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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국 Mar 02. 2023

[37]최일언 주고 김상호 받고...잠실 최초 트레이드

베팬알백 | 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아니, 이 시간에 무슨 전화야?’


김상호는 잠결에 수화기를 들었다.


“상호야, 너 트레이드됐던데….”


수화기 너머로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야구기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트레이드요?”


“트레이드 얘기 못 들었어? 최일언하고 맞트레이드로 OB로 가게 됐는데…. 이미 신문에도 기사가 났잖아.”


김상호는 잠이 확 깼다. 구단에서는 아직 트레이드에 대해 어떤 얘기도 없었던 상황이었다.


“믿기지 않았죠. 전화를 끊고 집밖으로 나갔어요. 신문 가판대를 보니 각종 스포츠신문 1면에 대문짝만 하게 제 사진과 OB 최일언 선배 사진이 걸려 있더라고요. 트레이드 사실을 먼저 알려주지 않은 구단에 서운했어요. 그래도 평생 내 팀이라 생각하고 애정이 컸는데…. 당시엔 트레이드가 흔치 않던 시절이잖아요. 요즘과 달리 트레이드되면 구단에서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강했으니까 충격을 많이 받았죠.”


『김상호(24)가 프로야구단 OB로, 최일언(29)이 럭키금성으로 가게 됐다. 오른쪽 장거리타자 보강을 꾀하는 OB와 투수력 강화로 중상위권 진입을 노리는 럭키금성은 22일 두 선수를 맞트레이드하기로 했다. 두 선수의 트레이드는 지난해 말부터 추진됐으나 MBC 구단의 매각 문제와 김 선수의 미국 이민설 등으로 미뤄졌었다. 김상호는 프로야구 선수 생활 2년 동안의 타율은 0.262에 불과하지만 홈런 20개, 타점 99점을 기록한 중장거리 타자다.』 <1990년 1월 23일자 동아일보>


두산과 LG, 거슬러 올라가 OB와 MBC 시절까지 포함해도 두 팀은 웬만해서는 트레이드를 하지 않았다. 1980년대에는 단 한 차례도 선수를 주고받지 않았을 정도로 양 팀의 라이벌 의식은 강했다.


[베팬알백] 37번째 이야기는 바로 서울 라이벌 두 팀 간의 최초 트레이드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0년대 중·후반 OB 에이스로 활약한 최일언을 내주고, 미래에 홈런왕과 MVP가 되는 김상호를 영입한 것. 이는 1980년대를 지나 1990년대로 진입하면서 시작되는 첫 이야기다. 김상호라면 OB 팬들에게 1995년 우승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름이다.



홈런왕과 MVP가 되며 OB 중심 타선을 이끈 김상호 ⓒ두산베어스


1989 5 가을잔치 탈락장타력 보강이 열쇠


트레이드 이야기에 앞서 1989년 OB의 시즌을 복기할 필요가 있다.


이광환 감독을 영입한 뒤 첫 시즌을 시작한 OB는 1989년 한여름 대반격에 나섰다. 8월 17일 윤동균의 은퇴경기에서 승리하며 시즌 처음 5할 승률(42승2무42패)을 달성하고, 태평양과 공동 4위로 뛰어올랐다. 3위 삼성(39승5무36패)에도 1.5게임차로 따라붙었다. 단일시즌과 준플레이오프 제도를 처음 도입한 그해, 7개 구단 중 4위 안에 들면 가을잔치에 나설 수 있었다.


8월 22일 삼성이 4연패에 빠지며 OB는 태평양과 공동 3위가 되기도 했다. 3위에 오른 것은 시즌 처음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22일과 23일 해태에 2연패를 당해 5위로 내려앉았고, 9월초 6연패로 4강 싸움에서 뒤처졌다.


시즌 54승3무63패(승률 0.463)로 5위. 4위 삼성(57승5무58패)에 4게임차로 뒤져 가을잔치에 오르는 데 실패했다.


OB는 1989년 팀평균자책점 3.69로 중위권(7개 구단 중 4위)이었지만, 팀타율은 0.247로 바닥이었다. 팀홈런은 42개로 그해 팀 순위 최하위에 그친 롯데(38홈런) 다음으로 적었다. ‘투고타저(投高打低)’ 시절이긴 했지만 팀 내에 3할 타자가 한 명도 없었고(최고타율 박노준 0.297), 김형석(10홈런)이 유일하게 두 자릿수 홈런을 때렸다. 여기에 김광림 박노준 김형석 박종훈 신경식 등 주축 타자들이 왼손잡이였다. 그것도 대부분 소총형이었다.


