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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국 Mar 03. 2023

[39]배팅볼 투수가 에이스로…만화 같은 김상진 스토리

베팬알백 | 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고졸 2년생 투수 김상진이 자신의 프로 데뷔 첫 승을 완봉승으로 장식하며 팀을 꼴찌에서 구해냈다. OB는 23일 잠실서 벌어진 프로야구 쌍방울과의 경기서 김상진의 호투와 김광림의 2타점 적시타에 힘입어 3-0으로 승리했다. 지난해 프로야구에 입문한 김상진은 낙차 큰 커브와 슈트(역회전볼)를 섞어 뿌리며 단 3안타 1포볼(볼넷)로 역투, 승리를 거뒀고 OB는 6회말 2사 후 터진 김광림의 결승타로 탈꼴찌에 성공했다.』

<1991년 5월 24일자 조선일보>


암흑기의 우울한 나날이 이어지던 1991년, OB 베어스 팬들의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준 투수 한 명이 혜성처럼 등장했다.


1989년 마산청강고 졸업 후 불러주는 팀이 없어 배팅볼 투수로 OB 베어스에 입단했다가 1년 후 신인드래프트 2차지명을 받고 정식 선수가 된 김상진이었다.


[베팬알백] 39번째 주제는 OB 베어스의 암흑기에 나타나 팬들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든 전설의 투수 ‘배트맨’ 김상진 이야기다. 1990년대를 기억하는 베어스 올드팬들에겐 자존심의 이름이자 박철순 이후 명맥이 끊겼던 우완 정통파 에이스 계보를 이어준 고마운 존재였다. 만화 주인공처럼 우리 곁에 나타난 김상진의 기막힌 사연은 소개한다.


배팅볼 투수 출신으로 통산 122승을 올린 김상진 ⓒ두산베어스


1990 OB 2 3라운드 지명낯선 이름 김상진


“OB 베어스 지명하겠습니다. 마산청강고 투수 김상진!”


모두들 웅성웅성했다. OB 베어스가 1990년 신인드래프트 2차지명 3라운드에서 투수 김상진의 이름을 호명하자 장내는 술렁였다.


김상진이 누구야?”


아마추어 무대에서 제대로 던지는 모습도 본 적 없는 김상진이라는 이름도 낯설었지만, 웬만한 야구인들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학교 이름 마산청강고 출신. OB가 무명의 투수를 3라운드에 지명을 하자 모두들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김상진은 1990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지명됐지만, 사실은 한 해 앞서 1989년 2월에 마산청강고를 졸업했다. 그러나 어떤 구단도 그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아니, 관심을 가질 수조차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마산청강고(현 마산제일고)는 1985년 개교한 학교로 1986년 교기로 야구부를 창단했다. 창단 후 3개월 만인 8월에 제16회 봉황대기전국고교야구대회에 참가해 이틀에 걸쳐 보성고와 연장 13회 혈투를 벌이면서 기적 같은 1승을 올리기도 했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야구부가 해체될 때까지 청강고가 전국 무대에서 거둔 승리는 이 1승이 전부였다.


그나마 부산고를 다니다 2학년 때 전학 온 서정용이 1988년 롯데에 고졸 연습생으로 입단해 1989년까지 8승을 올리며 신데렐라로 떠오른 덕분에 학교 이름이 어렴풋이 알려지기는 했지만, 야구로만 보면 변방 중의 변방이었다. 게다가 김상진이 1989년 졸업한 뒤 청강고 야구부는 짧은 역사를 뒤로 하고 해체됐다.


김상진 또한 고교 시절 이렇다 할 활약을 하지 못했다. 보여준 게 전혀 없었다. 그런데 졸업 1년 뒤에 2차지명을 받았으니 스카우트들의 눈과 귀에 그의 이름 석 자는 낯설 수밖에 없었다.



 160㎝도  되는 꼬마2 뒤늦게 야구 입문


현역 시절 김상진은 특유의 안경 스타일과 꼴찌팀을 구하는 스토리 때문에 '배트맨'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두산베어스

김상진은 훗날 KBO리그 개인통산 122승을 올린 대투수가 됐지만, 야구에 입문하기까지 과정이나 정식 프로야구 선수가 된 과정은 그야말로 우여곡절로 점철됐다. 만화 같은 야구인생이었다.


