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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국 Feb 26. 2023

[29] 불의의 사고와 장호연의 '개막전 노히트노런'

베팬알백 | 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자, 라스트!”


 1988년 4월 1일 오후, 롯데와 개막전을 하루 앞둔 OB 선수단은 부산의 경남상고(현 부경고) 운동장에서 훈련을 하며 마지막 컨디션 점검에 나섰다. OB 포수 조범현은 배팅볼 투수로 마운드에 올라 타격 훈련을 도왔다. 타석에 들어선 좌타자 김광림을 향해 마지막 공을 던져 주면서 “라스트”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 공만 치고 나면 훈련 끝. 그래서 다른 선수들은 이미 하나둘 짐을 싸면서 숙소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김광림이 잡아당긴 마지막 타구는 1루 선상으로 총알처럼 날아갔다. 1루 파울라인 밖으로 김진욱이 걸어가고 있는 것을 발견한 김광림은 놀란 나머지 “볼!”이라고 고함을 쳤다. 그러나 쳐다볼 새도 없었다. 직선 타구는 눈 깜짝할 사이에 김진욱의 급소를 강타했다.


 “악!”


 김진욱은 외마디 비명을 지른 채 그 자리에 쓰러졌다. 땅바닥에 드러누워 온몸이 오그라든 채 고통스러운 얼굴로 데굴데굴 굴렀다. 그를 본 동료들은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김진욱은 다음날 개막전 선발투수로 내정돼 있었다. 돌다리도 두들기고 가는 성격의 김성근 감독이 ‘개막전의 사나이’로 불린 장호연을 제쳐두고 일찌감치 낙점했을 만큼 김진욱은 그해 스프링캠프와 시범경기에서 절정의 컨디션과 구위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불의의 사고 속에 김진욱은 병원으로 후송됐고, 난감해진 김성근 감독은 결국 개막 다음날 2선발로 내정했던 장호연을 하루 앞당겨 개막전 선발투수로 결정했다.


 그런데 그 장호연이 그만 사고(?)를 치고 말았다. 바로 롯데를 상대로 ‘개막전 최초 노히트노런’ 대기록을 세운 것이었다.


 [베팬알백] 29번째 이야기는 KBO리그 역대 3번째 노히트노런인 1988년 개막전을 찾아가 본다.


 이 노히트노런은 KBO 개막전 역사상 처음이자 유일한 노히트노런이다. 그리고 베어스 역사상 최초의 노히트노런이기도 하다. 역대 노히트노런 중 삼진을 하나도 잡지 않은 유일한 사례이자 최소 투구수로 달성했다는 것도 특이점이다.


사연 없는 대기록이 있겠냐마는 장호연의 노히트노런 속에는 많은 뒷얘기와 사연이 숨어 있다.


장호연 ⓒ두산베어스


1988년 개막전 선발, 장호연 대신 김진욱을 먼저 내정한 이유


 장호연은 ‘개막전의 사나이’로 통한다. 1983년 동국대 졸업 후 OB에 입단하자마자 개막전에 선발등판해 완봉승을 올리며 승리의 첫 단추를 끼웠다. 1984년에만 동아대 출신의 신인 김진욱이 개막전 선발로 나섰을 뿐, 1987년까지 개막전 선발은 줄곧 장호연의 몫이었다.


 장호연은 그 이후에도 1988년, 1989년, 1990년, 1992년, 1995년 등 개막전에만 총 9차례나 선발투수로 등판해 이 부문 최다 출장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통산 6승2패로 여전히 개막전 최다승 투수로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1987년까지의 실적만 보더라도 대단했다. 장호연은 4차례 개막전 선발투수로 나서서 3승을 올렸다. 1986년 해태와 격돌한 개막전에서만 팀이 연장 승부 끝에 3-3 무승부를 기록하는 바람에 승리를 기록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김성근 감독만큼 미신과 징크스를 많이 따지는 사람도 없다. 그럼에도 1988년 김 감독이 ‘개막전 승리 보증수표’ 장호연을 제쳐두고 김진욱을 일찌감치 개막전 선발투수로 낙점한 데에는 크게 2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김진욱의 구위가 빼어났다.


 OB 구단은 1988시즌에 앞서 투수 최일언과 김진욱, 포수 김경문 등 3명을 특별히 일본 요코하마 구단의 오키나와 스프링캠프에 파견했다. 거기서 김진욱은 피칭에 완전히 눈을 떴다.


 “요코하마 선수단하고 같이 훈련하면서 정말 야구가 많이 늘었습니다. 그전까지 직구와 커브, 싱커를 던졌는데 요코하마 캠프에서 포크볼을 배웠어요. 특히 그때 투구 밸런스를 완벽하게 내 것으로 터득한 게 가장 큰 소득이었습니다. ‘이게 밸런스구나’, ‘이렇게만 던지면 되겠다’ 싶었어요. 그때만 해도 그해 20승도 자신 있었어요.”


