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출되는 민중들
왕빙의 영화는 ‘유령의 육체’를 촬영한다는 점에서 태생적인 모순성을 지닌다. 그의 프레임 내에 있는 것은 사회 바깥의 존재들이다. 그들은 자본과 언어 바깥에 존재하며 (<이름 없는 남자>), 이성 바깥에 존재하고 (<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제도 바깥에 존재한다. (<미세스 팡>) 그런데 그들은 왕빙의 이미지 중심에 놓여 있다. 여기에 자칫 위험한 오해를 낳을 수 있는 모순점이 존재하는데, 왕빙의 영화에서 내부적으로는 중심을 이루는 존재들이 실제로는 중심과 아득히 먼 지점에 위치한다는 점이다. 왕빙은 가시성 바깥의 존재들에게 카메라를 비추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자들에 경청한다. 그렇다면 그의 영화는 약자의 외형만을 재현하며, 그로부터 약자성은 지워버리는, 즉 민중을 사라지게 만드는 이미지인가? 혹은 그들에게 인간성을 다시금 부여하는 숭고한 작업인가? 해당 글은 <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를 통해 그의 이미지가 가지는 윤리성을 탐구해 볼 예정이다.
왕빙에게 먼저 주어지는 것은 인민의 신체 그 자체이다. <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에서는 정신병동 환자들의 육체가 영화의 중심을 이룬다. 이들의 육체는 체제에 의해 벌거벗겨진 신체이며, 물리적으로는 인간의 형상을 띠고 있으나 인간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는 않는다. 체제는 그들에게 약을 강제로 복용시키며 환자들을 동물과 다를 바 없이 취급한다. 환자들의 벌거벗은 육체, 동물적인 신체는 이해될 수 없기에, 그 자체로 소수자성의 증언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왕빙의 이미지 속 인물들은 이해의 바깥에서 출발한다. 그는 이미 사라진 민중들의 형상으로부터 출발한다. 거기서부터 왕빙은 인내심을 가지고 인물들을 뒤따라간다. 알렉산드로 코스탄조는 왕빙의 영화를 설명하기 위해 ‘전진의 원리’라는 개념을 창안한다. 왕빙의 카메라는 언제나 피사체와 언제나 거리를 두고, 그를 뒤따라가며 서서히 전진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왕빙이 인물들의 뒤에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즉, 그의 영화는 과정의 영화이다. 카메라가 정신병동 환자들을 따라 복도를 배회할수록, 서서히 그들의 육체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이던 인간성이 드러난다. 영화가 끝나갈 때쯤, 정신병동에서 철창 너머로 사랑을 나누는 환자들, 가족과 면회하는 환자들을 보고 있자면, 관객은 그들 또한 자신과 동일한 인간이라는 환상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그의 영화는 천천히 전진하며, 벌거벗은 신체들, 동물의 것과 다름없는 것처럼 보이는 신체들에 남아있는 인간성이 간혹 출현하는 장면들을 포착하는 과정인 셈이다.
왕빙이 시간을 두고 육체를 따라가며 그로부터 인간성을 노출시킨다는 점은 정작 실제 세계에서 그 누구도 그의 작업의 중심에 위치하는 존재들에게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실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재현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러한 지적은 왕빙의 영화가 관객의 육체와 적극적으로 관계하는 작업물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왕빙의 영화는 피사체의 육체를 바라보는 눈의 자리에 관객의 눈을 위치시킨다. 왕빙은 그의 이미지들에 일절 개입하지 않으며 그들을 단지 뒤따라가기에, 그는 관객보다 그 이미지들을 조금 먼저 접한 또 하나의 관객에 불과한 존재가 된다. 왕빙의 걸음은 관객의 걸음이 된다. 말하자면, 왕빙과 관객은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서 함께 전진하는 것이다. 그는 일차적으로 민중의 신체가 증언하는 약자성을 탐지하면서도, 그로부터 체제에 의해 거세된 인간성을 다시금 회복시키려 든다. 이는 단순한 시각 작업이 아닌, 디디 위베르만이 지적하듯, 명상과 같은 하나의 운동이자 행위이다. 그리고 왕빙은 그 숭고한 행위에 관객을 그에 동참시킨다.
이렇듯 단순한 이미지적 재현에서 그치지 않고, 관객을 윤리적인 운동에 참여시키는 왕빙의 작업들은 분명 민중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 작업들 중에서도 돋보인다. 현실을 충실하게 사실 적으로 포착하면서도, 그를 본다는 행위까지가 하나의 윤리적 운동이 될 수 있게끔 하는 왕빙의 테크닉은 영화의 재현 이미지의 고질적인 관음증 포르노그래피 문제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에서도, 분명한 진보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