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0월 11일 전주구장. 플레이오프 4차전에 앞서 OB 베어스의 김성근 감독은 선수들을 모아 놓고 강한 주문을 했다.
3차전까지 OB가 2승1패로 앞서 있던 상황. 5전3선승제의 플레이오프이기에 1승만 추가하면 한국시리즈에 오르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다. 그러나 김 감독은 오히려 1승2패로 뒤져 벼랑 끝에 몰린 장수마냥 선수단에 정신무장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1년 전의 악몽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86년 플레이오프에서도 흐름은 비슷했다. 4차전까지 삼성 라이온즈에 2승1패로 앞서 나갔다. 그런데 2경기 중 1승만 챙겨도 된다는 생각에 선수단 분위기가 어딘가 모르게 느슨하게 느껴졌고, 결국 4차전을 내주게 됐다. 흐름을 넘겨주면서 5차전마저 패해 OB는 원년 우승 후 4년 만에 찾아온 한국시리즈행 티켓을 눈앞에서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은 1987년 4차전에 앞서 선수단 미팅을 통해 강한 어조로 독려한 것을 두고 “아직도 후회되는 말”이라고 되뇌곤 한다. 큰 경기를 앞두고 쓸데없는 말을 하는 바람에 선수들의 몸을 굳게 만들어 역전패를 당했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김성근 감독은 결국 이듬해인 1988시즌 후 OB 베어스 5년 감독 생활을 끝내고 유니폼을 벗게 된다.
[베팬알백] 32번째 주제는 OB 베어스와 김성근 감독이 이별을 준비하는 전조가 된 장면들이다. 특히 1987년 한국시리즈 일보 직전에서 패퇴한 플레이오프는 OB 사령탑을 지낸 김성근 감독은 물론 1980년대 후반 베어스 역사에서, 그리고 그 시절을 기억하는 베어스의 올드팬들에게 잊지 못할 가장 아쉬웠던 순간들이기도 하다. 1988년에는 곳곳에서 균열이 감지됐다.
OB베어스 김성근 감독과 일본프로야구의 전설 재일교포 장훈 ⓒ두산베어스
●아! 유지훤…1987년 PO 4차전 9회말 2사 ‘통한의 장면’
OB는 잠실 안방에서 해태와 1승1패를 나눠가졌다. 1차전에서 OB는 ‘해태 킬러’ 최일언을 내세우고도 실책을 무려 6개(역대 포스트시즌 팀 최다 실책 기록)나 범하면서 3-11로 크게 패했다. 2차전에서는 돌아온 ‘불사조’ 박철순의 5.1이닝 2실점 호투와 타선의 폭발로 10-3으로 승리하며 전날의 패배를 설욕했다. 그리고 3차전에서는 계형철과 최일언의 호투 속에 4-1로 승리하며 2승1패로 앞서게 됐다. 더군다나 1-1 동점이던 8회초 1사 1루에서 구원등판한 해태 에이스 선동열을 무너뜨리고, 상대 실책마저 터져 나온 상황을 등에 업고 역전승을 거둔 터라 OB 선수단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1987년 10월 11일 전주구장. 4차전은 일요일 낮경기로 치러졌다.
‘이제 1승만 하면 된다.’
흐름이 OB로 넘어왔다. 누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쉴 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대로 김성근 감독은 4차전에 앞서 선수단에게 강한 주문을 걸었다.
“4차전을 결승전이라고 생각하고 게임에 나서라. 오늘 남은 투수들을 모두 투입하겠다.”
1년 전의 아픔을 기억하는 OB 선수들도 긴장한 눈빛으로 정신무장을 새롭게 하기 시작했다.
해태 선발투수는 1차전 패배를 안겨준 프로 2년생 투수 김대현(작고).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어깨에 이상이 있어 등판을 미뤄온 해태 선동열은 3차전에 구원등판했지만 다시 어깨에 부담을 느껴 4차전 출격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OB는 2회초 유지훤의 2루타, 3회초 김광수의 2루타로 1점씩을 뽑아 6회초까지 2-0으로 리드했다. 그러나 6회말 해태 김종모에게 솔로홈런, 8회말 김봉연에게 우월 적시 2루타를 맞고 2-2 동점을 허용했다.
OB는 9회초 1사 만루서 구천서의 천금 같은 우전 적시타로 3-2로 달아났다. 추가점을 뽑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9회말만 막으면 한국시리즈에 오를 수 있었다.