OB로서는 공격력 보강이 시급했고, 특히 일발장타가 있는 거포가 필요했다. 더군다나 전임 김성근 감독은 투수력과 수비력 중심의 야구를 지향했지만, 이광환 감독은 호쾌한 공격야구를 선호했다. 방법은 두 가지. 신인드래프트에서 장타력을 갖춘 유망주 타자를 뽑거나 트레이드를 하는 것이었다.


1990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OB에 1차지명된 지명된 임형석 ⓒ두산베어스



1990 신인 1차지명MBC 김동수 이병훈, OB 임형석 김경원


1990년 KBO 신인 드래프트 제도는 제8구단 쌍방울 레이더스가 창단되면서 손질이 가해졌다. 연고지 1차지명을 종전 3명에서 2명으로 줄였다.


서울 연고권을 나눠 가지는 OB와 MBC는 지방 구단에 앞서 별도의 1차지명을 해야 했다. 1989년 11월 3일, KBO에서 ‘1990년 서울지역 신인드래프트’가 열었다. 여기서 OB는 우선권(1번 지명권)을 MBC에 내주고 말았다. 그러면서 MBC가 1번과 4번을 가져가고, OB가 2번과 3번을 선택할 수 있게 됐다.


서울 지역엔 그해 모두가 군침을 흘릴 만한 대학 무대 최고 타자가 있었다. 포수 김동수(서울고-한양대). 1번 선택권을 가진 MBC가 예상대로 먼저 ‘오리’ 김동수를 호명했다. 그러자 OB는 김동수와 서울고 한양대 동기로 장타력을 갖춘 내야수 ‘헐렝이’ 임형석을 2번으로 선택한 뒤 3번으로 동대문상고(현 청원고)의 초고교급 투수 김경원(중앙대 진학 후 1993년 입단)을 찍었다. MBC는 거포 이병훈(선린상고-고려대)을 1차지명 4순위로 선택했다.


OB는 공격력을 보강하기 위해 다시 트레이드를 구상했다. 그해 11승을 올린 김진욱 카드를 내놓고 1988년 12홈런, 1989년 18홈런을 기록하며 슬러거로서 꽃을 피우기 시작한 빙그레 장종훈을 영입하기 위해 떠보기도 했으나 빙그레가 펄쩍 뛰었다.


등번호 44번 김상호의 타격 준비 자세


거포가 필요했던 OB, 경험 있는 에이스를 원했던 MBC


OB의 안테나는 결국 잠실 라이벌 MBC로 향한다. 아직까지는 유망주지만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김상호였다.


선린상고-계명대 출신의 3루수 김상호는 1988년 좌완투수 이국성(성남고-경희대), 잠수함투수 이용철(경기상고-단국대)과 함께 MBC에 1차지명을 받았다. 김상호는 곧바로 1988년 주전 3루수 자리를 꿰찬 뒤 타율 0.269에 7홈런을 때리면서 가능성을 보였다.


신인왕은 김상호와 이용철(7승11패, 평균자책점 2.81)의 집안싸움. 김상호는 기자단투표에서 이용철에게 뒤졌지만 향후 MBC의 거포 갈증을 해결해 줄 후보로 급부상했다.


다만 ‘모 아니면 도’ 식으로 스윙이 거칠었다. 힘 하나는 장사. 방망이에 걸리기만 하면 초대형 홈런이 터졌다. 1989년 13홈런으로 ‘서울 홈런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규모가 큰 잠실구장을 사용하는 OB와 MBC 선수 중에 가장 많은 홈런을 친 것. 그래서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주연한 영화에서 본 딴 ‘터미네이터’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 대신 시종일관 큰 스윙을 유지했다. 삼진을 많이 당했다. 헛스윙을 할 때면 방망이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날 정도였고, 헬멧이 벗겨지고 혼자 다리가 꼬여 넘어지는 바람에 팬들을 자주 웃겼다.


1989시즌이 끝난 뒤 MBC 사령탑으로 부임한 백인천 감독은 일본에서 오랜 기간 프로선수 생활을 했기에 이런 스타일의 타자를 선호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일본야구 스타일과는 거리가 먼 선수였다.


