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팬알백 | 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1990시즌을 앞두고 OB는 한겨울에 오대산에서 체력훈련을 했다. 1년 전 김성근 감독을 영입한 만년 하위팀 태평양이 혹한기에 오대산 얼음물에 들어가 극기훈련을 하면서 준플레이오프에 직행하는 기적을 썼는데, OB 역시 오대산에서 선수단의 정신력을 다잡는 훈련을 한 것이었다. 이광환 감독의 입지도 조금씩 좁아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누가 봐도 이광환 감독의 훈련 방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베팬알백] 38번째 주제는 시대를 너무 앞서가는 바람에 실패한 이광환 감독의 자율야구와 그가 한국야구에 남긴 발자취에 관한 이야기다.
● 1990년 초반부터 연패의 늪…KBO 최초 선수단 전원 삭발
1990년 개막전 상대는 LG 트윈스였다. MBC 청룡을 인수해 간판이 바뀐 잠실 라이벌. 4월 8일 개막전에서는 장호연의 완투승 속에 7-2로 승리했고, 2차전에서는 구동우를 선발로 내세워 5-4로 이겼다. 1년 전 개막 2연패의 아픔을 고스란히 갚아줬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이후 4연패에 빠지며 하위권으로 처졌다. 4월 24일과 25일 롯데에 연패를 당하며 꼴찌로 내려앉았다. 5월 10일 태평양전부터 19일 빙그레전까지 7연패를 당했다. 5월말부터 잠실구장 앞에서는 감독 교체와 청문회를 요구하는 극성팬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5월 30일 대구 삼성전에서 3-20으로 대패를 한 뒤 다시 연패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OB 선수단은 경기가 없는 6월 3일 집단 삭발을 했다. 선참 신경식과 김형석이 주장 김광수에게 건의를 해 이뤄진 것이었다. 선수단 전원이 삭발한 것은 프로야구 출범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분위기 반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6월 5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삼성과 더블헤더 제2경기에서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벤치 클리어링으로 양 팀 선수 6명이 퇴장당하는 불상사까지 발생했다.
OB 투수 김진규의 초구가 타자 강기웅 얼굴 쪽으로 날아든 뒤 2구째 투구가 옆구리를 강타하자 강기웅이 마운드로 달려갔다. 양 팀 선수단이 우르르 몰려나와 집단 난투극을 벌였다. 몇몇은 방망이까지 들었다. 그 사이 삼성 박용준은 얼굴이 찢어졌고, 김동앙 주심은 싸움을 말리다 갈비뼈가 부러졌다. 삼성 강기웅 박정환 김종갑, OB 김진규 조범현 김태형 등 무려 6명이 퇴장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터졌다. 주심이 병원에 실려 가면서 결국 3심제로 남은 경기를 소화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 경기에서도 7-11로 졌다.
연패가 길어졌다. OB는 6월 18일 광주에서 열린 해태와 더블헤더 제1경기에서 패하면서 연패 숫자가 11까지 이어졌다(현 두산 베어스를 포함해 여전히 팀 최다 연패 기록으로 남아 있다).
더블헤더 제2경기. 플레잉코치 박철순이 팔을 걷어붙이고 선발투수로 마운드에 올랐다. 팀 마운드가 무너지자 2군에서 몸을 만들며 5월말에 1군에 올라왔지만, 박철순이 선발로만 예고되면 비가 오는 통에 일정이 꼬였다. 2주일 이상이 지나고서야 결국 마운드에 오를 수 있었다.
●창단 후 처음 감독 중도 퇴진…이광환 대신 이재우 감독대행
박철순은 5회까지 안타 8개를 맞으면서도 버텨냈다. 6회초 연타를 맞고 강판했지만 5이닝 10안타 5탈삼진 2실점으로 역투했다. ‘불사조’의 투혼에 타선도 이날만큼은 1회초 김형석의 선제 3점홈런 등으로 일찌감치 터지면서 6-3으로 승리해 11연패 탈출에 성공했다. 박철순은 1989년 6월 21일 빙그레전 이후 약 1년 만에 승리를 기록했다.
그러나 마냥 축하하고 기뻐할 수 없었다. 팀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 결국 OB는 이 경기를 끝으로 이광환 감독을 퇴진시켰다. OB로서는 창단 후 처음으로 감독을 임기 도중 교체했다. 대신 이재우 2군코치를 감독대행으로 앉히면서 잔여경기를 치르기로 했다.