 김진욱 전 감독은 지금도 1988년 당시의 느낌이 떠오르는지 지난날을 회상하며 목소리 톤을 높였다.


 요코하마 스프링캠프를 마치고 국내로 돌아와 김진욱이 피칭하는 모습을 보고는 김성근 감독도 깜짝 놀랐다. 사이드암 투수로 밸런스가 완벽해졌고, 강속구에 힘이 더 붙었다. 김 감독은 김진욱을 향해 신뢰의 눈빛을 보냈다. 그러더니 한마디를 던졌다.


 “진욱이, 개막전 맞춰 준비해라.”


 그리고 다른 이유 하나는 ‘개막전의 사나이’ 장호연의 컨디션이 더디게 올라왔다는 점이었다. 장호연은 1987년 15승8패6세이브, 평균자책점 2.82의 호성적을 올렸다. 그러나 연봉 협상에서 구단과 합의점을 찾지 못하면서 2월에 진행된 제주도 전지훈련 명단에서 제외됐다. 서울에 남아 모교인 충암고와 일산에 있는 제일은행 구장을 번갈아가며 개인 훈련을 해오다 연봉 타결이 되면서 뒤늦게 팀 훈련에 합류했던 터였다.



●개막전 선발 낙점 김진욱, 불의의 사고 순간

김진욱 ⓒ두산베어스

 “야, 근데 우리 개막전 선발투수가 누구냐?”


 1988년 개막 하루 전, 버스를 타고 경남상고로 훈련하러 가는 길에 베테랑 투수 계형철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 시절엔 선발투수 예고제를 시행하지 않았다. 특히나 김성근 감독은 선발투수와 라인업을 놓고 경기 당일까지 상대와 수싸움을 펼칠 정도로 기밀 유지를 중요시하던 스타일. 심지어 같은 팀 선수들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


 누구도 대답을 하지 않자 계형철이 넘겨짚었다.


 “진욱이 너냐?”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답게 촉이 있었다. 전지훈련과 시범경기에서 김진욱의 구위를 봤으니 그렇게 짐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김진욱은 선수 시절부터 신사였다. 거짓말을 잘 못하는 스타일이었다. 먼저 나서서 “접니다”라고는 말하지 못했지만, 계형철 선배가 직접적으로 물어오자 어쩔 수 없이 “예”라고 대답했다.


 버스 바로 옆 좌석에 앉은 장호연이 김진욱을 보면서 다소 놀란 듯이 “너냐?”라며 물었다.


 장호연이라면 ‘개막전의 사나이’ 아닌가. 갑자기 느낌이 이상했다. 김진욱은 이미 한 달 전에 김성근 감독에게 “개막전 준비하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개막을 앞두고 정식 통보를 받지는 못했다. 갑자기 선발이 바뀐 건가 싶어 장호연에게 되물었다.


 “혹시 형이에요?”


 “아니, 나 아니야.”


 김진욱의 얘기에 1년 선배 장호연은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에이, 감독님이 바꿨구먼. 그럼 형이 낼 개막전 선발이네. 잘 던져요.”


 장호연은 “나한테는 아무 말씀 없었어”라며 재차 손을 내저었다.


 경남상고에 도착해 오후 늦게까지 훈련을 진행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선수들은 다음날 개막전을 머리에 그리며 하나둘 훈련을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그때 김진욱도 장호연과 외야에서 러닝을 한 뒤 가방을 싸기 위해 1루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1루 근처 파울라인을 넘어가는 순간 어디선가 “볼!”이라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고, 김진욱은 공을 쳐다볼 새도 없이 그만 타구에 급소에 맞고 말았다.


 현재 ‘김광림 야구학교’ 대표이자 감독을 맡아 후진을 양성하고 있는 김광림은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다.


김광림 ⓒ두산베어스


 “제가 좌타자니까 왼쪽 타석에서 공을 잡아챘는데, 타구가 직선으로 날아가다 오른쪽으로 휘어지더라고요. 1루 쪽을 보니 누가 있었어요. 타구 궤적상 위험하겠다는 느낌이 왔어요. 그래서 순간적으로 ‘볼’이라고 외쳤는데 진욱이가 바로 맞고 쓰러졌죠. 사실 각도상 급소에는 거의 맞을 수 없었거든요. 외야에서 1루 쪽으로 대각선으로 걸어왔고, 1루 파울라인을 넘어갔기 때문에 오른발을 앞으로 내딛는 상황이었으면 허벅지나 엉덩이에 맞았겠죠. 하필이면 왼발을 내딛고 다리가 벌어지는 그 순간에….”