마산 월포국민학교(초등학교)에 다니던 꼬마는 어릴 때부터 마산 바닷가에서 동네야구를 하고 돌팔매질을 하면서 ‘야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키웠다. 그러나 야구부에 들어갈 수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었다. 중학교 때도 키가 160㎝도 안 됐다.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중학교 시절까지 늘 교실 맨 앞자리를 차지했다.


꼬마는 마산동중에 입학한 뒤에도 틈만 나면 야구부 주변을 맴돌았다. 그럴 때마다 야구 감독이나 선배들은 “저리 가라”, “공부나 해라”라며 얼씬도 못하게 했다.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가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남들은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야구를 시작했다. 중학교 2학년이면 이미 고등학교 야구부의 스카우트 얘기가 오고 갈 시점. 야구를 하기엔 너무나 늦었다. 그러나 김상진은 “제발 야구시켜 달라”며 부모님을 계속 졸랐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한다.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의 작은 키를 유전적으로 물려받아 야구선수로 성공하기 힘들다고 판단해 계속 반대를 했지만 결국 아들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김상진은 중학교 2학년 11월에 마침내 야구 선수가 되는 꿈을 이뤘다. 그러나 어깨 하나는 강했지만 체격이 작고 야구선수로서 기본기가 전혀 없으니 3학년이 되고서도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당시엔 투수가 아닌 내야수였다.



마산상고 입학식날 퇴짜창단팀 청강고로 전학


중학교 3학년 11월, 진학이 예정된 마산상고(현 용마고)에 가서 훈련을 시작했다. 체격이나 실력만 놓고 보면 야구부가 있는 고등학교 진학은 어려웠다.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의 상무가 마산상고 후원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다리를 놓아준 덕분에 가까스로 마산상고로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키 작은 김상진은 거기서도 눈에 띌 리 없었다.


1986년 3월, 마산상고 입학식 날 첫 훈련을 진행했다. 그런데 훈련이 끝나자마자 야구부장이 김상진을 조용히 불렀다.


“교실로 들어가라.”


한마디로 입학 첫날에 야구선수로서 퇴짜를 맞은 것이었다.


“야구부에서 잘렸다고 집에 얘기할 수도 없었죠. 일주일 동안 학교 가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고 집을 나섰어요. 그리고는 일부러 훈련을 하고 땀이 난 것처럼 유니폼에 물을 뿌리고 흙을 묻혀서 저녁에 집에 들어가곤 했죠. 사실상 야구한 지 1년 만에 잘렸으니….”


김상진(현 두산 퓨처스 코치)은 그 시절을 돌아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즈음 마산청강고가 야구부를 창단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경남대에서 훈련한다는 소문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무작정 경남대로 찾아가서 청강고 감독님을 만났어요. 당돌하게도 여차저차해서 마산상고에서 잘렸는데 청강고 야구부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죠. 야구를 그만두게 됐는데 물불 가릴 수 없잖아요. 감독님이 ‘아버지 모시고 오라’고 하더라고요. 마산상고는 실업계 학교고, 청강고는 마산제일여고와 같은 재단으로 인문계 학교라 전학이 쉽지는 않았어요. 아버지 모시고 가서 어렵게 전학이 성사되면서 다시 야구를 할 수 있게 됐죠.”


김상진은 주로 2루수를 보면서 3루수 훈련도 병행했다. 그러나 내야수로서 기본기가 부족하니 주전으로 도약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 앞서 설명한 대로 청강고는 봉황대기에서 1승을 올리는 파란을 일으켰다. 그렇지만 1학년 김상진은 출전할 수 없었다.


2학년에 올라갈 무렵, 그렇게 자라지 않던 키가 갑자기 커지기 시작했다. 1년 사이에 무려 18㎝나 커졌다. 180㎝를 넘었다. 동시에 성장통으로 극심한 허리 통증이 찾아왔다. 거동도 하기 힘들었다.


