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무 좋아하는 노래 '거짓말'(작자가 노래를 만들게 된 계기를 들은 후부터는 신기하게 들을 때마다 눈물이 난다)의 원작자이자 싱어송 라이터인 가수 '이적'의 어머니가 쓴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이적의 어머니인 여성학자 박혜란이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이라는 책을 펴냈을 때 (그녀는 집 안이 어질러져 있어야 상상력이 자란다고 믿고 청소나 공부 강요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며 아이들과 온 집안을 뛰어다니면서 총싸움을 하는 것도 모자라 , 고3 아들을 두고 어느 날 훌쩍 중국에 초빙교수로 떠났던 실로 보기 드문 엄마다.) 나는 그 책을 사서 읽고는 저자처럼 미래의 내가 우리 아이와 거실에 있는 기다란 테이블에 함께 앉아 마치 집안에 있는 독서실에서 같이 공부하는 친구 모양 평화로이 학습하는 모습을 꿈꾸곤 했었다,
운 좋게도 내가 생각했던 엄청 길고 커다란 테이블은 아니었지만 우리 집 식탁이 그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고 공부를 그렇게 썩 좋아하는 아드님은 아니었음에도 불구, 책에서처럼 신기하게도 아이는 자기도 뭔가 할 거리를 찾아들고는 내가 공부하고 있는 식탁으로 오곤 했다. 거기에 공부에 적합한 음악까지 잔잔하게 틀어놓으면....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러다 남편이 오면 남편은 참 열심히 한다고 하면서 학교 때 엄마가 하랄 때는 안 하고 이제 와서 공부를 한다고 낑낑거리며 다크서클이 배꼽까지 내려온 내게 '측은함'과 '이해 안 됨' 또 '참 딱함' 뭐 이런 여러 가지 감정이 섞인 목소리로 "야 적당히 해. 네가 지금 회사에 들어간다고 면접을 봐도 사장이 너랑 동갑이고 대학원을 가도 교수가 너랑 동갑일걸. 그게 되겠냐." 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 지나가곤 했다.
맞다. 지금 우리 대학원 교수님 중 두 분이 나랑 동갑이다. 심지어 나보다 어려 보이는 분도 있다.아주점쟁이 나셨다.
공부를 썩 좋아하진 않았지만 공부하는 엄마를 죽을 때까지 응원할 거고 하늘만큼 땅만큼 지지한다는 우리 아들은 남편이 그렇게 쏘아붙이고 갈 때면 "엄마 괜찮아?" 하고 묻곤 했다.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내게 아들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유일한 안식처였다.(물론 가장의 무게를 지신 분이 아니라 그런 것일지도... 그렇게 우리 남편은 내게 돈을 주고 아들은 마음을 주었다)
이렇게 그 어떤 딸보다도 내게 살갑던 아들은 "지금 해줘 봐야 커서 기억 하나도 못한다"라고 '돈 낭비'라며 남편에게 그렇게 욕을 먹으면서도 저축 대신 그 돈으로 지금이 아니면 경험키 힘든 것들을 그냥 뭐하나라도 아이에게 더 경험케 해주고 싶어서 물심양면으로 노력하는 어떻게보면여러모로 참 딱하기 그지없는 '엄마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 사람'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보통 어린아이들에게는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국내외의 그 많은 미술관 박물관들을 아무리 데리고 다녀도 지루하다는 말은커녕 마치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가려고 태어나기라도 한 것 모양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반짝반짝 거리는 눈으로 여기저기 샅샅이 스캔하며 바지런히 돌아다니곤 했다.
그러다 배가 고프면 또 미술관 내에 카페에서 요기를 좀 하고... 그러면 또 그 어린것이 어느새 풀 충전이 되어 이젠 지쳐버려 뭘 먹어도 충전이 더딘 엄마를 어린아이가 끌고 다시 미술관이며 박물관 투어를 이어가곤 했다.
같은 경험이라도 5살 때 느끼는 것과 10 살에 느끼는 것 그리고 15살에 다가오는 느낌은 내 경험상 많이 달랐다. 그래서 나는 내 힘껏 아이에게 그때그때마다 최대한 다방면으로 풍요롭고 다채로운 환경을 경험시켜주어 단순히 책상 위에서 텍스트나 영상 혹은 사진으로만 세상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직접 맛보고 냄새 맡고 만져보고 느끼면서 깊이감 있게 배우게 하고 싶었다.
