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님은 시대를 불문하고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만고의 시인이다. 시 향수는 노래로도 불려진다. 그의 산문집이 큰 글자책 내 서가에 주루룩 4권의 전집으로 있다.
문장강화에서 이태준님은 정지용의 비를 읽고 시경을 (詩境) 산문으로 나타냈다고 썼다. 정지용의 글은 글자하나 토씨하나도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 했다. 궁금했다. 집에 오자마자 읽기 시작한게 책의 반 이상인 소묘 부분을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1.소묘
역시나 산문도 시 같다.
아츰에 이마를 든 해바라기 꽃은 오로지 태양을 향해 들거니와 이이는 뉘를 향해 보이지 않는 백금원주를 고요히 것느뇨?
친구들을 만나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한편의 시다
좀생이 별들이 아실아실 추위 타는 밤 밤도 이슥했으니 나오라고 창밖에 大寒이 부른다. 품을 파고 헤치고 드는 봄바람아
모든 사물과 자연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미려한 문장으로 자세히 묘사해 나도 덩달아 직접 본 듯 생생하다. 성당에서 처음 만난 서양인 신부님을 묘사했다.
그의 큰 몸은 무슨 말없는 큰 교훈과 가테서 각가히 범하기는 좀 엄성스러운 까닭이었더니 보기조케 갈라지는 밤빗 수염은 바람을 마지한 무승한 풀의 斜面 같이 황홀하였다.
정지용 시인은 정직하고 다정다감하다.
형님댁에 돌아오면 아이들이 나를 보는 족족 기어올르고 매달리고 감긴다.
그의 시 향수에서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는
그를 수염난 간난이로 부른다고 썼다. 으히힛 으힛 웃음이 났다. 우리 집 남자가 겹쳐졌다. 정지용 어르신의 표현대로 속엣말로 웃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는 제주도 여행을 앞두고 바랑을 사러 나갈 때도 아내와 함께 종로 시장 바닥을 돌아다니고 밥도 사먹는다. 부부애와 우정이란 낫살이 든 뒤에야 둥글어지는것이란다.
덕수궁에서 결혼식 주례를 해주고 버스를 타고 수원 읍내 신랑 집을 갔다. 2 차회로 모르는 술집에 가서 막걸리를 4천여원어치를 마신 후 돈이 없어 모오닝 코트를 벗어 맡겼다. 남자들이 간혹 대책 없을 때가 있다. 멀리는 보나 잠시의 뒤는 생각지 않을 때가 있다.
동네 이발소에 갔다가 노곤하다는 젊은이에게
“젊은 양반이라 거저 아니 자는게로군. 택없이 노곤할이 있나.”
거들다가 젊은이의 솔직한 답을 듣고 이내 아뿔사 뺨이 화끈해지고 애를 데리고 온 젊은 부인 보기가 종시 편편치 않아 부녀자를 가까이 두고 예의에 어그러지는 실언을 한것임에 몸둘바를 모르는 모습이 눈에 본 듯 선연하다. 일상의 소소한 일들이 살았던 시대는 다르나 지금의 우리와 별반 다를게 없어 더욱 친밀감이 든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1902년부터 1950년 이다. 그는 음식에도 일가견이 있다. 생선 종류며 떡 종류도 꿰고 있다.
집 짓는 몽끼에 대한 글은 전문가로 보일 만큼 세밀하다. 박학다식한 묘사와 천재시인만이 가지고 있는 남다른 경지와 솔직함으로 생생함이 배가되어 세계 명작 소설 못지 않다. 아니 더 재미있다.
새소리가 그저 거기서 거긴 꾀꼬리 울음소리까지도 지역마다 다르다고 분별해 묘사한다. 그래 명시를 아무나 쓰나. 읽고 행복한걸로 어디랴.
금강산을 보고 마을로 돌아오니 이 00투성이에서 겨우 개무덤따위 가튼 산들은 날마다 바로보지 아니치 못하게 되고 보니 금강은 마침내 병이냥하게 나의 골수에 비치어 살어질수 업섯다.
모가지 마다 가늘고 기이다랗고 육체를 그리기 위한 것이 아니요 육체 안에 담긴 슬프고 어여뿐 것은 詩하기 위하야 동양화처럼 일부러 얼굴도 가슴도 손도 나압작하게 하고도 유순하게도 서양적 pathetics에 정진하다가 미완성으로 마친 모딜리아니 그림에 나는 애연히 서럽다.
평양길에 동행한 화가 吉의 모딜리아니 화첩을 보고 썼다. 평양에 머물 때엔 평양 사투리로 글이 써진다.
“내가 너무 과장하여 하는 말이 아닐디두 모르갓으나 부녀자들두 초매 끝에 쇳소리 가 난다는 말이 있디만.”
잠꼬대는 고향 충청도 말로 한다고 쓴다. 14세 때에 충청도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남해오월점철에서 부산 통영 진주여행기가 실려 있다.
온 부산이 먹을 것 천지다. 길초마다 생선을 무덱이로 놓고 팔고 생선을 저미어 길에서 회로 팔고 생선배를 쪼기어 창자를 끄내어 말릴감으로 일들 하고 있다.