최일언은 재일교포로 1984년 OB에 입단하자마자 9승을 올렸고, 1985년 10승, 1986년 19승, 1987년 14승을 기록하며 에이스로 활약했다. 그러나 1988년 팔꿈치와 어깨 부상으로 6승에 그쳤고, 1989년 7승에 머물렀다. OB에서 6년간 65승을 기록하고 있었다.


MBC는 마운드 보강이 필요했다. 특급 소방수 김용수가 있었지만 나머지 투수들이 고만고만했다. 1986년 입단하자마자 18승을 올리며 센세이션을 일으킨 신인왕 출신 김건우는 이듬해 발생한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투수로선 재기가 여의치 않았다. 원년 멤버 유종겸과 이길환(작고), 1983년 입단한 오영일은 내리막길을 타고 있었다. 1985년과 1986년 입단한 기대주 정삼흠과 김태원은 잠재력이 컸지만 알에서 깨기 전이었다. 1989년 입단한 신인 김기범이 7승을 거둬 성장을 기대케 했지만 아직은 신인이었다.


김상호와 맞트레이드로 럭키금성(LG) 유니폼을 입게 된 최일언


  이상 묵혀둔 김상호-최일언 트레이드


전문 기사에도 나와 있듯, 김상호와 최일언의 트레이드는 1989년 말에 추진됐으나 최종 합의를 하지 못했다. 실무진에서 트레이드를 추진하는 사이, MBC와 럭키금성 그룹이 물밑에서 구단 인수와 매각 절차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극비리에 작업을 진행해 온 MBC와 럭키금성은 12월 15일 구단 매각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프로야구 출범 당시 야구단을 창단하지 못한 럭키금성은 MBC 청룡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프로야구에 뛰어들게 됐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당시 문공부(문화공보부)에서 매각과 인수에 따른 제반 세금 문제를 이유로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MBC는 MBC대로 구단 매각을 놓고 이사회 등에서 반발해 내부갈등이 일어나는 바람에 계약이 진전되지 못했다. 이와 궤를 같이 해 성사 직전까지 갔던 김상호와 최일언의 트레이드 논의도 뒷전으로 밀렸다.


결국 해를 넘겨 문제가 되는 부분을 정리하고 정부 승인을 받았다. 1990년 1월 18일 마침내 MBC와 럭키금성은 매각대금 100억 원과 협찬광고비 30억 원 등 총액 130억 원에 구단 매매계약을 하게 됐다. 럭키금성이 MBC 선수단과 잔류를 원하는 구단 직원까지 모두 인수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구단 실무진끼리 최일언과 김상호 맞트레이드 이야기도 재개됐다.


여기에 김상호가 미국 이민 계획(트레이드 당시 OB에서 자신을 원했다는 생각보다는 MBC에서 버림받은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함)을 취소하면서 OB와 럭키금성의 트레이드 작업은 급물살을 타게 됐다.


1990년 1월 23일, OB와 럭키금성은 최일언과 김상호의 맞트레이드에 최종 합의한 뒤 이를 공식발표하기에 이르렀다.


풀스윙을 하고 있는 김상호 ⓒ두산베어스


잠실 라이벌 최초선수간 트레이드당사자들의 기억


“당신이 우리 팀에 있으면 여전히 10승 투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네. 그렇지만 이광환 감독 얘기로는 김상호란 선수가 OB에 오면 OB야구가 바뀐다고 하더라고. 발 빠르고 장타력이 있으니까 우리 팀 야구가 달라질 수 있다고 말이야. 그동안 구단을 위해 애써줘서 고맙네.”


김상호가 기자의 전화로 트레이드 사실을 알았다면, 최일언은 OB 구단 사무실에서 박용민 사장을 통해 트레이드 사실을 통보받았다. 박용민 사장은 최일언을 불러 이같이 말하면서 작별 인사를 했다.


