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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국 Feb 26. 2023

[30] 개막전 무탈삼진 노히트노런…장호연의 진기록

베팬알백 | 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1988년 개막전 아침이 마침내 밝아왔다. 1984년 OB 베어스 지휘봉을 잡은 김성근 감독으로선 5년 계약 기간이 만료되는 해. 1986년과 1987년 플레이오프 무대에서 각각 삼성과 해태에 2승3패로 아쉽게 물러나면서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던 터라 그야말로 배수의 진을 치고 기다린 1988년 개막이었다.


롯데는 1988시즌을 앞두고 부산 출신의 어우홍 감독을 새롭게 영입해 권토중래를 노렸다. 어 감독은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김재박의 개구리번트와 한대화의 극적인 3점홈런으로 한국이 우승할 때 대표팀을 지휘했던 인물. 1984년 MBC 청룡 감독으로 부임했다가 1985년 시즌 도중 해임된 뒤 부산 야구의 재건을 위해 고향팀 롯데 감독을 맡게 됐다.


계약 마지막 해의 김성근 감독과 계약 첫 해의 어우홍 감독의 얄궂은 만남. 게다가 양 팀 모두 개막전 선발 카드에는 사연이 있었다.


OB는 스프링캠프와 시범경기를 통해 가장 좋은 구위를 자랑하던 김진욱이 개막 하루 전에 연습타구에 급소를 맞는 불의의 부상으로 이탈하자 ‘짱꼴라’ 장호연을 선택했고, 롯데는 에이스 최동원(작고)의 연봉협상이 타결되지 않아 ‘포스트 최동원’으로 평가받던 윤학길을 내밀었다.


[베팬알백] 30번째 주제는 KBO리그 개막전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노히트노런과 함께 장호연의 스토리를 이어간다.


장호연 ⓒ두산베어스

 1회말 무사 1·2루 위기부터 시작한 장호연


 OB의 선공으로 1988년 사직구장 개막전이 시작됐다. 1회초 1번타자는 박노준. 삼색 헬멧을 깊숙이 눌러써 눈이 보일락 말락 한 스타일로 타석에 들어서 ‘독일 병정’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박노준이었다.


 박노준은 볼카운트 1B-1S에서 3구째에 기습번트를 댔다. 1루 파울라인 쪽으로 굴러가는 절묘한 번트. 투수 윤학길이 타구를 잡아 던졌으나 1루에서 살았다. 무사 1루.


 그러나 이때 박노준은 투수 송구를 처리하던 롯데 1루수 ‘자갈치’ 김민호와 충돌하면서 한 바퀴 굴렀고, 오른 다리 부상이라는 불청객을 만나면서 개막 첫 타석 만에 부축을 받고 그라운드를 떠나야 했다.


 김성근 감독은 박노준을 대신해 대주자로 김명구를 투입했다. 김명구는 2번타자 김광수의 삼진 때 2루 도루에 성공했다. 3번타자 신경식의 타구는 3루수 글러브를 맞고 유격수 쪽으로 흐르는 내야안타. 1사 1·3루에서 타석에 들어선 4번타자 양세종의 우전 적시타로 선취점을 뽑았다.


 1점을 먼저 업고 시작한 OB 선발투수 장호연. 그런데 그 역시 등판하자마자 난조를 보였다.


 1회말 롯데 선두타자인 재일교포 홍문종에게 스트레이트 볼넷을 허용하고 말았다. 공은 빠르지 않지만 팔색 변화구와 제구, 완급조절이 강점인 장호연이기에 공 4개로 볼넷을 내주는 것은 예상하지 못한 의외의 장면이었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2번타자 박영태마저 몸에 맞는 공으로 내보냈다. 장호연은 1회 시작부터 무사 1·2루의 위기로 출발했다.


 장호연 역시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다. 이날 1회 상황에 대해 그는 “사실 1회에 무너지는 줄 알았다”고 고백했다.

OB베어스 사이드암 투수 김진욱 ⓒ두산베어스


 장호연의 얘기를 더 들어보자.