운명의 9회말 2사 3루. OB 세 번째 투수 최일언을 상대한 김성한의 타구는 유격수 쪽 땅볼. OB 덕아웃의 선수들이 승리를 예감하며 모두 뛰어나가려는 순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평소 견실한 수비를 자랑하던 유격수 유지훤이 바운드 타구에 대시를 하지 않고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면서 잡더니 1루로 던졌다.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눈앞에 둔 김성한은 이것이 1987년의 마지막 장면이 될 수도 있었기에 이를 악물고 1루까지 전력질주했다.
그야말로 간발의 차이. 그러나 김성한의 발이 베이스를 밟는 시점이, 1루수가 포구하는 시점보다 조금 빨랐다. 1루심의 두 손이 힘차게 옆으로 열렸다. 세이프. 3-3 동점이 돼버렸다.
KBO 공식기록원은 내야안타로 판정했다. 대시를 하지 않고 바운드를 맞추기 위해 뒤로 물러나면서 잡았다고 해서 실책을 줄 수는 없는 타구였다.
혹자는 “타구가 내야에서 바운드되며 드라이브가 걸렸기 때문에 대시할 타이밍을 잡기가 힘들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는 OB로서나 유지훤으로서나 영원히 잊지 못할 통한의 장면이 됐다. OB 올드팬들도 이 장면을 지금도 기억 속에서 지우지 못한다. 특히 유지훤은 4차전까지 13타수 8안타로 불방망이를 휘두르며 타자로서 맹활약하고 있었기에 이 수비 하나는 더더욱 아쉬웠다.
OB 베어스와 해태 타이거즈 경기 장면. 2루수 김광수(왼쪽)와 유격수 유지훤(가운데). ⓒ두산베어스
이어진 연장 10회말. 1사 1·3루 절체절명 위기를 만났다. 내야땅볼이든 외야플라이든 1점을 내주면 패하는 상황. OB는 만루작전을 썼다.
그러나 여기서 또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펼쳐졌다. 에이스 최일언이 통한의 폭투를 범하며 허무하게 끝내기 결승점을 헌납하고 만 것. 김성근 감독은 4차전에 앞서 선수단에 예고한 대로 김진욱, 윤석환, 최일언을 투입하며 한국시리즈 진출을 확정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쳤지만 홀로 완투한 해태 김대현에게 밀려 3-4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다.
최일언은 1986년 19승, 1987년 14승을 올린 에이스였다. 1차전에 등판해 동료 야수들의 무더기 실책으로 패전투수가 된 그는 3차전에서는 6회부터 구원등판해 승리를 마무리했다. 4차전에서도 6회부터 구원등판해 혼신의 힘을 다해 공을 던지고 있었다. 그러나 폭투로 경기를 끝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포스트시즌을 통틀어 끝내기 폭투는 역대 2차례 발생했는데, 최일언은 포스트시즌 역사상 최초의 끝내기 폭투를 기록한 비운의 주인공이 됐다(역대 2호는 2000년 두산 진필중이 잠실구장에서 열린 LG와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기록한 9회말 끝내기 폭투).
최일언 ⓒ두산베어스
OB는 4차전에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필승 카드를 쏟아부으며 승부수를 던졌지만 역전패를 당해 2승2패가 되고 말았다.
흐름을 넘겨준 OB는 결국 5차전에서도 0-4로 완패했다. 해태 루키 백인호에게 3회 적시타를 맞고 5회에도 2점홈런을 허용하면서 무기력하게 물러나고 말았다. 1986년 플레이오프(삼성에 2승1패 후 2승3패로 탈락)와 똑같이 1승만 보태면 되는 상황에서 4~5차전을 내리 내주면서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반면 1승2패로 벼랑 끝에 몰렸던 해태 김응용 감독은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또 삼성을 꺾고 2년 연속이자 1983년 첫 우승을 포함해 3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플레이오프 4차전 9회말 2사 후에 김성한의 타구를 유지훤이 대시해 처리했더라면 한국야구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1980년대 후반 해태 왕조도 만들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해태의 탈락 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과 OB가 격돌했다면 삼성의 첫 우승이 일찌감치 실현됐을 수도 있고, 아니면 김성근 감독의 첫 우승이 더 일찍 찾아왔을지 모른다. 그렇게 됐다면 OB 베어스의 김성근 감독 시대는 더 오래 지속됐을지도 모른다. 공 하나에 너무나 많은 역사가 바뀌었다.
