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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국 Feb 28. 2023

[33] 김성근 감독 시대가 남긴 '명과 암'

베팬알백 | 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당신 떠나기로 했다며? 신문 보고 알았어.”

“신문을 보지 않더라도 벌써 다 알고 계셨잖습니까. 경(창호) 이사한테 보고받았을 텐데요.”

“…음, 떠나기로 했으면 누구누구 데려갈 텐가?”

“제가 데려가면 안 되는 사람은 누굽니까?”

“아무도 없어. 괜찮아. 데려가고 싶은 사람 있으면 아무나 다 데려가. 아무나 다 데려가도 돼. 그 대신 오늘 선수들 앞에서 당신이 떠난다는 얘기를 하겠나?”

1988년 8월 27일. 서울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그리스에서 채화한 성화가 제주에 도착하던 날이었다. 그날 아침 OB 김성근 감독은 부산 플라자호텔 커피숍에서 박용민 단장과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의 표정에는 침통함과 분노가 교차하고 있었다.


 프로야구 초창기에 야구기자로 왕성한 활동을 한 고(故) 이종남 기자는 프로야구의 특종과 낙종, 그리고 기사 뒤의 진실을 말한 저서 [이중노출]에서 OB 베어스와 김성근 감독의 결별 과정과 비하인드 스토리를 자세히 풀어냈다. 위의 대화는 당시 분위기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베팬알백] 33편의 주제는 1980년대 5년간 OB 베어스를 이끈 김성근 감독과 이별, 그리고 김성근 감독 시대가 남긴 명과 암에 관한 이야기다.


1980년대 OB베어스 김성근 감독(왼쪽)과 박용민 단장(가운데). 오른쪽은 당시 구경백 매니저(현 일구회 사무총장) ⓒ두산베어스



OB 베어스와 김성근 감독의 결별 과정


『김성근 감독이 OB를 떠난다. 프로야구 원년(82년)부터 투수코치로 2년, 감독으로 5년 간 OB에 몸담고 있는 김성근 감독은 26일 “시즌을 마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유종의 미를 거두고 나서 새로운 진로를 찾아보겠다”라고 밝혔다. <중략> 박용민 단장은 “당분간 한국에서는 나오기 힘든 ‘한 팀 10년 감독’을 우리는 만들려고 했으나 구단 방침과 김성근 감독이 부합되지 않아 결별하게 된 것이 서운하다”고 말했다.』
<1988년 8월 27일자 스포츠서울>


 전문에서 김성근 감독과 박용민 단장의 대화에 나온 ‘신문 기사’는 바로 이 기사였다.


 1988년 후기리그가 막판으로 치닫고 있었다. 8월말의 태양만큼이나 순위 싸움도 뜨거워지고 있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스포츠서울은 OB 베어스와 김성근 감독의 결별 사실을 단독 보도했다. 남아 있는 후기리그 경기는 11경기. 김성근 감독은 최선을 다해 잔여 시즌을 지휘하기로 했으나, 기사를 통해 이미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선수단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아무튼 그날 아침, 부산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신문 기사 하나를 두고 OB 박용민 단장과 김성근 감독은 플라자호텔에서 무겁게 얘기를 주고받았다. 5년 전 손을 함께 붙잡고 제너럴 매니저(General Manager·단장)와 필드 매니저(Field Manager·감독)로서 천하를 도모하고자 했던 둘 사이는 이미 소나무 껍질처럼 곳곳에 균열이 가 있었던 상황이었다.


 1986년 플레이오프에서 2승1패로 앞서다 2승3패로 탈락한 뒤부터 구단과 김 감독 사이에 거리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1987년 플레이오프에서도 2승1패로 리드하다 2연패하면서 한국시리즈 티켓을 놓치자 구단도 ‘김성근식 야구’에 물음표를 달았다. 내부적으로 ‘포스트 김성근’으로 점찍은 이광환을 1988년 2군 감독 자리에 앉히면서 후일을 준비했다.


 OB는 1988년 전기리그 3위에 그쳐 포스트시즌 진출 티켓이 주어지는 2위 안에 들지 못했다. 그리고 후기리그에서도 반타작 승부를 하며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8월 26일 사직 롯데전에서 최동원을 두들기며 난타전으로 몰고 갔지만 6-7로 패하면서 후기리그 43경기에서 21승2무20패를 기록했다. 7개 구단 중 5위. 2위 해태와 3게임차로 뒤져 있어 완전히 레이스를 포기할 단계는 아니었다. 그러나 팀 분위기는 급격히 가라앉고 있었다.


OB 베어스 역대 감독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초대 김영덕 감독, 김성근 감독, 이광환 감독, 윤동균 감독.

OB 이광환 감독 선임 다음날 김성근은 태평양 감독으로


 아침부터 내리던 빗줄기는 가늘어졌지만 오후에 접어들어서도 부산 하늘엔 먹구름이 걷히지 않았다. 비도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사직 롯데전이 우천취소됐다.