 “그해 시범경기까지만 해도 김진욱 공이 정말 좋았거든요. 그러니까 김진욱이 먼저 개막전 선발로 낙점받았겠죠. 저는 김진욱이 사고를 당한 그날, 그러니까 개막 하루 전날 피칭을 많이 했어요. 원래 등판 하루 전에는 거의 공을 만지지도 않는데 이틀 후 선발로 나갈 줄 알고 투구를 많이 했죠. 그런데 갑자기 김진욱이 다치면서 제가 개막전 선발로 바뀌니까 마음이 무거웠어요. 다친 김진욱 대신 던지는 거라 부담도 많이 되고 긴장도 많이 해서 잠도 잘 자지 못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남들은 저보고 ‘전혀 긴장을 안 하는 투수 같다’고 하지만 사실 전 매 경기 긴장했어요. 잠을 설쳐서 그런지 개막 당일 야구장에 도착했을 때도 컨디션이 좋지 않았어요. 경기 시작하자마자 스트레이트 볼넷부터 내줬죠. 공이 살짝 벗어나는 것도 아니고 제 기억으론 땅바닥에 던지고 하늘로 던지고 그랬어요. 그리고 2번타자까지 내보냈으니 거기서 한 방 맞았다면 무너졌을지도 모릅니다.”


 난감해진 상황. 타석에는 3번타자 한영준이 들어섰다. 장호연은 머릿속으로 병살타 유도부터 그렸다. 볼카운트 1B-2S에서 몸쪽으로 살짝 휘어들어가는 공을 던졌다.


 투수 앞 땅볼. 상상했던 대로 결과가 나왔다. 1(투수)~6(유격수)~3(1루수)으로 이어지는 더블플레이가 완성됐다. 어쩌면 대기록 달성을 위한 발판은 이때 마련됐는지 모른다.


 그러나 장호연은 당시 더블플레이 상황을 돌이키며 “아찔했던 순간이었다”고 웃음부터 터뜨렸다.


 “정말 운이 좋았죠. 의도대로 투수 앞 땅볼이 나왔어요. 그런데 하마터면 더 큰일이 벌어질 뻔했지 뭡니까. 2루에 던진다는 것이 그만 원바운드 송구가 됐거든요. 아차 싶었죠. 그때 베이스커버를 들어온 유격수 유지훤 선배님이 기막히게 글러브로 원바운드 송구를 걷어내더니 1루까지 던져서 더블플레이를 만들었습니다. 정말 까다로운 바운드라 유지훤 선배님이 공을 잡지도 못할 줄 알았거든요. 제 손에서 공이 떠날 때 송구 실책으로 실점을 하거나 최소 무사 만루가 될 줄 알았어요. 그 송구가 뒤로 빠졌다면 1회에만 최소 2~3점은 주지 않았겠습니까. 최악의 상황은 대량 실점 후 강판이었겠죠.”


 어쨌든 결과적으로 2사 3루를 만들었다. 그리고 4번타자 김용철을 유격수 땅볼로 처리하면서 1회 대위기를 벗어났다.



● 만만디 피칭, 2회부터 맞혀잡기 신공

장호연 ⓒ두산베어스


 1회말 18개의 공을 던진 장호연은 2회부터 특유의 ‘만만디 피칭’으로 투구수를 줄여나갔다. 공이 빠르지 않으니 롯데 타자들 눈에는 훤히 보였다. 거의 다 초구나 2구부터 의욕적으로 방망이를 붕붕 휘둘렀다. 그러나 공은 얄밉게도 살짝살짝 변했고, 배트 중심을 요리조리 피해나갔다.


 덕분에 투구수도 절약되기 시작했다.


 2회 9개, 3회 6개, 4회 6개…. 2회부터 4회까지 3이닝을 내리 삼자범퇴로 처리했다.


 그러는 사이 OB는 4회초에 귀중한 점수를 뽑았다. 2사 후 7번타자 구천서의 우중간 2루타와 8번타자 유지훤의 좌전 적시타로 2-0으로 달아났다.


