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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닉 Jun 09. 2024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패러디와 패스티쉬의 사례, 포스트모더니즘 속 모방

모방은 언제나 그의 대상이 되는 이미지를 소진한다. 조금 더 엄밀하게 표현하자면 모방이라는 행위는 대상을 보는 방식을 한 방향으로 고정하며 감각되는 경로를 차단한다. 가능성의 차단이 일어난다. 일례로, 무언가를 말로 묘사하는 것 역시 모방의 성격을 가진다. 혹은 세계의 거대한 모방이 결국 언어적 묘사이다. 여기서 언어로의 그림이 차마 포착하지 못하는 지대 또한 언제나 존재한다. 그러한 지대가 존재하는 이상, 언어는 그가 구사될 때마다 조금씩 전체와 멀어지고 있는 셈이다. 문장을 통해 무언가를 규정하는 순간 비언어적인 요소들은 생략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문장을 통해 세상을 보고 감각하는 방식을 학습할 이들이 늘어날수록 생략된 비언어적 요소들은 더더욱 감각되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막간에 이르러서 그것들이 우연히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더라도, 언어의 체계 내에서 견고해진 다른 요소들에 비해 그 비언어적 요소가 주목받을 가능성은 미약하다. 대립의 구도가 언어와 비언어의 대립에서 모방이 강조하는 부분과 그가 놓치는 부분의 대립으로 옮겨갔을 뿐, 같은 논리로 대상의 모방은 대상의 일정 부분이 읽힐 가능성을 차단한다. 반면 예술은 이러한 편협한 평면화의 경향에 저항하는 움직임이다. 예술은 언제나 감각되지 못하는 것이 감각될 수 있도록, 과학과 언어가 은폐하는 세계의 나머지 부분을 다시금 드러내며 존재하게 만들어 왔다. 만약 예술이 무언가를 모방한다면 그 모방은 단지 언어적으로 그것을 되풀이하고 그 영역을 제한하는 것이 아닌, 기존 언어적 경계를 부수고 새로운 가능성 – 감각되지 못하던 대상의 부분을 노출하는 형태의 모방일 것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패러디와 패티시즘의 차이점을 찾을 수 있으며, 그 차이점으로 인해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에 이르러서야 예술적 모방이 가능해졌다고 본다.


먼저 이미지를 소진하는 모방의 사례인 패러디를 살펴보자. 패러디는 언어적 약속을 전제로 진행된다. 표준 언어와 일상적 회화가 존재하기에 그와 차별되는 스타일 또한 나타날 수 있다. 여기서 패러디는 차별되는 스타일을 다시금 거대한 표준 언어의 줄기에 병합하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패러디는 차별성을 제외한 다른 요소들을 생략한다. 오로지 차별성만을 강조하는 모방 속에서 대상에게는 그 차별적인 요소만이 남게 된다. 그리고 모방의 반복을 거쳐 그 요소마저도 일상적인 것이 되는 순간 차별성은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다. 모방과 패러디의 과정에서 대상 내의 다른 요소는 발견되고 감각될 가능성을 박탈당한다. 그것이야말로 고유성을 가지는 무언가를 향해 패러디가 가하는 가장 모욕적인 조롱이다. 반대로 패스티쉬 속에서 모방은 전혀 다른 효과를 낳는다. 달라진 것은 표준 언어의 부재뿐이며, 모방은 똑같은 형식으로 일어난다. 그럼에도 패러디와 달리 패스티쉬는 대상을 소진하지 않는다. 혹은, 소진될 대상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존의 모방은 일상적 언어에 종속되어 있었기에 비슷한 방향성을 보였으며, 따라서 반복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모방은 반복되지 않는다. 대상을 보는 방식은 기존의 모방이 그러했던 것처럼 제시되며 그 과정에서 일부분의 생략 역시 일어난다. 그러나 생략된 일부가 망각에 이를 만큼, 그리고 제시된 보는 방식과 감각하는 방식이 고정될 만큼의 영향력을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의 모방은 행사하지 못한다. 패러디와 같은 모방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 모방이 같은 대상을 같은 언어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그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물론 표준 언어, 일상적 회화, 언어적 기준의 존재였다. 그러나 더 이상 그러한 언어의 통일성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에 따라 포스트모더니즘의 모방, 즉 패스티쉬는 다시금 고유한 것이 된다. 소진 또한 일어나지 않는다. 대상의 소진과 같은 일방향성 영향은 선형적인 시간성이 붕괴하며 불가능한 것이 되었다. 패스티쉬는 패러디와 달리 대상 이후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패스티쉬는 분명 특정 대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그를 모방한 것이기는 하나, 패스티쉬와 그 대상은 언제나 양립한다.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방부의 아카이브는 패스티쉬를 접한 후에도 다시금 대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 비시간적, 혹은 정신분열적 여행 속에서 패스티쉬와 원본, 둘의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의 일부를 은폐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패스티쉬와 패러디 모두가 죽은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이라 표현한다. 이는 반은 맞으나, 반은 틀리다. 둘은 모두 죽은 언어를 다룬다. 그러나 패러디는 언어를 죽이는 결과를 낳은 반면, 패스티쉬는 죽은 언어를 다시금 살아 움직이게 한다. 그 부활의 작업에 대해서는 다음 문단에서 상세하게 다루겠다.


현대에 들어와 언어의 죽음은 더욱 만연해졌다. 모든 흐름이 가속화되며 향유되는 언어의 교체 또한 가속화되었다. 그 흐름 속에서 뒤처진 언어들은 자연스럽게 감각되는 법 또한 망각되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 현대의 아카이브는 모든 대상을 물리적으로 방부 처리한다. 그들은 물리적으로 죽지 못하며, 오로지 보는 방식의 죽음만을 맞이한다. 활자가 돌에 새겨져 있으나 누구도 그것을 읽으려 하지도, 읽지도 못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러한 언어의 현대적 죽음 앞에서 패스티쉬와 모방은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모방은 어떤 방식으로든 대상을 보는 방식을 제공한다. 패스티쉬는 이제는 독해될 가능성을 상실한 대상이 - 비록 그것이 새로운 방식이더라도 – 다시금 읽힐 수 있게끔 만드는 일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성실하게 그가 인용하는 대상들을 다시금 감각시키며, 죽은 언어를 통해 새로운 감동을 전달한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왕가위의 화면들이 <화양연화>의 이미지를 소진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신, 그 화면들은 그의 스타일이 그의 영화들 바깥에서 어떤 새로운 방식으로 향유될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그것은 조롱보다는 일종의 존중이며 존경의 표현이다. 쿵후 영화는 이제 죽은 언어다. 그러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쿵후 영화에서 느낄 수 있었던 감흥을 다시금 되살려내는 데에 성공한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앞서 언급한 쿵후 영화, 왕가위의 영화들, 심지어는 숏폼 이후로 빠르게 잊힌 2010년대의 유튜브 영상들까지, 죽은 언어들을 한 군데에 모아 다시금 움직이게 만들며 포스트모더니즘 예술 속에서 모방이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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