“4차전을 앞두고 선수들에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몰라. 지금도 후회돼. 내가 말하지 않아도 선수들이라고 왜 모르겠어. 감독이랍시고 쓸데없이 나서다 일을 그르쳤어. 그때는 젊어서 그랬겠지. 아무튼 큰 교훈을 얻었어.”
이 말은 김성근 감독이 2007년 SK 감독으로 처음 우승했을 때, 기자가 스포츠서울 SK 담당으로서 <잡초 승부사 김성근을 말한다>를 30편으로 연재할 때 썼던 이야기다. 비싼 수업료를 치른 김 감독은 그 이후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큰 경기를 앞두고는 선수단에 정신무장을 강조하지 않았다.
이광환 ⓒ두산베어스
●세인트루이스 연수 마친 이광환, 2군 감독으로 임명…갈등의 씨앗
1987년 12월로 접어들었다. OB 구단은 1986년 일본프로야구 세이부 라이언스, 1987년 메이저리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1년씩 선진야구를 배워온 이광환을 2군 감독에 임명했다. 구단 차원에서 직접 일본과 미국 구단을 주선해 지도자 연수를 보낸 것도 국내에선 처음 시도한 일이었다. 2년간 연수를 끝내고 돌아온 이광환을 2군 감독에 임명한 것은 OB 구단으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고 예정된 수순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김성근 감독과 결별의 씨앗을 잉태하는 순간이었다. 그 이전부터 매사에 깐깐한 김 감독과 구단 사이엔 감정의 골이 파여 가고 있었다. 게다가 김성근 감독은 구단이 자신과 한마디 상의도 하지 않은 채 이광환을 2군 감독으로 계약하자 서운함과 소외감을 크게 느꼈다.
김성근 감독과 이광환 2군 감독은 1982년 OB 창단 당시 투수코치와 타격코치로 함께했고, 원년 우승을 일군 멤버였다. 그러나 그 시절부터 야구관 자체가 자석의 양극과 음극처럼 극도로 달랐다.
1984년을 앞두고 김영덕 감독이 삼성 사령탑이 되자 연장자인 김성근 코치가 먼저 감독에 오르고 이광환이 코치로서 보좌를 했지만 둘의 동거는 오래가기 힘들었다. 둘 사이가 나빴다기보다는 야구관 자체가 달랐기에 물과 기름 사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광환이 1985시즌을 끝으로 일본과 미국으로 연수를 떠난 것도 김성근 감독과 야구관이 맞지 않았던 탓이 컸다. 훈련 방식부터 선수단 통솔 방식까지 너무나도 극명하게 대립되는 캐릭터였다.
1988년엔 국가적으로 외화 사정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KBO 각 구단들의 해외 전지훈련도 금지된 상태였다. OB 1군은 제주도에 스프링캠프를 차렸고, 2군은 창원에서 전지훈련을 진행했다.
1988년 스프링캠프가 한창 진행되던 어느 날. 김성근 감독은 2군 캠프에 정삼용 등 3명을 제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 감독은 “창원에서 대학팀들과 연습경기 스케줄을 미리 잡아놓았는데 이들 3명이 빠지면 선수부족으로 게임을 치를 수 없다”고 파견을 거부했다. 이때부터 김 감독과 이 감독 사이에 노골적인 대립이 시작됐다.
구단이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김성근 감독을 찾아갔다. “당장 2군도 연습경기가 중요하지 않느냐”고 설득했지만 오히려 화를 더 키웠다. 김 감독은 “구단이 이 감독 편만 드느냐. 1군에서 필요한 선수를 내 마음대로 쓰지도 못하는데 내가 무슨 감독이냐. 나를 자르든지 마음대로 하라”며 훈련장에 나가지도 않고 호텔에만 머무는 일까지 벌어졌다. 무언의 시위였다.
이는 고(故) 이종남 기자가 쓴 [이중노출]에 나오는 내용이다. 프로야구 초창기에 야구기자로 왕성한 기자활동을 한 이종남 기자는 프로야구의 특종과 낙종, 그리고 기사 뒤의 진실을 말한 저서 [이중노출]에서 OB 베어스와 김성근 감독의 결별 과정과 비하인드 스토리를 자세히 풀어냈다.
