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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닉 Sep 01. 2024

이데올로기와 영화 그리고 신체

장치 이론과 현상학적 영화이론

보드리가 장치 이론을 통해 할리우드가 이데올로기를 전달하면서도 그 사실을 은폐한다는 점을 지적한 바는, 영상 매체가 신체와 더더욱 밀접하게 그리고 다각도로 관계 맺게 되는 현대에 들어오면서 새로운 유효성을 획득했다. 이 글은 보드리와 유사하게 영화를 현상학적 관점으로 접근하려 한 학자들의 이론을 아주 간략히 살펴보며, 영화적 예시에 그를 적용시켜 결국 영화를 본다는 것이 이데올로기의 영향 아래에서 실행되는 일종의 신체적 훈련이 되었는지, 어떻게 그러한 양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지를 다루어보겠다.


먼저 이데올로기 신체 훈련의 예시로는 블록버스터의 서사적 전율이 있다. 마크 헨슨은 뉴 미디어를 두고, 메를로-퐁티를 인용하며 습관은 현상학적 신체가 재배열되고 갱신되며 형성되는 것이라 말한다. 뉴미디어 아트는 이러한 현상학적 신체의 재배열과 갱신을 통해 신체의 새로운 습관을 배양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학적 접근은 단지 뉴미디어 아트에만 적용되는 것 이 아니며, 오히려 현대 할리우드 영화의 영화 장치적 성격을 설명하는 접근 방식으로 읽힐 수도 있다. VR 아트에서 참여자의 경험은 뇌와 인터페이스의 상호작용을 통해 체화된다. 블록 버스터의 서사 구조에서 가장 유의미하게 드러나는 공통분모는 바로 반전이다. 누가 악당인지, 누가 범인인지를 끊임없이 스크린의 이미지들을 단서 삼아 추리하는 것은 관객의 몫으로 할당되며, 그 지점에서 교묘하게 예상을 빗겨나가는 것이 블록버스터 서사의 역할이다. 여기서 관객의 뇌는 스크린에 영사되는 이미지 정보들을 흡수하며 물질적인 작용을 하는 한편 반대 방향으로, 미래에 다가올 이미지를 상상하고 그 자리에 가져다 놓음으로써 비물질적으로 스크린과 상호작용한다. 이러한 뇌의 예측-정보화 습관은 관객이 가상으로 가져다 놓은 비물질적 이미지의 자리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상이한 이미지가 물리적으로 나타나며 느껴지는 전율-몸을 타고 흐르는 카타르시스를 통해 관객의 신체에 체화된다. 이러한 뇌와 스크린 사이의 추리 게임은 관객이 평소 미래를 예측하는 방식 속에 할리우드의 서사화 과정과 서사 구조를 각인시키며, 그를 통해 이데올로기 체제 특유의 시간과 서사 관념을 관객의 습관으로 만든다. 서사 예측 훈련과 그 구조는 동일하지만 조금 더 강렬한 예시로는 공포 영화가 존재하는데, 공포 영화의 점프 스케어 역시 관객으로 하여금 다가올 이미지와 그의 등장 시간을 꾸준히 예측하게 만들며 그 과정에서 그들의 신체를 긴장 상태로 만든 후, 예상치 못한 시간에 그 이미지를 등장시키거나 등장시키지 않음으로써 단어 그 자체로의 점프를 유도한다. 이 경우 서사 예측 과정보다 조금 더 물리적인 체화가 일어난다. 현대 할리우드에서 유일하게 기능하는 장르물이 공포 영화라는 점과, 그들 대부분이 점프 스케어 기법에 크게 의존한다는 점은 점프 스케어 역시 영화적 이데올로기 훈련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영화는 존재하지 않는가? 비비안 솝첵은 라캉의 이론 속 주체가 가시화되는 신체를 오인하는 경험 대신, 메를로-퐁티의 이론에서 살의 주체가 이미지를 재인하는 경험을 영화적 경험이라 규정한다. 그의 시각에서는 장치 이론 또한 부정되는데, 살의 주체로서의 관객은 스크린에 영사되는 이미지들로 자신을 형성하는 것이 아닌, 그 이미지들을 통해 관객의 신체가 경험한 것을 재인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림자 삼부작> 은 우리의 신체가 그림자와 맞닿으며 경험했을 여러 순간을 재인시키는 영화다. 그림자를 만지는 손, 그림자를 보는 눈, 그림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두 신체 등, 스크린에 나타나는 그림자가 신체를 통해 체험되며 느껴졌을 빛의 부재의 감각은 스크린의 것을 관객의 것으로 오인하는 대신, 거기에서 자신의 신체가 경험했던 것을 다시금 비슷한 형태로 경험하기를 유도할 뿐이다. 그곳에는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들어설 자리가 없으며 오로지 느낌만이 존재한다.


스스로 판단 중지를 요청하는 이미지들은 분석이 불가능한 형태를 제시하며, 몸의 체화가 군 사적 훈련이 아닌 일종의 놀이로서 기능하게 한다. 여기에 탈이데올로기적 영화의 대안이 존재한다. 이데올로기적 영화는 신체와 뇌를 재구성하려 하고, 그를 학습시키려 하지만, 위 예시와 같은 영화들의 이미지는 관객의 신체와 밀접하게 상호작용하면서도 어떠한 학습 효과나 재구성 기능도 수행하지 않는다. 이미지는 신체와 감각에 유예되며 신경에 저장되지 않는다. 스트로브 위예가 끊임없이 텍스트로부터 이탈해 물질성에 도달하려고 했던 시도 또한, 그들이 탈이데올로기-신화적 영화에 도달하려고 했던 인물들임을 고려한다면 적합한 예시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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