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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국 Feb 26. 2023

[28] 선동열 킬러 '주윤발' 김진욱에 관하여

베팬알백 | 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불세출의 투수 선동열과 맞대결을 펼쳐도 승리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만든 사이드암 투수. 잘 생긴 얼굴로 '주윤발'로 불렸던 쾌남.  ‘해태 킬러’와 ‘선동열 킬러’로 이름을 날린 그 시절 김진욱에 관한 추억 여행이다.


[베팬알백] 28번째 주제는 1987년 4월 19일 OB 김진욱과 해태 선동열의 15이닝 완투 맞대결의 전설을 이어가려 한다.



●해태전 맞춤형 투수 김진욱…김성근 감독의 전략적 선택


OB베어스 사이드암 강속구 투수 김진욱의 투구 장면 ⓒ두산베어스

 1987년 4월의 그날 해태전에서 연장 15회를 던지고 무승부가 되자 김진욱은 더욱 아쉬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선동열 역시 자존심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투수. 헛심을 쓴 그날의 결과를 운명으로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음 잠실 OB 게임에 던지겠다.”


 선동열이 연장 15회 무승부로 끝나자마자 선전포고를 했다는 말이 OB 선수들 귀에까지 들려왔다. 다시 만날 OB전에 일찌감치 자원등판 의사를 드러냈다는 얘기였다.


 OB 타자들의 표정난감함이 번졌다. 그리곤 한마디씩 던졌다.


 “연장 15회 무승부가 되는 바람에 일이 더 꼬였네.”


 “야야, 우리 괜히 선동열 독기만 품게 만든 것 아니냐?”


 여기저기서 푸념이 터져 나왔다. 타율 떨어지는 소리가 벌써부터 들리는 듯했다. 선동열을 다시 만나게 됐으니 타자들로서는 그런 반응이 나올 만도 했다.


 그러나 김진욱의 생각은 달랐다.


 “당시 우리 팀 타자들이 ‘왜 또 동열이가 우리 게임에 등판하냐?’면서 웅성웅성했어요. 우리끼리는 ‘선동열이 화가 나서 다음 잠실 게임에 자원등판하기로 한 것 아니냐’는 말까지 돌았으니까요.”


 김진욱 전 감독은 오래됐지만, 지금도 또렷한 당시의 상황을 들려줬다.


 “물론 타자 입장에서는 선동열과 만나는 게 좋을 리 없죠. 그런데 난 솔직히 그게 싫었어요. 선동열하고 붙으면 붙는 거지, 붙기 전부터 주눅 드는 게 싫었죠. 그때 저는 속으로 다짐했어요. ‘그래? 그럼 다음에 또 한 번 붙어보자’고 말이죠.”


해태 선동열 ⓒKBO

 1987년 김진욱은 32경기(선발 12경기)에 등판해 150.1이닝을 소화하면서 평균자책점 2.57로 빼어난 성적을 거뒀다. 유난히 승운이 따르지 않아 4승7패6세이브에 그쳤지만, 투구 내용 자체는 빼어났다. 최일언이 같은 해 2.56의 평균자책점(154.2이닝)으로 14승8패1세이브를 올린 것에 비하면 김진욱의 승운이 얼마나 따르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다.


 특히 김진욱은 그해 해태전에 매우 강했다. 그리고 해태전에서만 무려 65이닝(8경기)을 던졌다. 한 시즌 전체 투구이닝의 43%를 해태 특정팀을 상대로 던졌던 것이다.


 OB 김성근 감독은 타고난 전략가였다. 치고 빠질 때를 치밀하게 계산하는 스타일이었다. 김 감독의 성향상 김진욱을 그렇게 집중적으로 ‘해태전 맞춤형 투수’로 투입했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해태에 얼마나 강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실제로 1987년 김진욱의 해태전 평균자책점은 1.66에 불과했다. 해태 타자들이 평균적으로 9회까지 공격해도 김진욱을 상대로 2점을 뽑기가 어려웠다. 선동열을 상대하는 OB 타자들만큼이나 김진욱을 상대하는 해태 타자들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타율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니 해태 타자들도 김진욱 얼굴만 보면 “징글징글허다”고 혀를 내두를 수밖에.