“6개월간 집에서 먹고 자기만 했어요. 제대로 일어서지를 못했으니까 야구선수로 끝난 줄 알았죠. 허리에 좋다는 약이란 약은 다 먹었어요. 어느 순간 허리가 나아지기 시작하더라고요. 학교에 갔더니 나보다 컸던 친구들이 죄다 나보다 작았을 정도로 제 키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엄청나게 커졌어요.”


문제는 그 사이 전학 온 선수가 2루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나마 비벼볼 포지션도 사라졌다. 어깨 하나 좋은 것 빼고는 내세울 게 없었던 김상진은 결국 2학년 말에 투수로 전향했다. 그런데 이것이 그의 인생항로에 있어서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됐다.


3학년이 됐지만 청강고도, 김상진도 앞날이 불투명했다. 당시 입시제도로는 팀이 전국대회 4강에 들어야만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약체 청강고 전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유일하게 모든 학교에 출전권이 주어지는 봉황대기에 참가했지만 역시나 1회전 탈락이었다. 눈에 띄지 않으니 연고 구단 롯데 입단은 물론 대학 입학도 언감생심이었다.



연습생도 아닌 배팅볼 투수 OB 들어가다

등번호 61번 김상진이 주먹을 불끈 쥐는 모습 ⓒ두산베어스


“이 친구 어깨 하나는 괜찮습니다. 배팅볼은 잘 던질 겁니다.”


1989년 2월, 졸업을 했지만 갈 곳이 없었다. 희망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던 그 시간, 창원에 2군 훈련장을 지어놓은 OB 베어스 선수단이 이곳에 전지훈련을 왔다. 이광환 감독의 인솔 하에 꿈만 같은 프로 선수들이 훈련을 하고 있었다.


당시 청강고 이명섭 코치가 OB 베어스 강남규 스카우트 담당 부장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김상진을 배팅볼 투수로라도 써달라고 부탁했다.


테스트를 해보니 어깨가 싱싱했다. 공에 힘도 있었다.


연봉 300만 원의 조건. 김상진은 배팅볼 투수로 OB 구단에 취직을 했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이 있다. 김상진의 신분은 ‘연습생’이 아닌 ‘배팅볼 투수’라는 점이었다.


연습생(현 육성선수)은 2군에서 훈련을 하고 실전 경기에도 뛰게 된다. 현재의 기량은 미흡하지만 구단이 잠재력이 있다는 판단 아래 미래 전력으로 보고 한번 키워보겠다는 의도로 영입을 하는 것이다. 1989년 순천상고를 졸업한 뒤 연습생으로 태평양에 입단한 조웅천(현 SSG 투수코치)이 그런 케이스였다. 조웅천은 1990년 정식으로 신인 2차지명을 받고 태평양에 입단했다.


그러나 김상진은 달랐다. 1군을 따라다니고, 원정 시 호텔생활을 한다는 점에서는 2군보다 나을지 몰라도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한정적이었다. 경기 전 1군 선수들에게 배팅볼을 던져주며 훈련을 도와주는 역할이었다. 한마디로 구단에서는 선수로 보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김상진은 여기서도 희망을 놓지 않았다. 홀로 서울로 올라와 생활해야 하는 상황이라 의정부에 있는 삼촌집과 상계동 큰이모집을 오가며 신세를 졌다. 그는 가장 먼저 잠실야구장에 나오고, 가장 늦게 퇴근했다. 누구도 훈련을 시켜주지 않았고, 누구도 공을 받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1군 선수들이 훈련하기 전 실내훈련장 그물에 대고 혼자 공을 던졌고, 모두가 퇴근한 다음에도 혼자 운동장을 달렸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과연 선수가 될 수 있을까’라고 고민도 많이 했죠. 그래도 내가 좋아서 시작한 야구인데 포기하긴 싫었어요. 요즘은 학교폭력이 큰 문제가 되지만 당시엔 학창 시절 운동선수들은 밥 먹듯 맞았잖아요. 그렇게 맞고도 저는 단 한 번도 야구하기 싫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거든요. 그 정도로 야구가 좋았어요. 배팅볼 투수라는 신분이어서 앞이 안 보이는 상황이었지만, 제 나름대로는 꼭 프로야구 선수가 되겠다고 막연히 꿈을 꿨어요. 마운드에서 던지는 OB 선배 투수들을 보면서 ‘저 마운드에 서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정식 선수로 번호가 달린 유니폼을 입은 선배 선수들을 보면서 ‘저 유니폼 꼭 입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했어요. 그래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혼자 벽을 보고 공을 던졌죠.”