이재우 감독대행은 1960년대에 국가대표를 지낸 내야수 출신. 은퇴 후 미국으로 건너가 마이너리그에서 야구 연수를 하고 코치 생활을 한 뒤 1988년 11월부터 OB 1·2군 총괄 인스트럭터를 맡았다. OB는 그러나 이재우 감독대행 체제에서도 7월에 다시 한 번 11연패를 하고 말았다.
●시대를 앞서나간 자율야구…OB와 한국야구에 남긴 시스템
OB는 1990년 35승5무80패(승률 0.313)로 팀 창단 후 처음 꼴찌를 경험했다. 미국에서 배워 온 자율야구를 KBO리그에 이식하려고 한 이광환 감독의 시도는 뿌리를 내리는 데 실패했다. 어쩌면 OB 베어스는 자율야구와 선진 야구 시스템을 가장 먼저 열어젖힐 기회를 잡았지만 열매를 따지 못했다.
그러나 KBO리그 역사상 최초의 실험 무대였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었다. 돌아보면 이광환 감독의 야구 철학과 방향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몇 년 후 자율야구가 결국 LG에서 꽃을 피웠고, 그가 주창했던 것들은 훗날 다른 구단에서 모두 따라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는 너무 시대를 앞서나간 선구자였다.
한국야구는 당시 선발 로테이션이나 마운드 분업화 개념 자체가 없었던 시절이다. 선발 예고제도 당연히 없었다. 이광환 감독이 혼자서라도 선발예고를 시행하려 하자 구단이나 선수단 내부에서도 “상대팀은 선발투수를 감추는데 왜 우리만 전력을 미리 노출시키려고 하느냐”며 불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당시 OB 프런트에서 근무했던 구경백 현 일구회 사무총장은 이광환 감독의 자율야구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한국야구는 물론 OB 선수들, 코치들, 프런트 모두 자율야구를 전혀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았던 시기였어요. 스프링캠프 때 녹초가 될 때까지 훈련을 하던 선수들이 짧은 시간으로 훈련을 끝내니까 적응이 안 됐죠. 대부분의 선수들이 ‘이렇게 훈련을 안 해도 되나’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요. 솔직히 OB 선수단 구성이나 전력 면에서 매우 약했던 것도 이광환 감독의 자율야구가 뿌리내리지 못한 이유 중 하나였어요. 나중에 자율야구가 LG에서 성공한 것도 선수층과 전력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봐요. OB는 당시 타선도 약했지만 마운드도 선발, 중간, 마무리로 나눌 자원 자체가 빈약했어요.”
이광환 감독은 OB 베어스에서 통산 69승4무93패를 기록한 뒤 유니폼을 벗었다. 그러나 좋은 성적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선진야구 시스템을 만들어 준 부분에서는 평가를 할 만하다.
야구장에 최초로 라커룸과 샤워실, 실내훈련장을 만든 팀이 OB였다. 경기 후 유니폼과 훈련복 등을 선수가 집으로 가져가 빨래를 하던 시절, 처음으로 세탁실을 만들고 구단에서 대신 빨래를 해주도록 한 것도 OB였다. 모두 이 감독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연수 시절 보고 배워온 것들이었다. OB 구단은 이런 부분에서 전적으로 이 감독의 요구를 들어줬다.
훈련 매뉴얼은 물론 경기 전 식사하는 매뉴얼도 당시로선 생소했지만 메이저리그에서는 이미 일반화된 것들이었다. 이 감독은 선수들에게 경기 전에는 식사 대신 수프와 바나나 등으로 가볍게 허기를 달래고 경기를 한 뒤 식사를 하도록 유도했다.
구 사무총장은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운동선수라면 배불리 먹어야 힘을 쓴다고 믿던 시절 아닙니까. 그런데 바나나 정도로 요기를 하고 경기를 하라고 하니 따르는 선수가 얼마나 되겠어요. 양푼에다 고추장 넣고 비빔밥을 한가득 비벼 먹고 나서야 경기에 들어갔던 선수들인데 그 말이 귀에 들어왔겠습니까. 감독 앞에서는 과일만 먹는 척하다가 따로 야구장 밖으로 나가는 선수들이 있었죠. 중국집에 짬뽕 곱빼기를 배달시켜 몰래 쭈그리고 앉아서 한 그릇씩 비우고 경기를 시작하는 선수들이 많았어요.”