예전부터 ‘훈련 지상주의자’였던 김 감독은 제주에서 선수단을 연일 혹독한 훈련으로 담금질하고 있었다. 2군 선수도 필요하면, 언제든지 눈앞에 불러 직접 지도를 하고 체크를 해야만 하는 스타일이었다.
세인트루이스에서 메이저리그식 훈련법을 배워온 이 감독은 반대였다. 창원에서 ‘훈련을 위한 훈련’보다는 ‘경기를 통한 훈련’에 주안점을 두고 새로운 육성법으로 캠프 훈련을 진행하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전례가 없었던 파격적인 방식이었다.
OB는 KBO리그에서 2군 선수단을 가장 먼저 운영할 정도로 앞서나간 구단이었지만, 1980년대라면 요즘과 달리 2군 선수 숫자 자체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경기를 하기에도 빠듯했다. 이렇다 보니 단순히 몇 명을 보내 주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3명을 보내주면 경기를 통한 선수 육성의 기조마저 완전히 바꿔야 하는 상황이었다.
둘 중 하나는 부러지거나 양보를 해야만 했다. 어쨌든 더 중요한 것은 1군. 구단은 성난 1군 감독부터 달래야만 했다. 김 감독은 그러자 OB 구단의 박용민 단장을 향해 3가지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2군 감독은 1군 감독의 지시를 절대로 따를 것 ▲2군 선수 이동에 관한 모든 연락은 2군 감독과 신용균 수석코치가 협의할 것 ▲1군이 이천구장을 사용할 때는 2군은 언제라도 장소를 비워줄 것.
구단이 “모두 들어주겠다”라고 약속한 다음에야 김성근 감독은 훈련장으로 발걸음을 옮겨 전지훈련을 이어갔다.
장호연 ⓒ두산베어스
●1988년 개막전 노히트노런의 기쁨도 잠시
서울올림픽의 해인 1988년. 프로야구도 다사다난(多事多難)했고, OB 베어스도 다사다난했다. 하루하루 불운과 행운이 핑퐁처럼 교차했다.
1988시즌을 앞두고 가장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소식은 ‘불사조’ 박철순의 부활 가능성이었다. 오랜 부상을 딛고 돌아와 1987년말부터 구위가 살아났고, 스프링캠프에서 1988시즌 기대하게 할 만큼 좋은 컨디션을 자랑했다.
인간승리의 드라마에 매스컴은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기 시작했고, 팬들은 불사조의 부활 스토리에 환호했다.
광고 모델 섭외가 밀려왔다. 그러나 1988시즌 개막을 보름여 앞둔 3월 15일 새벽, 박철순은 속옷 CF 촬영을 하던 도중에 공중으로 점프하는 장면을 찍다 왼쪽 발목의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비운을 맛봤다. 치명적인 허리 부상을 딛고 일어섰지만, 아킬레스건 파열은 또 다른 문제였다. 투구 시 온몸의 힘을 받아주며 버텨줘야 할 왼발 아킬레스건이 끊어졌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절망적이었다. 구단이나 김성근 감독 역시 전력 구상에 차질을 빚어 낭패감이 밀려왔다.
개막전을 앞두고도 어수선했다. 시범경기까지 구위가 절정이었던 김진욱을 당초 롯데와 시즌 개막전 선발투수로 내정했지만, 하루 전날 경남상고에서 훈련을 하다 김광림의 프리배팅 타구에 급소를 맞아 실려 나가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베팬알백 29편 참조>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김진욱 대신 개막전 선발투수로 나선 장호연이 노히트노런을 달성하면서 분위기를 바꿨다.
호사다마(好事多魔), 전화위복(轉禍爲福)은 이후에도 반복됐다. 개막전 다음날 선발로 내정된 계형철이 갑자기 왼쪽 발목이 삐었다는 허무한 소식이 들려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OB는 9회 대역전극으로 승리했다.
개막 2연승의 산뜻한 출발. 여기에 개막 두 번째 경기에서 7회에 구원등판해 승리투수가 된 윤석환의 부활이 반가웠다. 1984년 신인왕 출신의 윤석환은 이후 부상과 부진에 시달리다 1988년 두 자릿수 승리와 세이브(13승3패 14세이브, 평균자책점 2.08)로 OB 마운드의 버팀목이 됐다.