OB는 1989년 포스트시즌 탈락이 확정됐다. 시즌 말미로 접어든 어느 날, 투수코치가 불펜으로 김상진을 데려가 “공 한 번 던져보라”고 했다. 타자 입맛에 맞게 던져주는 배팅볼이 아니라 투수처럼 불펜 마운드에 서서 던지는 것이었다.


1989년 마산청강고를 졸업한 뒤 불러주는 팀이 없어 OB에 배팅볼 투수로 들어온 별 볼 일 없던 투수.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지만 결국은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튀어나왔다.


한 시즌 내내 김상진의 배팅볼을 지켜본 코치들이나 선수들이 그의 가능성을 인정했고, OB 구단도 투수로 한번 키워볼 만하다는 판단을 하기에 이르렀다. 어쩌면 이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암흑기에서 OB 베어스 구단이 가장 잘 한 결정이었는지 모른다. 1990년대 김상진 없는 OB 마운드를 상상해 본다면 더욱 그렇다.



정식 선수로 2차지명할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인터뷰를 하는 김상진 ⓒ두산베어스


앞서 [베팬알백_37]에서 설명했듯이, 1990년 1차지명은 구단별로 2명씩 선택할 수 있었는데 OB는 1989년 11월 3일 KBO에서 열린 ‘1990년 서울지역 신인드래프트’에서 서울고-한양대 출신의 내야수 ‘헐렝이’ 임형석과 동대문상고 초고교급 투수 김경원(중앙대 진학 후 1993년 입단)을 뽑았다.


당시 지명제도는 여느 해와는 조금 달랐다. 쌍방울 레이더스가 KBO 8번째 구단으로 창단하면서 1차지명과 2차지명 사이에 10명을 특별우선지명 하도록 배려했기 때문이다. 이어 2차지명은 전년도(1989년) 성적 역순으로 최하위 롯데가 1라운드에서 2명을 뽑았고, 나머지 팀은 1명씩 선택할 수 있었다. 10명의 특별지명을 받은 쌍방울이 가장 늦은 8순위로 배정됐다.


그리고 1989년 11월 28일, ‘1990년 신인드래프트 2차 지명 회의’가 개최됐다. 1989년에 7개 팀 중 5위를 차지한 OB는 3번째 순서를 기다렸다. 1라운드에서 서준룡(광주상고-성균관대 투수)을 선택한 뒤 2라운드 조정수(광주일고-동국대 투수), 3라운드 김상진(마산청강고 투수), 4라운드 한형탁(포철공고 투수), 5라운드 김만조(마산상고 증퇴 투수), 6라운드 강형석(휘문고-건국대 외야수)을 호명했다


김상진은 2차지명에 앞서 구단으로부터 자신을 지명할 것이라는 언질을 미리 받았다고 한다.


“구단에서 2차지명 전에 ‘너 지명할 거다’라고 얘기를 해주셨어요. 중학교 3학년 올라가기 직전에 야구를 시작했으니 고등학교까지 야구 한 지는 4년밖에 안 된 놈인데 내가 좋아한 프로야구 선수가 됐다는 것, 그것도 정식으로 지명을 받는다는 게 꿈만 같았어요. 지명을 받고 신인 계약을 하기 위해 당시 OB 구단 사무실이 있는 종로5가로 가는데 믿어지지 않더라고요. 그때 기분은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어요.”


김상진은 계약서를 쓴 뒤 계약금 800만 원을 수표로 받았다. 떨렸다. 옆에 있던 구경백 1군 총괄 매니저에게 “저희 어머니한테 전화 한 통 해주세요”라고 부탁했다.


“어머니, 축하드립니다. 아드님이 정식 선수로 계약했어요. 상진이가 정식으로 프로야구 선수가 됐어요.”