 5회말 롯데의 공격. 장호연은 선두타자 김민호를 볼넷으로 출루시켰다. 그러나 유두열(작고)을 좌익수 플라이로 잡고, 정영기를 2루수 앞 땅볼로 유도해 더블플레이를 이끌어내면서 이닝을 마무리했다. 5회까지 투구수는 54개에 불과했다.


 2점차의 살얼음판 리드를 잡고 있던 OB는 7회초 2점을 추가하면서 마침내 승기를 잡았다. 1사 후 대타 김영균의 중전안타와 김광수의 좌익선상 2루타로 1사 2·3루. 윤학길의 투구수는 99개에 이르렀다. 좌타자 신경식이 타석에 들어서자 롯데 벤치는 윤학길의 구위가 떨어진 것으로 판단하고 좌완 안창완을 투입했다.


 여기서 OB는 신경식의 2루수 땅볼로 1점, 양세종의 중전 적시타로 1점을 보태 4-0으로 달아났다. 사실상 승부의 추가 OB 쪽으로 기울었다.


 이제 관심사는 하나였다. 바로 OB 선발투수 장호연이 노히트노런을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롯데 타선은 장호연에게 6회말 삼자범퇴, 7회말 삼자범퇴에 이어 8회말에도 삼자범퇴로 물러났다. 장호연은 8회까지 투구수를 90개로 끝냈다.


 OB 역시 8회초, 9회초 공격을 삼자범퇴로 순식간에 마무리했다.



 운명의 9회말, 역대 3호 노히트노런 순간

<개막전의 사나이 장호연 ⓒ두산베어스>


 롯데는 8회까지 24개의 아웃카운트가 진행되는 동안 안타 하나를 뽑지 못했다. 볼넷 2개와 몸에 맞는 공 1개가 전부였다.


 그야말로 운명의 9회말. 대기록에 이제 아웃카운트 3개만 남겨뒀다.


 롯데는 8번 포수 김용운(작고)부터 시작되는 타순이었다. 어우홍 감독이 움직였다. 롯데 사령탑 데뷔전인데 노히트노런 희생양이 되는 것이 달가울 리 없을 터. 어 감독은 대타로 베테랑 정학수를 투입했다. 키는 작지만 다부진 플레이를 해온 원년 멤버 정학수의 경험을 믿었다.


 정학수는 작심한 듯 초구를 노려 쳤지만 3루수 쪽 강한 땅볼. 그런데 평소 야무진 플레이를 해온 3루수 구천서가 그만 이 공을 잡지 못했다. 대기록을 앞두고 타자들이나 야수들이나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강습 타구여서 안타와 실책의 모호한 경계에 있었다.


 안타를 줄까, 실책을 줄까.


 기록원의 판단 하나에 운명이 갈리는 상황이었다. 모두들 마른침을 삼키며 백스크린 쪽 전광판을 쳐다봤다. 이날 사직구장 기록을 맡은 정만오 KBO 공식 기록위원도 다시 한번 플레이를 곱씹으며 고민을 했다.


 잠시 후. 사직구장 백스크린 전광판 'E' 칸에 숫자가 올라갔다.


 실책(Error)이었다. 강습 타구였지만 3루수가 처리할 수 있다고 본 것이었다.


 무사 1루였지만, 장호연으로선 일단 노히트노런 가능성을 살려두게 됐다. 그러나 대기록을 앞두고 이런 실책이 나온다는 것은 불길한 징조였다.


 롯데는 조성옥(작고) 타석 때 다시 경험 많은 베테랑 김용희를 대타로 투입하며 몸부림을 쳤다. 볼카운트 1B-1S 이후 연속 3개의 파울이 나왔다.


 이어 6구째를 쳤지만 유격수 앞 땅볼. 6~4~3 더블플레이! 이날 장호연의 3번째 병살타 유도였다. 9회말 롯데 공격도 순식간에 2사 주자 없는 상황이 돼버렸다.


