기더라도 뭔가 쉽지 않은, 늘 불편했던 투수였다.


 [베팬알백] 27번째 주제는 1987년 4월 19일 ‘주윤발’ 김진욱과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의 15이닝 완투 맞대결의 전설이다.


김진욱 ⓒ두산베어스


●선동열을 만난 OB보다 해태가 찜찜했던 까닭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차임벨이 울리고, 1회초 OB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됐다. 선동열부터 마운드에 올랐다. OB 1번타자 김광림이 끈질긴 승부 끝에 6구째를 공략해 2루수 쪽 내야안타로 출루했다.


 ‘오늘 뭔가 되는 날인가.’


 김성근 감독은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2번타자 김광수에게 희생번트를 지시했다. 그러나 선동열의 불같은 강속구는 번트를 대기도 쉽지 않았다. 초구는 파울.


 2구째에도 다시 번트를 댔다. 그러나 투수 앞 땅볼. ‘수비까지’ 좋은 선동열은 곧바로 2루로 던져 선행주자를 잡아냈다. 1사 1루가 됐다.


 ‘날다람쥐’ 김광수는 실수를 만회하고자 2루 도루를 노리며 1루에서 리드를 잡기 시작했다. 그런데 선동열은 ‘견제마저’ 좋은 투수였다. 김광수가 견제구에 걸려 그만 아웃이 되고 말았다. 이어 3번타자 김형석도 1루수 앞 땅볼. OB는 선취점을 뽑는 데 실패했다.


 1회말 해태 공격. 마운드에 오른 OB 선발투수 김진욱은 선두타자 이순철을 스트레이트 볼넷으로 내보냈다.

 해태 주포 1루수 김성한이 손목 부상으로 시즌 초반 장기 결장하는 사이, 그 공백을 메우던 이건열이 타석에 들어섰다. 2루수 앞 땅볼. 1사 2루가 됐다. 이어 3번타자 김준환이 초구에 좌전 적시타를 때렸다. 2루주자 이순철이 쏜살처럼 홈까지 뛰어들면서 해태가 너무나도 쉽게 선취점을 뽑았다.


 1회부터 실점을 한 김진욱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당시 해태가 최강팀이었잖아요. 힘 있고 잘 치는 타자들이 많았죠. 그런데 상대 투수가 0점대 방어율(평균자책점)을 자랑하던 선동열이니까 솔직히 먼저 실점을 하면 이기기 쉽지 않잖아요. 그래도 1점까지는 해볼 수 있기 때문에 정신을 차렸죠. 2점을 주면 승부가 더욱 힘들어진다고 보고 어떻게 해서든 더 이상 실점하면 안 된다는 생각만 하고 던졌던 것 같아요.”


 두산과 kt 사령탑을 지낸 김진욱 전 감독의 기억이다.


해태 선동열 ⓒKBO


0-1로 뒤진 8회말선동열 상대로 마침내 동점


 김진욱은 스스로의 다짐대로 이후 침착하게 막아 나갔다. 다음 타자인 4번 김봉연을 3루수 병살타로 유도해 1회를 마쳤다.


 2회는 삼자범퇴, 3회와 4회엔 2사후 안타를 1개씩 내줬지만 무실점. 그리고 5회부터는 해태 타선을 무안타 무실점으로 꽁꽁 묶어 나갔다.


 김진욱이 호투하는 사이 OB는 점수를 뽑아야 했지만,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했다. 1회 김광림이 내야안타를 친 뒤 4회까지 안타 생산에 실패했다.


 이런 상황에서 5회초 찾아온 기회를 날린 것이 아쉬웠다. 선두타자 박종훈이 중전안타로 팀의 두 번째 안타를 뽑았지만 김경문이 초구에 2루수 앞 병살타를 치고 말았다. 이어 신경식이 볼넷을 골라 2사 1루. 여기서 이승희의 중월 2루타가 터졌다. 1루주자 신경식이 2루와 3루를 돌아 ‘학다리’ 질주로 홈까지 쇄도했다. 하지만 상대의 기막힌 중계플레이에 걸려 포수 김무종에게 태그아웃되면서 땅을 쳤다.


 OB는 7회초 다시 찬스를 잡았다. 1사 후 윤동균이 상대 유격수 서정환의 실책으로 나간 뒤 박종훈의 우전안타로 1사 1·2루. 그러나 후속타 불발로 역시 무위에 그쳤다.