 다만 김진욱은 그해 해태전에서도 승운이 따르지 않았다. 1점대 평균자책점으로도 1승4패에 그쳤으니 말이다. 4월 19일 광주무등야구장에서 열린 해태전 15회 1-1 무승부도 그런 경기 중의 하나였다.



●선동열과 맞대결에서 승승장구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OB와 해태의 경기장면. OB 투수 김진욱은 '해태 킬러'이자 '선동열 킬러'였다. ⓒ두산베어스


 1980년대 해태는 왕조를 세운 최강팀이었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 4연패를 달성하며 리그를 압도했다. 선동열을 필두로 막강한 마운드를 구축하고 있었고, 1번부터 9번까지 쉬어갈 틈이 없는 강한 타순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니 상대 타자뿐만 아니라 상대 투수 역시 해태는 피해 가고 싶은 팀이었다.


 그런데 김진욱은 모두가 기피하는 해태를 만나는 걸 오히려 즐겼다. 김진욱은 개인적으로 프로 통산 1안타 완봉승을 2차례 기록했다. 거의 노히트노런이나 다름없는 게임이었다.


 그중 하나는 1988년 5월 24일 잠실 MBC전 4-0 승리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1989년 5월 4일 잠실 해태전 1-0 승리였다. 그런데 바로 이 경기도 선동열과 완투 맞대결 속에 이긴 것이었다. 김진욱은 1안타 무실점 완봉승, 선동열은 6안타 1실점 패전을 기록했다.


 김진욱은 그로부터 40여 일 지난 6월 16일 잠실에서 또 해태 선동열과 선발 맞대결을 펼쳤다. 선동열은 설욕을 벼르고 마운드에 올랐지만, 이날 역시 김진욱의 1-0 완봉승으로 끝났다. 선동열은 4안타 1실점으로 또 완투패를 당했다.


 김진욱의 통산 기록을 보면 5차례 1-0 완투게임을 기록했다. 그중 3차례 완봉승과 2차례 완투패가 포함돼 있다. 그런데 3차례 1-0 완봉승 중 2차례가 선동열과 완투 대결 끝에 얻은 것이었다. 반면 선동열은 개인통산 9차례 1-0 완투게임에 관여했는데 5번 이기고 4번 졌다. 그 4차례 완투패 중 2차례는 김진욱과 맞대결에서 당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김진욱과 선동열이 맞붙은 2차례 1-0 완투 경기만 놓고 보면 김진욱이 2승 무패를 기록했다. 그만큼 해태 타자들은 김진욱이 마운드에 오르면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해태가 선동열을 내고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던 상대였다. 이런 순간순간의 임팩트와 기억이 김진욱을 ‘해태 킬러’와 ‘선동열 킬러’로 각인시켜 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김진욱은 어떻게 해태를 상대로 잘 던졌을까.


 “해태에는 힘 있고 적극적으로 치는 타자들이 많았어요. 당시 저도 힘이 있던 시절이라 오히려 힘 대 힘으로 붙는 건 자신이 있었습니다. 콘택트 스타일로 짧게 치는 타자를 상대하는 게 좀 힘들었죠. 그래서 해태에 강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해태전 선발로 나갈 때 경기 전 김성한 선배나 김종모 선배를 만나면 ‘아따, 또 너냐 잉?’ 그런 말을 자주 했어요. 그때 속으로 ‘아, 이 사람들도 나를 부담스러워하는구나’ 생각했죠. 그래서 더 자신 있게 던졌던 것 같아요.”



주윤발로 불렸던 쾌남, 김진욱 투수에 관하여


김진욱 ⓒ두산베어스


 김진욱은 젊은 날, 잘 생긴 외모로 눈길을 끌었다. 당시 스크린의 최고 스타였던 홍콩 배우 주윤발을 닮았다고 해서 ‘주윤발’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귀공자 같은 외모만 보면 야구인생도 탄탄대로일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선수 시절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성장 과정부터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의 본적은 영천으로 돼 있지만, 이곳은 아버지의 고향이다. 김진욱이 실제로 태어난 곳은 대구였다. 대구에서 성장하던 그는 대명초등학교 4학년 말에 아버지의 고향 영천으로 전학을 갔다. 그리고 영천중앙초등학교에서 5학년 말부터 야구를 시작했다.