아무리 기가 막힌 맛을 내는 특급 조미료가 있다 해도 또 실제로 그 조미료가 가성비 갑이라고 정평이 났다고 해도 오랜 기간 명성을 이어온 유서 깊은 가게들에선 몇십 년 전부터 사용해오던 이제는 낡고 닳아 볼품 없어진 도구들을 이용해 심지어 바보 같을 정도로 무던하게 옛 방식을 여태껏 고수하며(사실 지금 마트나 백화점에 가보면 진열대에 빈틈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진열되어 있는 전 세계에서 수입한 온갖 종류의 소스나 조미료 등이 넘쳐남에도 불구)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고 오랜 기간 고생을 하면서 그 가게 만의 고유의 소스나 육수 등을 만들어 쓰는 것을 우리는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시중에 한두 방울이면 간편하게 맛을 내는 감미료 등이 수두룩함에도 불구, 쟁반 가득 수십 가지 재료들을 이용해 소스나 육수 혹은 양념들을 오랜 시간을 들여 직접 만들어 쓰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처럼 비전문가도 오랜 기간을 걸쳐 직접 만든 천연효모를 이용한 빵과 시중에 파는 이스트로 뚝딱 만든 빵의 차이를 한 두 번만 뜯어먹어봐도 느낄 수 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물론 나의 이런 교육방향이 돈이 적잖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남편이 평생을 산 대치동에서 주거비, 생활비, 교육비 등을 지출하는 것에 비하면 같은 돈으로 내가 지향하는 방향의 자녀양육법이 좀 더 이상적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물론 그곳에서 지금 거주하시면서 교육하시는 분들을 비난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우리는 각자 다 다른 얼굴만큼이나 다양한 양육방식을 가지고 있고 나는 그것은 그냥 '샤넬'을 좋아하냐 '루이뷔통'을 좋아하냐 혹은 '로로피아나'를 좋아하냐 '브루넬로 쿠치넬리'를 좋아하냐 처럼 전적으로 '개취'라고 본다. 아 난 둘 다 싫고 '브리오니'가 좋으시다? 것도 대환영이다. 좌우지간 내가 돈대지 않은 이상 우리 모두는 타인의 선택에 대해 왈가왈부를 삼가야 한다.
나름 프라이드도 있고 자존심도 셌던 남편은 급작스럽게 어린 나이에 남자 친구에서 가장으로의 신분전환이 힘들었고 괴로웠지만 그 변환이 아프다고 말하는 성격은 못되었다. 그의 자존심이 그런 것은 용납치 않는 모양이었다. 대신 그 과정에서 생긴 독을 그는 입으로 내게 쏟아내었다.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그럴 때마다 나는 아이에게 의지했다. 칼 마르크스가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 했던가 종교가 없던 내게 아이는 아편 같은 존재였다.
남편은 그런 날 안주 삼아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지곤 했다. 친구 말에 의하면 자기들은 술자리에서 얘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그저 자리에 나타나기만 하면 앉을 때부터 집에 갈 때까지 남편이 내 흉보는 것으로 술자리를 충만하게 채워주므로 자기들은 그저 듣기만 하고 술이나 마시다가면 그만이라고 하곤 했다.
당당한 남편 분은 내가 이 상황을 얘기하자 당당하게 말했다.
"팩트잖아."
"난 거짓말은 안 해."
난 예스 며느리였다. 아버님이 요즘 며느리 같지 않다고 하셨다(옛날엔 그러셨는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셨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시부모님 눈에는 언제나 부족했겠지만 우리 부모님이 귀에 딱지가 앉도록 시부모님께 잘하라고 신신당부를 하신 것이 컸다. 또 하나는 우리 엄마도 며느리가 있고 나도 아들이 있으니 후에 면이 서려면 최소한 나부터라도 시부모님께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내 딴에는 최선을 다했다. 그 덕인지 그나마 고부갈등은 없어서 나는 정말이지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다행이었다.
남편은 시댁에 충실하게 나에 대한 팩트를 전했다.
"엄마 얘 안 먹어 주지 마."
"엄마 얘는 그런 거 싫어해."
"엄마가 그거 줘도 얘는 애 절대 안 먹여."
"몰라, 엄마가 그때 준 거 난 맛도 못 봤어."
고부갈등이 없는 게 신기할 정도다.
그리고 또 밀라노에 오랜 기간 거주하고 있는 남동생이 준 트러플 소스니 트러플 소금이니 트러플 오일이니 내가 아무리 먹어보라고 (우리나라 백화점들에서 본격적으로 트러플 함유 제품들을 판매하기도 전에 내가 밀라노를 갔을 때 사 오든 남동생이 한국에들어올 때 가져오든 벌써 십여 년 전부터 색다른 풍미를 남편도 맞봤음 해서 좌우지간 수번을권했었다.) 내가 아무리 권해도 자긴 관심 없다며 절대 안 먹어놓고는 친구들 모임에서 누군가 트러플 소스 얘기하니까 "그래에? 그게 그렇게 맛있어? 마누라 너 맨날 백화점 다니면서 왜 이런 것 좀 않사왔냐, 좀 사 와봐" 하면서 눈을 반짝거리질 않나 재작년인가는 어딘가에서 고기에 트러플 소금을 찍어 먹으면 맛있다고 듣고 와서는 "그게 궁합이 그렇게 좋다며? 좀 사 와 봐." 한다.