 0-1 스코어는 그대로 이어졌다. 1점은 쉬운 듯 어려운 점수였다. ‘난공불락’ 선동열이 마운드에 버티고 있기에 더욱 그랬다. 경기 후반으로 접어들수록 1이닝 1이닝이 순식간에 지나갔고, 타선이 좀처럼 점수를 뽑지 못하니 김진욱의 역투도 물거품이 되는 듯했다.


 패배의 어두운 먹구름이 엄습해 오던 8회초, OB는 마침내 선동열을 무너뜨리며 귀하디 귀한 1점을 얻었다.

 선두타자 8번 이승희가 볼넷을 얻은 뒤 9번타자 유지훤이 1루수 앞으로 희생번트를 성공하면서 1사 2루. 여기서 1번타자 김광림이 통렬한 좌전 적시타로 이승희를 불러들였다. 드디어 1-1 동점이 만들어졌다.


김광림 ⓒ두산베어스



●연장 15누구도 먼저 마운드를 내려오지 않았다


 9회 정규이닝까지 1-1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이때까지 선동열은 133구, 김진욱은 127구를 던진 상황. 요즘 같으면 투수 보호 차원에서 강판됐을지도 모른다. ‘혹사’의 위험성보다는 ‘사나이의 자존심’을 더 중요시하던 시대. 둘 다 연장전에 접어들어서도 마운드에 올랐다. 아니, 여기까지 온 이상 둘은 상대보다 먼저 마운드에서 내려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연장 10회초, OB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선두타자 신경식이 좌전안타를 뽑았다. 이승희의 1루수 앞 번트. 해태의 바뀐 1루수 김일환이 선행주자를 잡으려고 2루에 던졌지만 신경식이 먼저 2루에 도달했다. 야수선택으로 무사 1·2루. 이날 가장 좋은 찬스가 만들어졌다.


 다시 유지훤의 희생번트 시도. 그러나 역시 ‘수비마저’ 좋은 선동열이 번트타구를 잡자마자 과감하게 3루로 던져 선행주자를 잡아냈다. 1사 1·2루에서 김광림의 투수 앞 땅볼로 2사 2·3루가 됐다. 다음 타자 김광수의 타구가 1루수 미트에 빨려 들어가면서 점수를 뽑는 데 실패했다.


 OB는 연장 11회말에 큰 위기를 만났다. 선두타자 이순철을 볼넷으로 내보낸 뒤 김일환의 투수 앞 번트 타구를 김진욱이 잡아 2루에 던졌지만 모두 세이프. 무사 1·2루에서 7회부터 좌익수 대수비로 들어간 김일권의 희생번트로 1사 2·3루가 됐다. 끝내기 위기였다.


 김진욱은 해태 4번타자 김봉연을 우익수 얕은 플라이로 유도했다. 발 빠른 3루주자 이순철도 홈 쇄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2사 2·3루.


 다음 타자는 김종모였다. 김진욱이 “무슨 공을 던져도 다 친다”며 가장 껄끄러워하던 교타자. 결국 고의볼넷으로 만루책을 썼다. 2사 만루가 됐다. 여기서 김진욱은 한대화를 1루수 파울플라이로 잡아내면서 한숨을 돌렸다. 


 12회, 13회, 14회…. 양 팀은 점수를 내지 못했다. 결국 규정상 마지막 이닝인 연장 15회에 접어들었다.

 선동열은 여전히 힘이 남아도는지, 15회초 OB 공격을 공 12개로 삼자범퇴시키며 마운드를 내려왔다.

 OB로선 이제 이길 방법이 없었다. 최선은 무승부였다. 김진욱은 13회와 14회 삼자범퇴로 깔끔하게 막은 여세를 몰아 15회말에도 거침이 없었다. 조충열을 초구에 1루수 직선타, 김무종을 우익수 뜬공으로 잡은 뒤 이순철을 1루수 파울플라이로 잡아냈다. 공 8개로 마지막 이닝을 끝냈다.


1987년 4월 19일 선동열 vs 김진욱 15회 완투 맞대결 기록지ⓒKBO


●선동열 213-김진욱 200구…역대 2호 연장 15회 완투 무승부


 처절하게 전개된 연장 15회 혈투는 이로써 1-1 무승부로 끝났다. 선동열은 15회까지 56타자를 상대하며 무려 213개의 공을 던졌다. 8안타 4볼넷 8탈삼진 1실점.


 김진욱은 정확히 200개의 투구수로 55타자를 상대했다. 3안타 7볼넷 4탈삼진 1실점. 특히 김진욱은 5회부터 15회까지 무려 11이닝을 무피안타 무실점으로 막는 강렬한 투구를 이어갔다. 비공인이지만 산술적으로 ‘11이닝 노히트노런’ 역투를 펼친 셈이었다.