 자신의 타구에 동기 투수가 불의의 사고를 당했으니 그 역시 충격이 컸다. 김진욱이 개막전 선발투수라고 알고 있었으니 말할 것도 없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다 그곳으로 뛰어갔어요. 저도 마찬가지였고요. 진욱이가 개막전 선발투수라고 알고 있었는데 ‘큰일 났다’ 싶더라고요. 만약 개막전에 못 나가면 내 책임이 크잖아요.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했어요. 보통 공에 급소를 맞으면 엉덩이나 엉치뼈 부위를 툭툭 치면서 통증을 완화시키잖아요. 그때 누군가가 그런 방법을 썼더니 김진욱이 ‘제발 건드리지 마라. 나 좀 가만 놔둬’라며 고통스러워했어요. 그 순한 친구 진욱이 입에서 욕까지 나왔으니까…. 트레이너조차 손도 못 댔어요.”


 김광림은 여전히 안타까운 목소리로 당시 상황을 돌아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렇게 진욱이가 땅바닥에 누워 20분쯤 흘렀나? 겨우 진정이 좀 되더라고요. 운동장으로 승용차가 들어와 있었는데 부축을 받고 일어섰지만 차에 탈 때 거의 게걸음을 하듯 옆으로 걸어서 겨우 탔어요. 일단 일어섰으니 괜찮아지는 줄 알고 옷을 갈아입고 병원으로 가기 위해 먼저 숙소로 갔던 기억이 납니다. 승용차에 저도 탔고요. 숙소에서도 옆으로 한 발씩 게걸음을 해서 이동하고, 병원 계단을 올라갈 때도 옆으로 겨우겨우 발걸음을 옮겼어요. 아래쪽이 퉁퉁 부어있었는데, 근데 의사가 큰 이상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수술할 정도는 아니라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후 상황들에 대해서는 부상 당사자인 김진욱 전 감독이 설명했다.


 “부산에서는 의사가 인턴 분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방법이 없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그날 부산 숙소에서 하루 잤다가 다음날 혼자 서울로 올라왔어요. 강동성심병원에 갔더니 아래쪽 한쪽 신경을 다쳐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신경을 잇는 수술을 했죠. 가장 속상했던 것은 그해에 정말 밸런스가 좋았는데 수술하고 한동안 공을 던질 수 없었던 겁니다. 당시 어떻게 해서든 빨리 운동장에 나가서 그 밸런스로 공을 던져야겠다는 생각만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몸은 못 따라오는데 너무 서두르다 오히려 무리하게 됐고 결국 어깨 인대 손상이 오면서 은퇴할 때까지 어깨 통증을 달고 살게 됐죠.”


 김진욱은 개막 후 40여 일이 지난 5월 11일 광주 해태전에 시즌 첫 등판했다. 하필이면 운명처럼 선발 맞상대가 선동열. 1987년 연장 15회까지 선동열과 완투 맞대결을 펼쳐 1-1 무승부를 기록했던 김진욱은 이날도 선동열과 맞짱을 뜨며 완투대결을 펼쳤다. 그러나 8회말 밀어내기 볼넷을 허용하면서 0-1로 팀이 패해 패전투수가 되고 말았다.


 김진욱은 그해 11승8패2세이브, 평균자책점 3.10을 기록했다.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지만 일본 요코하마 스프링캠프에서 터득한 피칭 밸런스를 완벽하게 살리지는 못했다. 김진욱은 야구인생에서 그해를 가장 아쉬워하고 있다.



●김성근 감독, 결국 개막전 선발 장호연으로 교체

장호연 ⓒ두산베어스


 다시 1988년 개막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4월 2일 사직구장. OB 선수단은 김진욱의 부상 속에 어수선한 분위기로 개막전을 맞이해야 했다. 김성근 감독은 결국 유난히 개막전에 강했던 장호연을 예정보다 하루 앞당겨 1선발로 내세웠다.


 롯데 선발투수는 윤학길. 롯데엔 에이스 최동원이 있었지만 그해 연봉 협상이 좀처럼 진척되지 않아 전년도 13승을 거두면서 ‘차세대 에이스’로 평가받은 윤학길이 개막전 선발로 낙점됐다.


 이로써 1988년 부산 사직구장 개막전은 ‘짱꼴라’ 장호연과 ‘고독한 황태자’ 윤학길의 선발 맞대결로 펼쳐지게 됐다. 장호연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개막전 아침을 맞이해야 했다.


※ [베팬알백_30]에 장호연의 사상 최초 개막전 노히트노런 스토리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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