 부산 플라자호텔 2층 연회실로 선수단을 소집했다. 이미 신문을 통해 김성근 감독이 OB를 떠난다는 소식을 접한 선수단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그동안 열심히 해줘서 고맙다. 유종의 미를 거두자.”


 후기리그 종료까지 11경기가 남은 시점. 김성근 감독은 박 단장과 약속대로 선수들 앞에서 스스로 사임 의사를 밝혔다.


 1984시즌을 앞두고 김영덕 감독이 삼성 사령탑으로 떠날 때, OB 구단은 제2대 감독으로 김성근 코치를 선임하면서 파격적인 5년 계약을 했다. OB 구단은 실제로 김 감독을 KBO 최초로 ‘한 팀 10년 감독’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김성근 감독 역시 계약 만료 해이긴 하지만 1988년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평생 OB맨’이 되겠다’고 다짐을 하며 재계약을 꿈꾸기도 했다.


 그러나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 OB와 김 감독은 5년 만에 이별을 선택했다. 양 측은 시즌 종료까지는 최선을 다해 팀을 이끌어가기로 얘기했으나 이미 구단 분위기는 와해된 상태였다.


 9월 8일 시즌 최종전. 선발투수 김진욱의 완봉 역투에 힘입어 잠실 라이벌 MBC 청룡에 1-0으로 승리했다. 하지만 감독 사임 발표 후 11경기에서 2승9패. 내리막길을 탄 OB는 전·후기리그로 나눠 치러진 마지막 해의 마지막 후기리그에서 23승2무29패를 기록하며 MBC와 공동 5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서울 두 팀 아래에는 인천을 연고로 하는 7위 태평양 돌핀스(16승38패) 한 팀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OB 구단은 예정된 수순으로 시즌 종료 다음날인 9월 9일 이광환 2군 감독의 1군 감독 승격을 공식 발표했다. 구단의 당초 계획은 이광환을 2군 감독으로 최소 3년간 기용해 감독 수업을 받게 한 뒤 1군 감독으로 승격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감독 교체 시기가 앞당겨졌다.


 이로써 코치로 2년, 감독으로 5년 등 총 7년의 세월을 함께한 원년 멤버 ‘김성근의 OB 시대’는 마감됐다.


 그리고 다음날인 9월 10일, 꼴찌 태평양 돌핀스는 김성근 감독의 영입을 공식 발표했다. 잘 짜인 시나리오처럼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실제로 김 감독의 태평양행은 이미 그전에 합의가 돼 있었다. 박용민 단장과 8월 27일 부산 플라자호텔에서 독대하기 일주일 전쯤인 8월 20일께 김 감독은 태평양 감독직을 수락한 상태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로부터 보름 전에 박 단장은 이미 김 감독의 태평양행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태평양 신동곤 사장이 박 단장과 골프를 치면서 “김성근을 데려가도 되겠느냐”고 물었기 때문이었다.


일본 프로야구 레전드 장훈(왼쪽에서 2번째)과 대화 중인 김성근 감독 ⓒ두산베어스


●김성근 감독 시대의 발자취 그리고 명과 암


 재계약이 불발되고, 양 측이 보기 좋은 모양새로 헤어진 것은 아니지만 베어스와 김성근 감독은 다양한 역사를 만들었다.


 김성근 감독은 1984년부터 1988년까지 5년간 OB 베어스 사령탑을 지냈다. 거의 모든 팀이 성적이 나지 않으면 1년이 멀다 하고 감독을 교체하며 조급증에 휩싸여 있던 시대에 나름대로 장수를 했다. 잠실 ‘한 지붕 두 가족’ MBC 청룡은 같은 기간 4명의 감독과 3차례 감독 대행이 들어설 정도로 어지러운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대조적이었다.


 1983년부터 지휘봉을 잡은 해태 김응용 감독과 함께 OB는 장기간 감독과 동행하는 모델을 만들었다. OB는 이후 김인식 감독(1995년~2003년), 김경문 감독(2004년~2011년), 김태형 감독(2015년~현재) 등으로 장수 감독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김성근 감독 재임 기간 성적이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5년간 534경기에서 274승 10무 250패, 승률 0.552를 기록했다(1982년 감독 대행 7경기 제외).


 시즌별 전체 성적을 뽑으면 1985년(51승57패2무·승률 0.472)만 유일하게 5할 미만의 승률을 기록했다. 다시 말해 4시즌은 모두 5할 이상의 성적을 거뒀다는 의미다. 심지어 이별한 마지막 해에도 시즌 합계 승률은 0.509(54승52패2무)였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의 지도력과 지도 방식에 대해서는 예나 지금이나 논란이 뜨겁다. 프로야구 시대에서 처음 감독 자리에 올라 OB 사령탑으로 재임한 5년 사이에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OB는 원년 우승 팀이었지만 박철순의 원맨쇼에 힘입은 바가 컸다. 전력이 아주 강한 편은 아니었다. 특히 공격력이 약했다. 팀타율이나 팀홈런, 팀득점에서 늘 중하위권이었다. 그럼에도 1986년과 1987년 2차례 플레이오프 무대에 올랐고, 대부분 포스트시즌 진출을 위한 경쟁 대열에 들어갔다.