창원에서 전화를 받은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울고 말았다. 목에 메어 말이 나오지 않는지 “고맙습니데이, 감사합니데이”만 연발하며 흐느꼈다.


김상진은 곧바로 은행으로 직행했다. 부모님의 반대를 뚫고 시작한 야구. 그는 계약금을 모두 부모님께 드리면서 감사 인사를 대신했다.


그렇다면 OB는 왜 김상진을 2차지명했을까. 육성선수로 등록한 뒤 가능성을 보이면 정식 선수로 계약하는 요즘 제도로 보면 이해하기 힘들다. OB가 배팅볼 투수 김상진을 서둘러 지명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당시 KBO 제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때도 물론 각 구단이 신인드래프트에서 지명받지 못한 선수를 놓고 연습생(현 육성선수)으로 영입해 정식선수로 전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연고지역 내 고교 출신 선수에 한해서였다. 다른 구단 연고지 출신 선수는 반드시 신인 드래프트에서 지명을 한 뒤 계약해야만 정식 선수로 등록할 수 있었다.


김상진은 마산청강고 출신. 롯데 자이언츠 연고지역 내에 있는 선수였다. 당시엔 각 구단마다 대졸 선수가 즉시전력감이 되던 시절이라 고졸 선수에게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특히 다른 구단의 배팅볼 투수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렇더라도 만약 롯데가 신인드래프트 전에 “우리가 연습생으로 데려가 키우다 정식 선수로 등록하겠다”고 하면 OB로선 속절없이 김상진을 내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1989년 졸업 후 OB에 배팅볼 투수로 들어간 김상진은 매일 경기 전 마운드에 올라 강한 어깨를 뽐내며 싱싱한 배팅볼을 던졌다. 그런데 유독 롯데전을 앞두고는 배팅볼 투수로 나서지 않았다.


“원래 홈경기뿐만 아니라 원정경기에도 1군을 따라다니면서 배팅볼을 던졌는데, 구단에서 롯데 경기 때는 저한테 배팅볼 던지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롯데가 잠실에 경기하러 올 때나 OB가 사직구장 갈 때는 배팅볼을 던지지 않고 심부름을 하거나 훈련 보조 등 잡무만 봤어요.”


김상진(현 두산 퓨처스 육성군 코치)의 얘기다.


그럴 만한 이유는 있었다. 롯데에는 마산청강고 출신 1년 선배 서정용이 있었다. 1988년 롯데에 연습생으로 들어가 1988년 3승3패, 1989년 5완투 포함 5승5패 평균자책점 2.57을 기록하며 쏠쏠한 활약을 했다. 김상진이 롯데전에 앞서 배팅볼을 던지면 그의 존재를 알 수 있는 인물이었다.


결국 OB가 1990년 신인 2차지명 3라운드 차례에서 무명의 김상진을 지명했고, 배팅볼 투수에 대해 관심이 없던 다른 구단 관계자들이 “김상진이 누구냐”며 술렁거릴 수밖에 없었다.


등번호 61번의 김상진 ⓒ두산베어스


김상진은 마침내 꿈에 그리던 정식 선수 유니폼을 입었다. 등번호 61번. 당시만 해도 언제 방출될지 모르는 이름 없는 선수가 다는 번호쯤으로 여겨졌다.


그가 61번을 달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선수가 선택할 수 있는 번호 중 가장 빠른 번호였기 때문이다. 별 볼 일 없던 61번은 훗날 OB 베어스 에이스로 도약한 김상진으로 인해 우리에게 먼저 친숙해졌고, ‘코리안특급’ 박찬호가 달면서 투수들이 선망하는 번호로 탈바꿈하게 된다.


당시 61번 앞에 54번도 비어 있긴 했다. 그러나 54번은 달 수 없는 번호였다. 1986년 세상을 떠난 국가대표 포수 출신 고(故) 김영신의 번호로 OB에서는 누구도 54번을 달지 않았다.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이 번호는 다소 다른 이유로 베어스 역사뿐만 아니라 KBO 최초 영구결번으로 기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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