●모험으로 끝난 이진 1차지명…1990년대 더딘 세대교체의 상징
[베팬알백 34]에서 1989년 1차지명 투수 이진에 대해 얘기를 꺼낸 것은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을 기억하는 베어스 올드팬들에게 애증이 교차하는 상징적 선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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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은 1989년 첫해에는 39경기에 나서 97이닝을 던지며 7승4패2세이브, 평균자책점 4.27을 기록했다. 7승 중 4구원승이 포함돼 있기는 하지만 신인치고는 나름대로 준수한 성적을 올렸다.
그러나 그것이 최고 성적이었다. 1990년부터 존재감을 전혀 올리지 못했다. 21경기(38.1이닝)에서 단 1승(4패)에 그치면서 평균자책점 5.40을 기록했다. 1992년 12경기(30.1이닝)에 등판해 2승무패 평균자책점 4.45의 성적을 올렸다. 그리고 1993년엔 1승도 올리지 못한 채 10경기(18.2이닝)에서 0승2패 평균자책점 10.13을 기록한 뒤 유니폼을 벗었다.
통산 10승10패, 평균자책점 5.13의 성적을 남겼다. 중간에 방위 복무를 하면서 홈경기 때 가끔씩 마운드에 오르기는 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무엇보다 타고난 재능을 살리지 못하면서 너무나 짧게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 점이 아쉬웠다. 부상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1989년 훈련 보조원으로 입단해 훗날 베어스 에이스로 성장한 ‘베트맨’ 김상진(현 퓨처스 투수코치)는 이진에 대해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진이 형은 같은 투수로서 봐도 너무나 매력적인 투수였어요. 시속 140㎞만 나와도 강속구라고 했던 시절인데 140㎞ 중반대를 쉽게 던지고, 빠른 공은 147~148㎞까지 나왔어요. 그 시절 흔히 볼 수 없는 좌완 파이어볼러였죠. 다만 프로에 와서 기대만큼 성공하지 못한 점이 아쉬워요. 실패한 스카우트라는 말도 있지만, 좌완으로 그 정도 구속을 던지는 투수를 누가 스카우트하지 않겠습니까. 스카우트 실패는 아니라고 봐요. 육성에 실패한 것이라고 봐야겠죠.”
1989년 입단 이후 이진을 지켜본 장호연 역시 비슷한 얘기를 했다.
“정말 좋은 재능을 가진 왼손 투수였어요. 샤프하게 던졌죠. 힘으로 던지는 스타일도 아니고, 쉽게 쉽게 던지는데 140㎞ 중후반 구속이 나왔거든요. 제구 문제가 있었는데 요즘처럼 체계적으로 유망주를 가르치는 시스템이었다면 완전히 다른 투수가 됐을 수도 있어요. 야구에 집중하고 재미를 붙이게 해 줬더라면 LG 이상훈보다 먼저 KBO리그에 150㎞ 던지는 좌완 특급투수가 됐을지도 모릅니다.”
이진은 야구를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5시즌 만에 글러브를 내려놓았다. 이런 점에서 보면 1989년 1차지명에서 OB가 이진을 선택한 것은 결과적으로 모험으로 끝났다고 평가할 수 있다. OB가 포기한 김기범은 1999년까지 LG 마운드의 선발과 구원의 한 축을 차지하며 11년간 활약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OB는 이진과 같은 해 김동현과 구동우를 1차지명했다. 이들은 암흑기에 10승 언저리의 성적을 올려주며 나름대로 기대주로서 OB 팬들에게 좋은 추억을 선사하기도 했지만, 각각 1993년과 1994년 은퇴를 하면서 역시 단명했다.
OB 베어스 마운드의 세대교체는 더디게 흘러갔다. 원년 우승을 이끌었던 멤버들이 하나둘씩 은퇴를 하는 시점이었고, 에이스급으로 도약할 새로운 투수의 출현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암흑기를 속절없이 맞이해야만 했다.
그 시기를 돌이켜 볼 때, 여전히 가장 먼저 떠오르는 안타까운 이름은 이진이다. 팬들의 기대가 너무나 컸던 만큼 여전히 아픈 손가락으로 기억되고 있는 인물이다. 이진부터 시작된 OB 베어스의 ‘좌완투수’에 대한 갈증은 훗날 이혜천 시대에 가서야 어느 정도 해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