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오빠 보고 싶어요(2)

“모를 뿐”

by 반야

오빠, 엄마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을까? 정확히 지금도 모른다.
공업고등학교를 나와 대학까지 진학했다. 뭔가 꿈이 있고 열정이 있었기에 대학까지 갔다.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는지, 부모와의 갈등 때문인지 모른다.

수많은 이론으로 이해하려 하지만 정확히 모를 뿐이다.

오빠의 죽음은 내가 공부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여자까지, 대학에 보낼 여유가 없었다.

내 무의식이 좌절, 슬픔을 해결하기 위해서인지 정신과 관련 일을 하게 되었다.
이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난 여기에 없었을 것이다.

나만 불행하고 슬픈 줄 알았다.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는 가족, 당사자를 만났다, 우리는 깊게 알지 못할 뿐 저마다의 고통을 안고 산다는 것을 알았다.

엄마마저 그렇게 갈 때에는 오빠가 갔을 때보다 괴로움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 이유는 뭘까? 나도 얼마 있으면 간다는 것을 알아서 그런 듯하다.
자살은 선택이 아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중중무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모를 뿐이다.

번뇌가 보리라는 말이 있다. 번뇌가 곧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은 주위와 나눌 줄 알게 되고, 돈, 힘, 타인의 인정에 목매지 않게 된다.
현재 주어진 것들이 얼마나 귀중하고 감사한지 알게 된다.
내 것이라고 여겼던 것들도 그것들은 잠시 머물다 가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 어떤 것도 집착하는 마음이 덜하게 된다. 집착하되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갖게 된다.

나는 참 많이 축복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하고 싶은 일, 공부, 지금의 글쓰기 등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진 듯하다. 번뇌는 또 다른 축복이다. 오빠, 엄마가 준 기쁨이다.


그들의 죽음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옆에 있는 사람 탓으로 돌리지 말아야 한다.

또한 자신의 탓으로도 돌리지 않는다.

혹여 미안한 마음이 있다면 참회를 하면 된다. 그뿐이다.


난 오빠를 미워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착한 아들은 아니였다. 그런 오빠에게 “죽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 일이 현실에서 벌어졌다. 나의 그런 생각이 오빠를 죽인 것은 아닌지 자책감으로 나 또한 죽고 싶었다.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나를 인정했다. 오빠에게 그런 마음을 가진 것, 그럴 수밖에 없었던 감정을 수용했다.

싸이코 드라마를 했다. 오빠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우울하고 괴로웠다.


법률스님의 즉문즉설을 통해 죽은 사람을 붙잡고 있는 것은 그들을 좋은 곳으로 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죄를 붙잡고 있는 것도 죄라는 것을 또한 알게 되었다.


또한 죽은 자가 원하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계속된 죄책감과 잊지 못해 우울한 삶을 살고 있다면 그들도 슬퍼할 것이다.


이제야 마음의 평안을 찾은듯 싶다. “엄마, 오빠 잘 살다가 갈게요”, “ 이승에서 당신들과 함께한 삶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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