 이런 점에서 김성근 감독의 리더십과 지도력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에이스 박철순이 첫해 무리한 탓에 빠지면서 마운드의 중심이 무너졌지만, 그래도 재임 기간 마운드 전력을 늘 상위권에 포진시켰다. 팀평균자책점에서 1984년 1위(2.53), 1986년 1위(2.61), 1987년 2위(3.26)에 올랐다.


2020년 미야자키에서 만난 김성근 전 감독(소프트뱅크 고문)과 김태형 당시 감독 ⓒ두산베어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찮다. 1984년부터 윤석환 김진욱 최일언 트리오를 축으로 팀 마운드를 재건했지만 이들은 모두 혹사의 후유증으로 선수 생명을 오래 지속하지 못했다. 매년 투수력 지표에서 2~3명의 투수가 상위권에 포진했지만 믿는 투수 2~3명을 축으로 잡고 돌려쓴 결과였다, 눈 밖에 나거나 믿지 못하는 투수는 잘 기용하지 않았다. 시즌 평균자책점은 좋았지만 결국 막판에 마운드의 힘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주축 투수들이 포스트시즌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OB 감독 시절에도 투수는 물론 타자까지 자신이 모든 것을 지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만큼 젊은 시절부터 야구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다. 공부하고 연구하는 지도자였다. 각 분야 코치들에게 자율권을 주기보다는 감독이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챙겼다.


 그 시절에도 강훈련 기조였고, 훈련지상주의였다. 따뜻한 해외로 마무리훈련이나 스프링트레이닝을 가기 힘들었던 1980년대에, 투수들이 한겨울에 잠실구장 인근 탄천 뚝방에서 하루 수백 개씩 투구를 하기도 했다.


 당시에도 투구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뜯어고치는 훈련 방식을 유지했는데 여기서 자신만의 투구법을 터득한 투수도 있었고 성공한 투수도 있었다. 반대급부로 탈이 나거나 오히려 구속이 감소되는 투수도 있었다. 아마추어 시절 전도유망했던 투수로 평가받은 정선두나 박노준 등이 프로에서 투수로서 성공하지 못한 것이 대표적이다.


 충암고 시절부터 스승과 제자로 인연을 맺은 장호연은 그런 가운데 OB 베어스에서 장수한 투수에 속한다.


 장호연은 “김성근 감독님은 워낙 성격과 철학이 강하신 분이었다. 야구에 대한 열정도 대단했다. 한마디로 ‘나를 따르라’는 식이었다. 그런 훈련 방식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몰랐던 부분에서 힌트를 얻기도 한다. 그러나 코치나 선수가 속으로 ‘이게 아닌데’ 싶어도 반론을 펼칠 수 없는 분위기였다”면서 “감독님이 시키면 난 앞에서는 ‘예’라고 해놓고 돌아서서는 내 스타일대로 훈련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김성근 감독님과 사제지간 인연을 맺어 오랜 시간을 함께 했지만 말을 잘 안 듣는 선수였다. 그래서 남들보다 조금 더 투수 생활을 오래 했는지 모른다”며 웃었다.


 타협이 없었고, 강한 리더십을 추구하면서 선수단은 물론 프런트 직원들도 모두 지휘하려고 했다. 감독 초기에는 팀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듯했다. 그러나 이면에서는 갈등과 마찰이 잦았다. 선수단 내에 ‘김성근 사단’이 생기고, ‘친(親) 김성근파’와 ‘반(反) 김성근파’로 파벌이 나눠지기도 했다.


 김성근 감독 시절 OB 베어스는 우승 경쟁을 할 수 있는 팀이었지만 한 번도 우승을 하지 못했다. 특히 한국시리즈에 한 번도 오르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행운과 불운의 경계선에서 행운보다는 불운이 많이 작용했다. 제도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전기리그와 후기리그 우승팀이 한국시리즈에서 격돌하는 제도로 운영된 1984년에는 한 시즌 통틀어 놓고 보면 6개 구단 중 가장 높은 승률 0.586을 기록했지만, 전기와 후기 우승을 모두 놓치면서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1986년과 1987년에는 5전3선승제의 플레이오프에서 2승1패로 앞서고도 4~5차전에서 2연패를 당하며 한국시리즈 티켓을 따내지 못했다.


방송 인터뷰를 하고 있는 김성근 감독 ⓒ두산베어스


 1984년 돌풍으로 시작된 김성근 감독 시대는 1988년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코치로 2년, 감독으로 5년. 등번호 38번의 김성근은 1980년대를 관통하는 OB 베어스의 역사였고 부인할 수 없는 키워드였다. 7년간 잊을 수 희로애락과 추억을 남겼다.


 그리고 김성근 감독은 훗날 태평양~삼성~쌍방울~LG~SK~한화 사령탑에 올라 적장으로서 베어스와 대척점에 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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