최일언은 “당시 박용민 사장님이 하셨던 말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도 제가 일본에 있을 때 박용민 사장님이 영입해 주시고, 한국에 올 때부터 신경을 많이 써 주셨어요. OB에 대한 애정이 컸는데 마무리를 잘 못한 게 아쉬웠죠. 1988년 3월에 추운 날 연습게임을 하는데 100개 넘게 던지다 팔꿈치를 다쳤어요. 요즘 같은 스포츠의학이라면 간단히 수술하고 재활하고 문제없이 공을 던졌을 텐데 그땐 그런 게 없었죠. 병원에서 깁스하라고 했는데 한 달 쉬고 주사 맞고 공을 던졌어요. 1989년 이광환 감독님이 부임하고 나서 제대로 던지지 못했죠. 구단에 서운하기는 했지만 트레이드됐는데 어쩔 수 없잖아요. 박용민 사장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고마웠어요.”


현재 제주도에 내려가 살고 있는 이광환 감독은 이 트레이드에 대해 “김상호가 거칠긴 했지만 멀리 내다보면 OB엔 김상호 같은 그런 타자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회상하면서 “최일언은 당시 고장이 나 있었고. 너무 많이 써서 (재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MBC에서 최일언을 원하니 우리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현재 경기도 평택에 거주하고 있는 백인천 전 LG 감독에게 연락해 이 트레이드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물었다.


“김상호는 아주 좋은 타자였어요. 발도 빠르고 파워도 있었고. 그런데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았어. 그래서 구단에서 최일언하고 트레이드를 추진했고. 최일언은 투수로서 재능이 있고 경험도 많아 우리 젊은 투수들이 보고 배울 수 있는 선수라고 봤죠.”


백 감독은 파워히터를 선호하기는 했지만 필요할 땐 상황에 맞는 타격, 히트앤드런을 비롯해 정교함과 작전수행 능력을 발휘하는 선수를 중용하는 스타일이었다. 김상호의 장타력은 매력 있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큰 스윙으로만 일관하며 삼진을 많이 당하는 타자이기에 백 감독이 보기엔 썩 내키지 않았다.


1990년 개막전부터 4번 타자로 선발 출전한 김상호 ⓒ두산베어스


1990 개막전LG 선발투수 최일언 vs OB 4번타자 김상호 맞대결


1990년은 서울 라이벌 두 팀에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MBC 청룡이 럭키금성 그룹에 매각된 뒤 LG 트윈스라는 간판으로 바꿔 달고 치르는 첫 시즌이었다(프로야구단 LG의 성공으로 나중에 럭키금성 그룹도 LG그룹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이광환 감독 체제 두 번째 시즌에 접어든 OB는 자율야구의 정착과 함께 분위기 전환이 필요했다.


그런 가운데 4월 8일 잠실야구장에서 OB-LG의 1990시즌 출발을 알리는 개막전이 열렸다. LG는 선발투수로 최일언을 내세웠고, OB는 김상호를 4번타자에 포진시켰다. 올드팬들에겐 기억에 남아 있을 만한 게임. 그날의 라인업을 소환한다.


                  ■1990 개막전 선발 라인업                    


여기서 김상호의 수비 위치가 중요하다. MBC 시절의 3루수가 아닌 좌익수였다. MBC에서 3루수로 뛰며 1988년 88경기에서 14실책, 1989년 109경기에서 23실책을 기록해 2년간 37개의 실책을 범한 김상호였다. 이광환 감독은 수비에 대한 부담을 줄여주면서 공격력 극대화를 위해 외야수로 변신시켰다.


“원래 저는 선린상고 2학년 때까지 포수를 봤어요. 그런데 갑자기 무릎 관절이 튀어나오고 시력이 떨어져 안경을 쓰게 되면서 포수를 보기 힘들었죠. 결국 3루수로 변신했어요. 그런데 프로에 들어와 송구 실책이 좀 많았죠. 요즘 말로 입스(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발생하는 각종 불안 증세)가 온 거죠. 순발력은 괜찮아서 공은 잘 잡는데 원바운드 송구를 많이 했어요. 몇 번 송구 실책을 하다 보니 심리적으로 불안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OB에 갔더니 발이 빠르고 어깨가 강하다고 외야수로 전향하라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결과적으로는 잘 됐지만, 처음엔 외야수비도 쉽지 않더라고요. 쉬운 수비 포지션은 없어요. 하하.”


김상호는 오랜만에 옛 기억을 떠올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다시 1990년 개막전으로 돌아가 보자.


OB 선발투수는 또 ‘개막전의 사나이’ 장호연. 1983년 데뷔 후 개막전에서는 한 번도 패하지 않았던 장호연은 1년 전 MBC 김기범의 완투에 밀려 처음 개막전 패전의 쓴맛을 본 터였다.