 그런데 중학교 입학 무렵 부모님과 함께 다시 강원도 춘천으로 이사를 갔다. 야구부가 없는 강원중에 배정되는 바람에 1년간 야구를 그만둬야 했다. 그러다 야구부가 있는 춘천중으로 전학을 가면서 다시 야구공을 잡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 그의 잠재력이 폭발했다. 춘천중 시절 1976년 문교부장관기 우승을 이끌며 최우수선수상을 받았고, 전국 고교 팀들의 스카우트 표적 1호가 됐다. 하지만 그는 수많은 야구 명문학교들의 제안을 제쳐두고 친구들과 함께 이희수 감독이 이끄는 창단팀 천안북일고로 진학했다.


 고교 2학년 때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 동계훈련 도중 갑자기 허리에 이상증세가 나타나면서 선수 생명의 기로에 섰다. 허리 통증은 다리 마비증세로 이어졌다. 거의 걷지를 못했다. 병원에 갔더니 ‘척추분리증’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김진욱은 그 시절을 돌이키며 “혼자서 많이 울었던 시기였다”고 기억했다.


 “스스로 일어서지를 못할 정도였으니 많이 울었죠. 당시 병원에서 ‘이제 운동 못한다’고 하더라고요.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에 가도 같은 얘기였고.”


 야구선수로서뿐만 아니라 일반인으로 살아가야 할 삶까지 절망에 부딪친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야구를 하려고 고집을 부렸죠.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그랬더니 의사선생님이 부모님한테 ‘운동 다시 하다가는 영원히 휠체어를 탈 수 있다, 당신들이 부모 맞냐’면서 만류를 하시더라고요. 부모님도 ‘이제 야구는 여기서 끝내자’고 하셨어요. 그래도 저는 야구를 포기할 수 없더라고요. 스포츠의학도 발달되지 않았던 시기인데 혼자서 이리저리 운동법을 궁리하면서 나에게 맞는 재활훈련을 스스로 찾아서 했죠.”


 그는 기적적으로 다시 일어섰고, 야구를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허리 통증은 잊을 만하면 다시 찾아오는 불청객. 허리만 아프지 않으면 그의 구위는 아마추어 무대에서는 언터처블인데, 야구를 하는 날보다 쉬는 날이 더 많았다.


 다행히 야구로 돌아와 천안북일고 졸업반이던 1979년 봉황대기 고교야구대회에서 감투상을 받았다.


 동아대로 진학한 뒤에도 한동안 허리가 아파 운동을 할 수 없었다. 그가 훈련을 하려고 하면 당시 동아대 강병철 감독이 부상 악화가 걱정돼 만류를 했고, 그는 “안 아프다”며 고집을 부렸다. “1이닝, 아니 1타자만이라도 상대하게 해달라”며 강 감독에게 매달려 겨우 등판 기회를 잡곤 했다.


 그러다 졸업반이던 1983년 대통령기전국대학야구대회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했다. 프로 구단의 눈길을 받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결국 당시 대전과 충청권을 연고로 한 OB가 천안북일고 출신의 김진욱을 지명하게 됐다.

 초등학교는 대구에서 영천으로, 중학교는 춘천으로, 고등학교는 천안으로, 대학교는 부산으로 옮겨다닌 ‘유전인생’. 프로 생활은 대전에서 출발했지만, 1년 후 OB 베어스는 서울로 입성하게 된다.



●고질적 허리통증 속 고군분투…봄날 수채화 같았던 투구

OB베어스 김성근 감독 ⓒ두산베어스

 1984년 OB 입단 당시 신인이지만 구위 하나만큼은 특급으로 평가받았다. 선수 보는 눈이 까다롭기로 소문난 김성근 감독은 스프링캠프부터 루키에게 눈길을 주더니 결국 1984년 4월 7일 시즌 개막전 선발투수로 김진욱을 낙점할 정도였다.


 김진욱은 프로 데뷔전에서 MBC를 상대로 8회 2사까지 4안타 1실점으로 막아 2-1 승리를 이끌면서 승리투수가 됐고, 개막 한 달 동안 4승1패를 기록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러나 프로에서도 고질적 허리 통증으로 인해 기대만큼 성장하지는 못했다. 한 시즌을 완벽한 몸 상태로 던진 적이 거의 없었다.