 다음타자는 롯데에서 가장 까다로운 1번타자 홍문종. 롯데에겐 26개의 아웃카운트가 올라갔고, 장호연에겐 97개의 투구수가 기록됐다.


 이제 마지막 타자가 될 것인가.


 홍문종은 좌타석에 들어서더니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곤 초구가 날아들자 그대로 방망이를 돌렸다. 일본프로야구에서 뛰었던 경험 많은 재일교포 베테랑 타자는 이럴 때일수록 소극적 태도보다는 적극적 공격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었다. 그러나 초구는 파울.


 장호연 역시 거침이 없었다. 볼카운트 0B-1S에서 다시 공격적 투구로 들어갔다.


 2구째 바깥쪽 코스의 공. 홍문종의 배트가 빠르게 돌았다. 방망이 중심에 제대로 맞은 타구는 총알처럼 좌익수 쪽으로 날아갔다.


 양 팀 선수단과 팬들의 모든 눈은 백구의 궤적을 뒤쫓았다. 7회부터 대수비로 나선 좌익수 송재박이 뒷걸음질을 쳤고, 타구는 낮은 탄도로 쏜살처럼 빠르게 비행했다.


 타구가 좌익수 키를 넘어간다면 대기록이 눈앞에서 무산되는 상황. 이때 송재박이 내민 글러브 속으로 타구가 빨려 들어갔다. 마침내 아웃카운트 27개가 마무리됐다.


 노히터! KBO리그 역사상 3번째 대기록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KBO 역대 페넌트레이스 노히트노런


 ● 노히트노런인 줄도 모르고 달성…유일한 무탈삼진 노히터

장호연 ⓒ두산베어스


 “다른 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마지막 타자를 처리한 장면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홍문종 선배는 재일교포였는데 정말 잘 쳤던 타자 아니었습니까. 그날 마지막 타구도 사실 배트 중심에 잘 맞았어요. 맞는 순간 ‘어이쿠’ 싶었는데, 좌익수가 뒷걸음질을 치면서 잡아내더라고요.”


 대기록을 완성하는 마지막 장면에 대한 장호연의 회상이다.


 그는 9회까지 완투를 하면서 볼넷 2개와 사구 1개만 허용했다. 피안타도 없었고 실점도 없었다. KBO리그 역사상 개막전 최초의 노히트노런이자 지금까지 여전히 유일한 개막전 노히트노런. 그날의 기록은 그렇게 완성됐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장호연은 그날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고도 노히트노런인 줄 몰랐다는 것이었다.


 “그날 경기 도중 누구도 노히트노런에 대해 얘기를 안 했어요. 저는 경기가 끝날 때까지 노히트노런이 진행되고 있는 건지 정말 몰랐죠. 제 공이 시속 130㎞ 갓 넘는 수준이었잖아요. 그래서 전 평소에도 늘 타자가 저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고 긴장을 하면서 던져 왔거든요. 그날은 1회 첫 타자부터 스트레이트 볼넷을 내줬으니 더 긴장을 했습니다. 1이닝, 1이닝만 보고 버텨보자는 생각으로 던졌죠. 경기 후반으로 흘러갈 때도 전광판을 대충 보고 0점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만 알았죠. 막연히 ‘잘 하면 완봉 페이스는 될 것 같다’는 생각은 했던 것 같아요.”


 장호연의 말을 들어보니 일리 있는 얘기였다. 그로선 노히트노런을 상상하지 못했고,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다.


 “당시 국내 프로야구에 노히트노런이 몇 번 나오지 않았던 시절이잖아요. 그래서 정말 그날 노히트노런이라는 것 자체를 상상조차 하지 못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쩌면 그날 노히트노런은 동료들 덕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7회나 8회쯤에, 아니면 9회 마운드에 올라갔을 때 노히트노런에 대해 언급했다면 대기록을 의식해서 더 긴장했겠죠. 그러면 안타를 맞거나 점수를 줬을지 모릅니다. 경기 끝나고 선수들이 마운드로 달려와서 난리를 치더라고요. 그제야 노히트노런이라는 걸 깨닫고 어리둥절했었던 것 같아요.”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날 탈삼진이 무려(?) 0개였다는 점. 역대 KBO 노히트노런 중 탈삼진이 없는 경기는 이것이 유일하다. 베어스 역사상 최초 노히트노런이기도 했고, 지금까지 베어스 국내 투수 중 유일한 노히트노런이기도 하다(베어스 역사에서 2015년 유니에스키 마야, 2016년 마이클 보우덴이 각각 2호와 3호 노히트노런을 달성했는데 모두 외국인투수였다).


