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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닉 Oct 25. 2024

<너는 나를 불태워>

불가능성에 대해 미래의 언어로 응답하기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빅토르 클렘페레는 제3제국의 언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희생자들을 퇴화시키는 학대자들의 언어, 나치가 구사하는 언어를 독일 국민뿐만이 아닌 유대인들도 동일하게 구사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하위주체를 침묵시키는 언어와 이데올로기는 헤게모니로부터 배제된 하위주체들의 사고체계마저 잠식했기에, 그들은 침묵 외의 방법을 떠올리지 못한다. 이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이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하위주체가 그 자신을 침묵시키는 언어체계를 뛰어넘어 목소리를 낸다 한들, 제국의 언어를 구사하는 나머지 사람들은 그가 말하는 문장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스피박과 디디 위베르만을 경유해 침묵-깨기의 세 단계를 분류해 보자. 하나, 침묵당한 자들에게 말을 걸기, 그들이 목소리를 내게끔 하기, 그로써 보편적인 언어 속에서 이질적인 음성을 발화시키기. 둘, 그 목소리가 해독 불가능한 웅얼거림으로 들려올 때, 그로부터 어떠한 불가능성을 감지하고 절망하기. 셋, 그 불가능성을 (불) 가능성으로 인지하고, 미래의 언어를 모색하기. 고다르와 고랭의 <만사형통>부터 사티야지트 레이의 <겁쟁이>까지, 이런 하위주체의 목소리 내기 문제를 다루는 많은 작품들은 둘에서,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시화하는 데에서 끝난다. 그러나 그러한 불가능성의 자각은 어떠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한다.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그것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함에도 존재하는,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불가능성이 (불) 가능성으로 변화하는 희망적 증언이다. 이러한 논지에서, 마티아스 피녜이로의 퀴어 영화이자 여성영화인 <너는 나를 불태워>와 그의 원전인 체사레 파베세의 <바다거품>의 비교는 셋에서 언급된 ‘미래의 언어’ -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증언의 형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너는 나를 불태워>에 등장하는 기이하고 난해한 몽타주 시퀀스는 다문화적 영화(intercultural cinema)가 제시하는 탈-제국주의적 문장들과 닮아있다. 그 도래하지 않은 언어를 위한 문장의 몽타주는 그것의 발화가 불가능함에도, 그리고 그것이 아직은 독해될 수 없음에도, 그곳에 존재한다.     


[<바다 거품>]

먼저 <너는 나를 불태워>의 원전 <바다 거품>부터 살펴보자. <바다 거품> 속 브리토마르티스는 그녀를 강간하려던 신으로부터 도망치려 절벽에서 뛰어내린 요정이다. 실존했던 동성애자 시인 사포 또한 자살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내렸다. 둘은 그들이 남성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바다로 투신한 순간 물결 위로 일어난 바다거품, 그리고 우라노스의 잘린 성기가 바다에 떨어지며 일어난 바다 거품으로부터 태어난 아프로디테의 신화를 포개어 이야기한다. 아버지의 성기를 자르는 것, 남성적 시각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이 흡사 제국주의적 역사를 탈구시키는 다문화적 영화 방법론의 은유처럼 다가오듯, <바다거품>은 남성들이 기술한 신화 속 성별과 사랑의 지식을 남성의 서술 방식으로부터 탈구시키려는 작업이다. 성과 사랑을 둘러싼 문화적 지식의 의인화인 사랑과 성별의 신 아프로디테는 우라노스의 성기가 잘린 이후 솟아난다 - 그러나 여기서 파베세는 남성 권력으로부터 탈구된 지식이 다시금 남성적 언어로 서술되며 사라져 버릴 것을 생각하며, 벗어남의 과정까지 만을 다룬 채, 그 이후를 공백으로 남긴다. 그가 남긴 공백은 제국의 서술 방식이 사라지게 한 하위주체들의 자리가 채워질 수 없음을 증언하며, 그곳의 드러남의 불가능성 앞에서 – 둘, 좌절한다. 탈-이데올로기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너는 나를 불태워>]

피녜이로는 이 소설을 영화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파베세로부터 나아가 남성 권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여성/퀴어 서술 방식, 미래의 언어이자 도래하지 않은 언어를 영화 속에서 건설하려 한다. (intercutural cinema의 특성이 나타나는 지점) 파베세가 <바다 거품> 속 남성적 시각에서 해방된 성과 사랑의 지식의 자리. 즉 미래의 지식의 자리를 공백으로 남기며 탈-이데올로기적 문장의 불가능성을 탐지하는 데에서 그쳤다면, 피녜이로는 그 빈자리에 미래의 언어로 쓰인 문장들을 기입한다. “너는 나를 불태워”(tu me abraxas)라는 문장에서 각 단어마다 그는 하나의 이미지를 접속시키고, (tu, 손, me, 모래, abraxas, 바다) 이미지와 접속된 각 단어들을 지워버린 채 침묵 속에서 단어들에 대응하는 세 개의 이미지를 섞는 방식으로 문장을 재구성한다. 너와 나, 두 명의 사람, 그리고 불태움이라는 사랑의 행위는 무작위적으로, 앞과 뒤로, 무성애적이며 양성애적이고, 동성애적이며 이성애적으로 접속한다 – 문장의 의미를 알아듣기란 불가능하다. 그의 난해한 몽타주는 다문화적 영화의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검은 화면처럼 지금의 언어로는 하나로 읽히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그 문장의 이해될 수 없음은 불가능성을 증언하는 대신, 독해 (불) 가능성의 상태로 남는다. 그것의 형체가 하나의 문장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은 불가능한 문장이나, 그곳에 있다. 무엇보다 그는 언젠가 도착할 희망적인 독해법만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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