장호연의 출발은 좋지 않았다. 1회초 시작하자마자 선두타자 김재박을 볼넷으로 내보낸 뒤 도루까지 허용했다. 1사 후 김영직에게 좌전 적시타, 2사 후 노찬엽에게 좌중간 2루타를 맞고 2점을 먼저 내줬다.


반면 LG 선발투수 최일언은 1회말 삼자범퇴로 산뜻하게 시작했다. 2회말 선두타자는 맞트레이드 상대 김상호. 여기서 김상호는 볼넷을 얻어나갔다. 이어 무사 1·3루에서 김형석의 유격수 병살타 때 OB의 첫 득점이 나왔다.


최일언은 4회까지 1실점으로 던졌고, OB는 1-2로 끌려갔다.


5회말 OB 공격. 최일언은 갑자기 제구 난조를 보였다. 선두타자 이명수를 볼넷으로 내보낸 뒤 1루 견제구로 잡아냈지만 김광수에게 다시 볼넷을 허용했다. 2사 후 양세종에게도 볼넷. 여기서 김광림의 좌중간 적시타가 터지면서 2-2 균형을 맞췄다.


최일언이 5이닝 동안 84구로 2실점하고 마운드를 내려가면서 승패를 기록하지 못했다. OB는 LG 유종겸과 예병준을 상대로 6회말 4점, 7회말 1점을 추가해 결국 7-2로 승리했다. 장호연은 134개의 공을 던지며 9이닝 4안타 6볼넷 2실점으로 완투승을 올렸다. 전년도 MBC에게 당한 개막전 패배를 완벽히 설욕했다.


김상호는 4회 삼진, 5회 3루수 땅볼에 이어 7회 좌전안타를 때렸다. 곧바로 2루 도루에 성공해 1사 3루에서 김형석의 우익수 희생플라이 때 홈을 밟았다. 이날 OB 득점의 처음과 끝을 장식했다. 4타석 3타수 1안타 1볼넷 2득점. OB 팬들에게 기분 좋은 신고식을 했다.


최일언은 1990년 개막전 선발로 낙점될 만큼 백인천 감독이 신뢰했지만 결국 팔꿈치 부상에서 이어진 어깨 통증으로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해 15경기에 등판해 48.2이닝만 소화했다. 3승2패, 평균자책점 4.62로 프로 데뷔 후 가장 저조한 성적을 찍었다.


결국 1990시즌 후 LG에서 방출된 최일언은 1991년 김성근 감독이 부임한 삼성으로 이적해 2시즌만 활약한 뒤 은퇴했다. 만 31세 되던 해였으니 젊은 나이였다. 부상만 아니었다면 OB 베어스에서 더 오랫동안 팬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줬을지 모른다. 최일언은 OB를 떠났지만 팬들에겐 1980년대 중·후반 에이스로 많은 추억을 안겨준 이름이다.


서울팀 선수 최초로 100타점을 넘기며 MVP를 수상한 김상호 ⓒ두산베어스


1995 서울팀 최초 홈런왕 김상호OB 역사를 바꿔놓은 트레이드


김상호는 OB에서 야구인생의 꽃을 피웠다. 120경기로 진행된 1990년, 완전히 주전 좌익수로 자리 잡고 처음으로 세 자릿수 안타(110)를 때렸다. 타율 0.275, 14홈런, 52타점으로 프로 데뷔 후 가장 좋은 성적을 올렸다.


그러나 1994년까지는 확실한 4번타자로서는 어딘가 아쉬웠다. 그랬던 그가 1995년 마침내 잠재력을 폭발시켰다. 전경기(126경기)에 출장해 타율은 0.272로 정교하진 못했지만 25홈런과 101타점으로 홈런왕과 타점왕에 올랐다.


구장이 큰 잠실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는 서울 팀 선수로는 최초의 홈런왕. 한마디로 눈부신 시즌이었다. 여기에 서울팀 선수 최초로 100타점을 넘겼다. 그러면서 시즌 MVP(최우수선수)까지 차지했다. 원년 박철순 이후 OB 선수로는 두 번째 시즌 MVP였다.


두산(OB) 베어스-LG 트윈스(MBC 청룡) 트레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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