 김진욱은 1984년 데뷔해 1992년까지 9년간 OB에서 뛰었다. 1993년 쌍방울로 이적한 시즌까지 KBO리그에서 10년간 활약하며 통산 53승71패16세이브, 평균자책점 3.69를 기록했다. 1994년엔 대만프로야구 준궈 베어스에 입단했다가 결국 은퇴했다.


 “OB에 입단하고 나서 가장 난감했던 것도 역시 허리 통증이었어요. 선배들 눈치가 많이 보였어요. 단체 훈련을 하다가 갑자기 허리가 아파 훈련에서 열외 되는 일이 잦았으니까요. 처음엔 이런저런 얘기들이 나왔죠. ‘게으르다’는 둥, ‘꾀병 부리는 것 아니냐’는 둥….”


 사정을 모르는 야구인들과 팬들은 더 오해를 하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인물값 하느라 야구를 꾸준히 하지 못한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히 이런 오해는 적어도 OB 선수단 내에서는 없었다.


김진욱 ⓒ두산베어스


 “고질적인 허리 통증으로 운동하기 힘든 몸이라는 것을 안 OB 선배들이 나중에는 정말 많이 배려해 주셨어요.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부상이 있고, 그렇지 못한 부상이 있잖아요. 허리 통증은 정신력으로 이겨낼 수 없거든요. 허리가 아플 땐 팔 높이 자체가 달라지기도 했으니…. 저도 물론 훈련을 할 수 없는 날이면 벤치에 앉아서라도 훈련이 끝날 때까지 함께하려고 했죠. 선배들, 동료들 배려 덕분에 그래도 10년간 프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몸이 따라주지 않는데 무리하게 계속 던지다 보니 선수 생활 후반부에는 어깨 인대 손상이 오더라고요. 남들은 제가 선수 생활을 너무 일찍 그만뒀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저는 제 자신이 자랑스러웠어요. 어릴 때 허리 때문에 병원에서도 야구를 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프로에서 10년을 버텼잖아요.”


 시속 140㎞만 던져도 강속구라는 소리를 듣던 1980년대, 정통 오버핸드 투수라고 해도 팀마다 140㎞를 넘는 투수는 손에 꼽혔다. 사이드암과 언더핸드 투수라면 기교파로 인식됐다. 그랬던 그 시절에 사이드암 투구로 시속 140㎞대 빠른 공을 뿌린 김진욱은 ‘별종’이라면 ‘별종’이었다. 전 구단을 통틀어서도 그만큼 빠른 공을 던지는 ‘옆구리 투수’를 보기 힘들었다. 강속구 사이드암 투수의 계보를 논하자면 김진욱이 원조격이다.


 건강한 몸 상태로 던질 수만 있었다면 김진욱은 분명 자신의 통산 기록 이상의 퍼포먼스를 펼쳤을지 모른다. 허리 통증이 없는 날에는 누구보다 투쟁심이 발동하는 투수이기도 했다.


 실제로 김진욱은 프로 10년간 완투만 34차례 기록했다. 통산 53승 중 완투승만 32승이었고, 완봉승도 12차례나 있었다. 완봉승 12회는 역대 12위의 기록이다.


 입단 이듬해인 1985년 10승 투수로 도약하고, 1988년과 1989 11승을 올리며 ‘반짝’ 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시즌에는 한 자릿수 승리에 그쳤다.


 기록만 보면 꾸준하지 못했고, 최고의 투수가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OB 베어스 야구를 논할 때 김진욱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암흑기가 시작됐던 그 시절, 그래도 유일하게 2년 연속(1988~1989년) 두 자릿수 승리(11승)를 올리며 고군분투한 어깨였다.


 ‘천하무적’ 선동열을 상대로도 이길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투수. 그런 점에서 김진욱은 암흑기 시절, 상처 난 베어스 팬들의 자존심을 지켜준 고마운 존재였다. 봄날 수채화 같이 피어올랐던 그의 싱그러운 미소는 팬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주는 작은 위로이기도 했다.


김진욱 ⓒ두산베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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