『18일까지 3연패를 했던 해태는 19일 경기에선 지난해 OB에만 6승무패를 기록한 에이스 선동열을 내세웠으나 15회까지 OB 김진욱으로부터 3안타밖에 뽑지 못하는 극도의 타선 부족으로 1-1로 비기는 데 그쳤다.(중략) OB 김진욱은 15회까지 흐트러짐 없이 역투, 5회 이후엔 해태에 하나의 안타도 내주지 않아 완투한 해태의 선동열보다도 나은 투구 내용을 보였다. 선동열은 9개의 삼진을 잡았지만 안타는 8개나 맞았다.』 <동아일보 1987년 4월 20일자>


 사실 연장 15회까지 8안타를 허용한 선동열에게 8개나 맞았다고 하기엔 평가가 야박하긴 하다. 9이닝당으로 계산하면 4.8개를 내준 것이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언터처블 선동열이었기에 그런 평가도 나온 것이다. 그보다는 연장 15회까지 3안타만 허용한 김진욱이 놀라운 피칭을 했다고 말하는 편이 옳아 보인다.


김진욱 ⓒ두산베어스


 김진욱 전 감독은 15회 완투를 한 그날로 기억의 회로를 돌렸다.


 “그날따라 유난히 코너워크가 잘 이뤄졌어요. 15회까지 던졌지만 전혀 피곤한 줄을 몰랐으니까. 밸런스가 좋으면 던질 때 힘들지 않은데, 그날은 그만큼 밸런스가 좋았어요. 연장 15회말이 끝나면서 무승부가 됐을 땐 그냥 이기지 못했다는 생각에 허탈하고 아쉬웠어요. 선동열이라는 이름의 무게감이 있기 때문에 그 시절 상대 투수라면 부담이 컸죠. 당시 해태가 1점이라도 앞서 있으면 선동열이 일부러 점퍼를 벗고 몸을 푸는 시늉만 해도 ‘아이고 졌다’를 외치던 시절이니까. 난 그날 상대가 선동열이라 더 집중이 됐던 것 같아요. 15회까지 어떻게든 이기기 위해 던졌고 좋은 투수와 좋은 게임을 했어요. 이기지 못한 점은 아쉬웠지만, 개인적으로는 성취감이 컸습니다.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됐던 게임으로 기억해요.”


 KBO리그에서 양 팀 선발투수 모두 연장 15회까지 완투를 펼치며 무승부를 기록한 것은 역대 총 4차례 있었다.


 최초는 1986년 7월 27일 해태 차동철과 청보의 재일교포 투수 김신부가 0-0 무승부를 기록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날 김진욱과 선동열의 15회 완투 맞대결은 역대 2번째인 셈이다. 김진욱은 베어스 역사에서 유일한 투수이기도 하다.


 영화로도 소개된 불세출의 투수 해태 선동열과 롯데 최동원의 연장 15회 완투 맞대결은 KBO 역대 3번째였다. 선동열은 1987년 4월 19일 OB전에서 김진욱과 15회 연장 무승부를 기록한 뒤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5월 16일 롯데전에서 최동원과 또 15회 완투 무승부를 기록했다. KBO리그 역사에서 두 차례나 15회 완투를 펼친 유일한 주인공이다.


 1994년 4월 20일 쌍방울 ‘어린왕자’ 김원형과 해태 ‘싸움닭’ 조계현이 연장 15회 혈투 끝에 3-3 무승부를 기록한 것이 마지막 사례로 남아 있다. 해태가 4경기에 모두 관여돼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김진욱은 4월 19일 15회 완투 이후 5월 3일 청주 빙그레전에 처음 등판했다. 보름 만의 등판이었는데, 이번엔 6회에 OB 3번째 투수로 나섰다. 그리고는 6회 두 타자를 범타 처리한 뒤 8회 1사까지 무안타로 막았다. 이로써 4월 19일 해태전 5회부터 ‘13연속이닝 무피안타’ 신기록을 세웠다.


 그 이후 1991년 쌍방울 신인 소방수 조규제가 14.1이닝 연속 무피안타(8월 18일 청주 빙그레전~9월 7일 전주 빙그레전)로 김진욱의 기록을 경신했고, 다시 1999년 삼성 마무리투수 임창용이 15이닝 연속 무피안타(7월 4일 수원 현대 DH1~24일 대구 현대전)로 조규제 기록을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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