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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lololol Dec 19. 2024

스티그마

σ τ ί γ μ α

1장 붉은 것



작은 섬마을은 언제나 평화로웠다. 햇빛 아래 논과 밭은 부드럽게 흔들렸고, 낮은 산자락에는 바람 따라 춤추는 억새가 은빛 물결처럼 일렁였다. 초가집들은 서로 가까이 모여 앉아 있었는데, 누군가 굴뚝에서 연기를 피우면 집집마다 담장 너머로 냄새가 흘러들었다. 가을이면 초가지붕 위로 감나무들이 붉게 물들어 섬 곳곳에 따스한 채색을 입혔다.

새벽이 되면 닭 울음소리가 마을을 깨웠고, 아침이면 엄마들은 머리에 보자기를 동여매고 밭으로 나갔다. 흙냄새와 이슬이 가득한 밭에서 들리는 삽질 소리와 대화는 섬마을의 하루를 시작하는 노랫소리 같았다. 저 멀리 산등성이로 넘어가는 햇살이 노랗게 논둑을 비출 때면, 어김없이 바람은 논둑길을 따라 흘러가며 소박한 이 평화를 품어 안았다. 그러나 이 평화롭고 작은 마을에서 이 아이의 마음은 고요하지 않았다.


소년이 사는 집은 여섯 식구가 모여 사는 작은 초가였다. 흙으로 빚어 만든 벽은 두꺼웠지만, 문풍지가 삐걱거릴 때면 바람은 어김없이 틈새를 찾아 들어왔다. 마당 한쪽에는 커다란 장독대가 있었고, 어머니는 매일 아침 그곳에서 된장 냄새를 맡으며 살림을 꾸렸다.


하지만 이 초가집 안에서의 삶은 따뜻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버지는 저녁이면 항상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셨다. 그날 밤도 어김없이 엄마와 아버지의 싸움으로 이어졌다.



"빌어먹을 것도 없는 집구석!" 


아버지는 술냄새 풍기는 구린 숨을 몰아쉬면서 눈물인지 콧물인지 모를 것을 흘리며 다시 소리 질렀다.

 

"이게 다 니년이 복이 없는 탓이랑께."


술이 오른 아버지는 늘 그렇듯이 아무 이유 없이 엄마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만하쑈잉. 지도 하루 죙일 쌔빴게 일하고 온 거 모르요, 잉?"


엄마는 고개를 숙이고 아버지의 소리를 조용히 받아냈다.


소년은 그런 어머니를 보며 마음 한구석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형제들과 함께 구석으로 몰려 앉아 손을 맞잡고 있었다. 형이 나지막이 말했다.


"야야, 우리 그냥 가만히 있어라잉. 우덜이 뭐라 하면 더 난리 난다께."


소년은 눈물을 꾹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도 아침은 똑같이 시작되었다. 엄마는 새벽부터 밭으로 나갔고, 소년은 교실로 향했다. 학교는 마을 끝자락에 있는 작은 건물이었는데, 두세 개의 교실이 전부였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삐걱거리는 나무 의자에 앉아 선생님을 따라 수업을 들었다.


음악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풍금 앞에 앉아 아이들에게 동요를 가르치고 있었다. 풍금 소리가 교실 안을 가득 채웠고, 햇빛은 창가에 빗겨 앉아 아이들의 얼굴을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


"새싹은 자라고 나뭇잎 푸르러~"


선생님이 연주에 맞춰 부르자 아이들이 따라 노래했다. 소년도 작게 입을 열어 가사를 따라 하려 했다. 그런데 노래를 부르려던 그 순간, 목인지 입안인지 모를 곳에서 이상한 느낌이 올라왔다.


처음엔 침이 고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뜨겁고 맛이 비렸다. 점점 차오르며 소년의 목을 막아왔다. 소년은 억지로 삼켰다. 그러나 목으로 차오르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몰래 손가락을 입안에 넣어 찍어 보았다.


손끝에 묻은 것은 붉은 피였다. 소년은 깜짝 놀라 손을 멈췄다. 풍금 소리와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멀어지며, 모든 소리가 희미해졌다. ‘왜 피가 나재? 나가 어디 다쳤었나? 어째 이러는 거여?’ 소년은 입을 틀어막으며 피를 삼켰다. 하지만 피는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나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소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교실 뒤쪽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수돗가에 도착한 소년은 두 손으로 입을 벌리고 고개를 숙였다. 참아왔던 것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시뻘건 피가 수돗물과 함께 흘러갔다. 소년은 손으로 볼을 꾹꾹 눌러가며 어떻게든 피를 멈추려 했다. 어금니 쪽 잇몸을 볼로 세게 누르면서 피는 점점 줄어들었고, 마지막으로 엉긴 피가 나오고 나서야 멎었다.


소년은 수돗가에 엎드린 채 한참을 있었다. 흘러내리는 물소리는 멈출 줄 몰랐고, 그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멀리서 새들이 짧은 울음소리를 내며 하늘을 날고 있었지만, 소년의 마음속은 그 소리를 담을 여유가 없었다.



그날 밤, 초가집 안의 작은방. 소년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었지만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수돗가에 쏟았던 피와 손바닥에 묻었던 붉은 얼룩이 계속 떠올랐다. 창밖에서는 논둑길을 따라 바람이 지나갔다. 그 바람은 섬의 풍경 속에 잔잔히 스며들었지만, 소년의 마음은 더 큰 불안으로 휩싸이고 있었다. 


소년은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째 나한테 이런 일이 생겼을까잉? 내가 뭐슬 잘못해갔고...’ 그 순간부터, 소년은 자신의 마음속에 두려움과 불안을 입고 자라는 또 다른 자신을 느끼기 시작했다. 밤이 평화롭게 소년의 이불 위에도 가라앉았지만 그 이불을 꼭 잡고 있는 손톱에 붉은 피가 굳어 때처럼 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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