 그리고 장호연의 이 노히트노런은 단 99구로 달성됐다. KBO 역대 노히트노런 중 유일한 투구수 100개 미만으로 완성한 사례다. 다시 말해 역대 최소 투구수로 달성한 노히트노런이다.



1988년 4월 2일 OB 장호연, 롯데전 노히트노런 기록지 ⓒ두산베어스


 “1-0으로 지는 것보다 10-9로 이기는 게 낫다”, “공 3개로 삼진을 잡는 것보다 공 1개로 맞혀잡는 게 낫다”는 명언을 남긴 장호연. 1988년의 노히트노런은 그의 평소 지론이 제대로 녹아든 대기록이어서 더욱 눈길을 끈다.


 장호연은 현역 시절 ‘팔색 변화구’를 던지는 투수였다. 직구는 시속 130km를 넘을까 말까한 수준. 그러나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140km짜리 공도 던질 수 있었다. 1960년생으로 환갑을 넘긴 나이지만 지금도 사회인야구를 즐기며 시속 130km 안팎의 공을 던지고 있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역사적 그날, 장호연의 회상과 김경문의 기억

1988년 장호연의 노히트노런을 리드한 OB베어스 포수 김경문 ⓒ두산베어스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그날, ‘변화구 투수’ 장호연은 유난히 직구를 많이 던졌다고 한다. 물론 같은 직구라도 움직임(무브먼트)이 다양한 직구였다.


 “제 야구인생에서 아마도 직구를 가장 많이 던진 경기가 아니었나 싶어요. 평소라면 10개 던지면 거의 9개가 변화구인데, 그날은 제 기억으로 7대3 정도로 직구가 많았어요. 별 거 아닌 직구라도 약간씩 변화를 줬죠. 당시엔 그것을 그냥 다 직구라고 했어요. 요즘으로 치면 싱킹 패스트볼, 컷 패스트볼 등을 던졌다고 보면 됩니다. 꼬리가 우타자 몸쪽으로 살짝 말려 들어가는 테일링 패스트볼도 던졌고요. 배트 중심만 살짝살짝 피해 가는 공으로 범타를 많이 이끌어냈죠.”


 공격적 피칭을 한 데에는 김경문의 적극적 리드 때문이었다. 장호연은 그날의 이야기를 다시 이어갔다.


 “그날 포수는 김경문 선배님이었어요. 조범현 선배님과도 호흡을 많이 맞췄는데 두 분의 성향이 조금 다르죠. 조범현 선배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산된 치밀한 볼배합을 하는 스타일인 반면 김경문 선배님은 공격적인 볼배합을 많이 하셨죠. 노히트노런을 한 그날도 김경문 선배님이 초반부터 던지고 싶은 공을 맘껏 던져 보라고 했습니다. 직구 사인을 많이 내시더라고요. 제가 직구라고 해봤자 시속 130㎞대니까 뻔히 눈에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롯데 타자들이 공격적으로 막 치더라고요. 그런데 김경문 선배님이 보실 땐 그날 제 직구 움직임이 괜찮다고 느끼셨나 봐요. 결국 투구수가 많이 줄어들면서 100개가 안 되는 공으로 완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날 포수로 앉아 장호연의 공을 받아준 노히트노런의 숨은 주역 김경문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김경문 전 감독은 “오래전 일이지만 당연히 생각난다”며 웃었다. 그러면서 그날의 기억과 장호연 투수에 대한 추억을 빛바랜 사진첩에서 끄집어냈다.