진주에서는 빠질 수 없는 남강의 촉석루 만고의인 논개의 제사 문화를 소개한다.
2부 기행편에선 선천 의주 평양 오룡배를 거쳐 영랑과 함께 강진을 지나 드디어 제주도 여행길에 오른다.
집을 떠나는 기쁨 그래도 집이 있고 이웃이 있고 어버이를 모시고 처자를 거나리는 사람이라야 오직 가질 수 있는 기쁨이라고 썼다.
다도해를 거쳐 한라산을 향하여 가는 여행 준비에 안해가 더 바삐 구던 것
안해는 아이를 데리고 역에까지 나가 떠나는 것을 기차 안에 자리도 잡아주고 차창 밖에 서서 시간을 기다린다. 호남선 직통 열차는 11시 30분에 떠나는 기적을 길게 뽑던것이었다.
이렇게 나그네 길로 나서고 보면 모든 풍경에 관한 것이나 정욕이나 식욕이나 이목에 관한 것이 모두 싱싱하고 다정까지도 한 것이니 대개는 대단굴지 않은 절제로서 보내고 지나고 그리고 바로 다시 떠나가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3.수필
이사 간 애기능안에서 동네 사람들은 매간에 시세가 얼마며 한평에 얼마오르고 내린 것이 큰 관심거리다. 시인은 그저 꾀꼬리 울음소리와 까투리가 푸드득 날자 장끼가 산이 쩌르렁 하도록 내는 소리 며느리새 울음소리 솔소리 뻐끔해꽃 엉겅퀴송이 달기풀 노오란 보리밭이 아름답기만 하다. 닭이풀꽃을 모아 잉크를 만들어 친구들한테 자랑편지를 써서 보낸다.
시인 눈에는 비도 한가지가 아니다.
뿌리는 비 달리는 비 부의 뜬비 붓는비 쏟는비 그저 오는비 허둥지둥 하는비 축축좋는비 종알거는 비 지나가는비 그러나 11월 비는 건너가는 비다. 2박자 폴카 춤 스텝을 밟으며 그리하여 11월비는 흔히 가욋것이 많다. 벌써 유리창에 날벌레떼처럼 매달리고 미끄러지고 엉키고 또그르 궁글고 홈이지고 한다.
그는 사춘기에 연애 대신 시를 썼다. 사춘기를 훨석 지나서부터는 일본놈이 무서워서 산으로 바다로 회피하여 시를 썼다. 그런 것이 지금 와서 순수시인 소리를 듣게 된 내력이다. 기르고 가르치는것은 어른이 하는 일이나 자라기는 제가 자라는 것이다. 제가 자라서 무엇이 되든지 정치노선에 올라 좌익으로 달리던지 우익으로 달리던지 무슨 힘으로 요새 청년을 내가 막을 도리가 있느냐말이다. 불운한 일제 시대를 지나고 6.25 전쟁이 발발해 그의 일생이 마감된다. 오랫동안 그의 작품들은 빛을 볼수가 없었다.
4.소설-3인
힘것질으는 기적소리 나자 덜그럭 소리나며 기차는 복잡하고 식그러운 남대문 정거장을 떠나 순식간에 용산을 지나 파랗게 맑은 한강을 어느덧 뒤에 두고 더운 바람 헛치면서 남쪽으로 달린다. 최 이 조 3인도 3등실의 한자리를 차지했다. 여름방학이 되어 고향에 가는 세 사람의 이야기다.
그는 어떤 소설가가 평생에 일꾼이 무거운 돌을 옮기듯이 문자를 날렀노라는 문장을 인용했다. 이 산문집엔 고어와 한자가 간간히 쓰여있다.
정지용 산문집 3.4
5.시론과 서평
시가 먼저 울면 안된다. 남을 슬프기 그지없는 정황으로 유도하고 자기의 감격을 신중히 한다. 어머니가 아기를 열 달 동안 배듯 시도 배는 것이다. 상당한 시기를 경과해야 시의 본체가 생긴다. 기다리면서 손질한다.
가람 이병기 –진실함이 읽는이가 평생 교과서로 삼을만하다
송강 정철 –시조 시도 많고 천고에 천재적이다.
김상용-남으로 창을 내겠소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오고가고 나그네 일이요
그대와 잠시 동행이 되고
윤석중-동요집 초생달
먼길
아이가 잠드는걸 보고 가려고
아빠는 머리맡에 앉아 계시고
아바가 가시는걸 보고 자려고
아기는 말똥 말똥 잠을 안자고
흉악무도한 사람이 이 동요를 읽으면 기회가 왔다하면 40년동안 지은 죄를 뉘우치고 어린아이로 돌아가고 싶게 만든다고 한다.
월탄 박종화의 금삼의 피 망향 윤동주에 대한 서평을 썼다.
6.무용 연극 미술평
무용인 조택원에 대해 분수같이 싱싱하고 날렵한 사람, 순수무용 포엠등 춤에 대한 감상문이 있다. 여인소극장의 고향 정어리등의 관람후기를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