아 뒷목.
이제 나랑 아들은 트러플이 좀 안 맞는 것 같아 먹지도 않는데 혼자만 백숙에도 찍어 먹고 고기에도 찍어먹고 아주 뒤늦게 트러플 사랑이 오지신다.
이러니 아무리 우리 아기한테 귀공자 같은 두상을 물려주었더라도 시부모님과 갈등까지 있었으면 나는 그 가족으로 더 이상 살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없었을 것이다.
팩트를 좋아해서 여기저기 팩트를 방송하고 다니기를 좋아하는 그분은 그 후로도 죽 전국 방송을 즐겼고 나는 그에게 '방송국'이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
어느 날 아이 친구 엄마들과 함께 있다가 갑자기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아서 아이를 엄마들에게 맡겨 놓고 병원을 찾았다. 여러 검사를 해보았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고 의사는 몇 가지 질문을 한 후 '공황증' 같은 정신적 문제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사실 지금이야 무슨 '연예인병'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여러 사람이 겪고 또 공공연히 밝혀 흔한 병명이 되었지만 지금으로부터 9여 년 전엔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
여느 사람들 같았으면 당장 정신과에 가보았겠지만 나는 바보 같게도 정신과에 다니는 엄마, 부인, 며느리, 딸이고 싶지 않았다. 부모님께 말씀드려봐야 해 주실 것이 딱히 없고 난 한 번도 남편과 싸웠어도 친정에 가기는커녕 전화 한 통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일로 걱정 끼쳐드리기가 싫었다.
그래도 남편이니까 내가 남편에게 이 상황을 좀 유화시켜 이야기하자 남편은
"나도 공황장애야 근데 그냥 참으면서 사는 거야."
라며 쓱 가버렸다. 정신과에 다니면 또 트러블이 있을 때마다 "정신과에 다니는 여자라 저런다"며 그것을 꼬투리 잡을 것이 뻔했다. 팩트니까 말이다.
나는 그날로 내 몸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고기를 끊고 녹즙기를 샀다. 암환자 식단이라는 쓴 녹즙을 하루에 3리터씩 밥 대신 먹었다. 마치 녹즙을 먹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하루 종일 녹즙을 짜 댔다. 남편은 여지없이 또 시끄럽다고 난리였지만 나는 그냥 무시하고 짰다.
저 생때같은 애를 두고, 걸핏하면 자기는 먹어도 아무렇지도 않고 남들도 다~~~ 먹고사는 음식이라며 소시지나 햄 등을 주면서 "그럼 이 음식을 먹고사는 사람들은 다 쓰레기를 먹는 거냐!""혼자만 고고한 척 좀 그만하라"라고 내게 쏘아대면서 아토피 아이에게 먹이면 안 되는 음식을 "이런 것도 먹고 저런 것도 먹고 골고루 먹어야 튼튼해진다"며 애한테 진지하게 주는 아빠에게 밤마다 밤새도록 긁어대서 이불에 핏자국이 천지인 애를 맡기고 죽을 수는 없었다.
녹즙기가 일주일을 멀다 하고 고장이 났다. 내가 녹즙기라도 나가떨어질 지경이었다. 그렇게 짜고 고장 나고 고치고 또 짜고 고장 나고 고치고 무슨 명현반응인지 뭔지 온몸이 벌건 발진으로 뒤덮여 한여름에도 긴팔을 입고 다녔던 지옥 같은 십 개월 여를 보내고 나는 숨이 막혀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던 증상과 이별을 고했다.
"네가 무슨 소냐 풀을 그렇게 먹게!.", "한살림 사장이랑 아는 사이냐 유기농 식품 네가 재배과정을 봤냐 어떻게 믿냐.", " 너 같은 호구들 때문에 그런 사기꾼들이 돈을 번다." 빈정거림은 일상이 되었지만 나는 그런 식생활 끝에 숨이 제대로 쉬어졌고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거면 된 거였다. 이후로 내 맘속엔 아주 딴딴한 근육이 한 겹 생겼다.
나는 남편 친구들과 놀러 간 자리에서도 남편 친구들에게 비웃음을 사기 일쑤였다. 그들은 '은근히 돌려 까기'의 달인이었고 '돈도 못 벌면서 눈만 높고 너무 까탈스럽게 굴어서 아이가 더 예민해져 아토피를 악화시키고 무슨 공부를 한다고 어딜 댕기는지 뭘 한다고는 하는데 당최 결과물은 없는 여자....'를 즐겨 도마에 올리던 그들의 단골 안주거리는 수년을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