 “호연이는 매우 영리한 투수였어요. 볼을 놓는 순간까지 타자의 호흡을 읽는 투수였죠. 흔히 ‘공을 갖고 논다’고 표현하잖아요. 호연이는 투수로서 그런 자질이 아주 뛰어났어요. 손에서 공을 놓는 순간에도 변화를 줘요. 예를 들어 직구 사인이 나면 직구처럼 던지면서도 조금씩 손을 움직여 볼이 살짝살짝 움직이게끔 만드는 그런 재능을 갖고 있었죠. 폼도 만만하고 공도 만만해 보였지만 타자들이 공을 치려고 하면 조금씩 변했어요. 또 타자가 변화구를 생각하고 있을 때 직구를 과감하게 던지죠. 대단한 직구가 아니지만 타자가 변화구에 포커스를 맞추다 타이밍이 늦고…. 우습게 보고 달려들다 당하는 타자가 많았어요. 또 워낙 컨트롤이 좋아 던지고 싶은 코스에 정확히 던졌어요.”


 장호연은 위에 구술한 것처럼 그날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노히트노런을 달성했다. 김 감독은 그날 장호연의 구위를 어떻게 느꼈을까.


 “본인이 그날 컨디션이 안 좋았다고 해요? 글쎄요. 공 자체가 안 좋은데 9회까지 던졌겠습니까. 본인이 컨디션 안 좋았다고 하니 그럴지도 모르지만, 사실 투수들은 컨디션 안 좋을 때 더 집중을 하죠. 아무래도 김진욱이 개막전 투수로 내정됐다가 대신에 자기가 나가다 보니 오기가 생겨서 더 잘 던지지 않았나 그런 생각도 들어요. 아무튼 저도 호연이 볼을 받으면서 포수로서 그런 일(노히트노런)이 있었다는 게 지나고 나니 뿌듯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하.”


 다음은 장호연의 노히트노런 상황을 그린 <조선일보> 1988년 4월 3일 자 기사다.


『OB 두뇌피처 장호연은 2일 부산 사직구장서 열린 롯데와의 경기서 국내 프로야구 사상 세 번째 노히트노런의 대기록을 작성하며 팀에 4-0 완봉승을 안겼다. 이로써 OB는 지난 82년 이래 개막전서만 6승 1무 무패의 값진 전적을 쌓았고, 장 역시 개막전서만 4승째를 낚아 올 시즌 선풍을 예고했다. (중략) 부산 사직구장에는 3만7천여 명의 관중이 스탠드를 꽉 메운 채 홈팀 롯데의 선전을 기대했으나 치욕의 노히트노런으로 완봉패를 당하자 허탈해하기도. 일부 극성스러운 홈팬들은 경기가 끝난 뒤 그라운드에 종이 등을 던지며 “그럴 수 있느냐”며 흥분하는 모습.』


 그 시절 팬들은 야구 경기가 진행되는 도중에도 술병이나 오물을 그라운드에 집어던지기 일쑤였다. 상대팀에게 화풀이도 하지만 자신이 응원하는 팀 선수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플레이를 하거나 패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안방에서 노히트노런을 당했으니 사직구장을 찾은 롯데 팬들이 흥분한 것도 당연했다.


1988년 개막전에서 무탈삼진 노히트노런을 달성한 장호연(가운데). ⓒ두산베어스


 한편, 장호연이 역대 3호 노히트노런의 대기록을 작성한 이날 다른 구장에서는 초창기부터 이어져온 하나의 대기록이 저물어 대조를 보였다. MBC 청룡의 원조 악바리이자 '베트콩'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김인식 플레잉코치가 코치에 더 전념하기 위해 잠실구장에서 열린 빙그레와 개막전에 결장했다. 이로써 원년인 1982년 개막전부터 1987년까지 한 경기도 빠지지 않고 출장하면서 기록한 606연속경기 출장이 중단됐다. 이 기록은 훗날 ‘미스터 OB’ 김형석이 622경기로 새로운 기록을 만들었고, 다시 ‘철인’ 최태원이 1009경기로 늘려 최고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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