그런데 개막전 노히트노런의 주인공 장호연이 이후 지독한 치통에 시달렸다. 마운드의 뼈대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김우열 ⓒ두산베어스
●김우열의 OB 복귀, 숙소문제,세탁기 사건…갈등의 연속
경기 외적으로 김성근 감독과 구단의 불편한 기류가 개막 이후에도 계속 감돌았다. 1987년부터 불거지기 시작한 마찰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화됐다. 평소라면 사소한 문제로 넘어갈 일도 오해로 증폭됐다.
4월 어느 날, 우천으로 청주 빙그레전이 취소되자 김성근 감독은 선수단이 서울로 올라갔다가 이튿날 내려와 경기를 해야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구단은 대전의 유성에 방을 예약해 뒀으니 거기서 자고 청주로 와야 한다고 했다. 김 감독은 “그럴 바에야 차라리 청주 여관방에 자겠다”고 했다.
훈련장을 두고도 마찬가지였다. 구단은 이천구장에서 훈련을 하라고 했지만 김성근 감독은 “버스를 타고 서울과 이천을 오가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선수들 허리에도 무리가 가니 시내에 훈련장을 마련해 달라”라고 요구하는 등 크고 작은 충돌이 잦았다.
1988년 5월 24일 김우열이 타격코치로 돌아왔다. 김우열이라면 OB 원년 멤버로 초창기 팬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이름. 멋진 구레나룻을 휘날리며 시원한 홈런을 터뜨려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스타플레이어였다.
1986년 신생팀 빙그레 이글스가 1군 리그에 뛰어들자 충북 영동 출신의 김우열은 “고향팀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싶다”며 트레이드를 자청해 떠났다. 그러나 은퇴 말년에 시력 문제와 무릎 부상으로 1987년엔 한 게임도 뛰지 못한 채 은퇴를 한 터였다.
OB 구단은 기존의 윤동균 플레잉코치에게 좌타자 지도를, 김우열 타격코치에게 우타자 지도를 맡기는 ‘복수 타격코치 제도’를 구상하고 김우열의 친정 복귀를 추진했다.
그러나 이때도 김성근 감독의 심기는 불편했다. 이천구장에서 김우열을 만난 김성근 감독은 “코치로 오기로 했으면 나한테 전화라도 알렸어야 할 것 아니냐”며 김우열 타격코치를 쏘아붙였다.
김 감독이 화가 난 것은 어쩌면 김우열보다는 자신에게 상의도 없이 타격코치를 영입한 구단을 향한 서운함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흘러가는 정황들이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2군에는 언제든 자신을 밀어내고 들어올 수 있는 이광환이 감독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구단이 김우열을 영입한 것은 ‘OB맨’으로 팀을 재편해 ‘포스트 김성근’ 시대를 대비하려는 차원으로 느낄 수 있었다.
김우열 ⓒ두산베어스
여기에 그 유명한 ‘세탁기 사건’도 빼놓을 수 없다. 구단은 이광환 2군 감독의 요청에 따라 이천구장에 먼저 세탁기를 들여놨다. 당시로선 파격이었다. 선수들이 유니폼을 직접 집으로 가지고 가서 빨래를 하던 시절이었으니 그렇게 비쳤다. 메이저리그를 경험하고 온 이광환 감독은 빨래를 선수가 하는 것보다는 세탁기만 들여놓으면 숙소 관리인에게 빨래를 맡길 수 있어 구단에 요청한 것이었다. 1군에도 없는 세탁기였다. 선수들은 구단이 이광환 감독에게 힘을 실어준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소식을 들은 김성근 감독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구단에 1군에도 세탁기를 들여놔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구단은 서울에서 출퇴근하는 선수들과 이천 2군 선수들의 사정은 다르다고 봤다. 그 과정에서 갈등이 일었다.
1984년부터 지휘봉을 잡아 1988시즌을 끝으로 5년 계약 기간이 만료되는 김성근 감독. 재계약을 위해서는 성적으로 보여주는 길밖에 없었다.
5월까지 OB는 23승18패를 기록했다. 나름대로 선전했다. 그러나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개막 이후 부진하던 해태 타이거즈가 5월 중순까지 12연승을 내달리며 전기리그 1위로 치고 나갔다. 빙그레 이글스는 1군 진입 3년 만에 환골탈태한 모습으로 5월에 승승장구하며 2위에 포진했다.
OB는 전기리그에서 31승23패로 꽤 괜찮은 성적을 냈지만, 결국 호랑이와 독수리 싸움에 등이 터지며 3위로 내려앉아 포스트시즌 진출 티켓을 확보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