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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닉 Jul 12. 2023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과 형식 기반의 작은 인식론

고등학교 2학년, 진로 TED 수업용 대본 (미완성)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에 대해서 50분간 강의하겠습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의 철학자죠. 1900년대에 활동했고. 20세기의 가장 독창적이고 중요한 철학자 중 하나로 많이 꼽히는 사람입니다. 언어를 통해 철학의 모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철학자.



그의 사상은 보통 전기, 후기로 나뉩니다. 전 후기. 특이한 점은 전기와 후기의 철학이 완전히 상반된다는 겁니다. 중간에 생각이 한번 바뀝니다. 보통의 철학자들은 초기의 사상이 후기까지 이어지는데, 비트겐슈타인은 후기의 철학이 전기 철학을 반박해요. 전기를 대표하는 책은 <논리 철학 논고>, 전기와 후기 그 사이 과도기가 나타난 책은 그의 강의록인 <청색 갈색 책>, 후기 철학을 대표하는 책은 <철학적 탐구> 가 되겠습니다. 그 외 그가 암으로 사망하기 직전 몰두했던 앎과 확실성이라는 주제를 다룬 <확실성에 관하여> 등이 있고요. 오늘은 <논고> 와 <탐구> 를 통해 전후기 철학을 간략하게 배워보고, 수업에서 알아본 것들이 우리의 인식에 어떤 식으로 적용되는지 탐구해봅시다.



일단 <논리 철학 논고> 를 살펴봅시다. <논고> 라고도 줄여 부르죠. 이 책을 내고 비트겐슈타인은 스스로가 철학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면서 철학을 접고 산골마을로 들어가서 초등교사가 됩니다. <논고> 는 7개의 명제, 그 7개의 명제를 뒷받침하는 525개의 개별 명제로 이루어진 책인데요. 분류는 보통 이런 식으로 합니다. 챕터처럼. 존재론, 그림이론, 철학론, 논리론, 과학론, 신비주의, 그리고 마지막 6.53 ~ 7 번 명제. 그 중에서 전기 철학의 핵심이 되는 건 언어에 대한 그림이론, 논리학의 영역인 진리함수이론, 그리고 <논고> 자체의 핵심인 6.53 ~ 7번 명제가 있습니다. <논고> 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우리가 품고 있는 대부분의 철학적인 문제들은 헛소리라는 겁니다. 형이상학, 정신분석학 등등의 문제들은 다 언어의 잘못된 사용으로 만들어진 가짜 문제들이란 거죠. 법은 객관적 정신의 즉자적 현실화인 저차원의 단계의 것으로서, 참다운 자유를 목표로 하여 도덕의 단계, 다시 도의태의 단계로 변증법적인 발전을 하여 간다. 이 도의태의 단계에서 정신은 사랑의 공동체인 가족으로부터 그것의 부정인 개인주의적 이익 공동체로서의 시민사회로 전진하고, 다시 시민사회의 부정을 매개로 하여 국가라는 최고의 단계에 변증법적으로 발전하여 간다. 이 국가라는 완성 단계에서 정신은 완전한 자기실현을 얻는다. 이러한 복잡한 문장들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게 당연하다는 거예요. 이러한 문제들의 해답은 이 세계 내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것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쓸데없는 짓이라는 겁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 를 통해 우리 세계의 영역을 확실히 하고자 합니다. 바로 언어를 사용해서요.


그림이론을 봅시다. <논고> 는 언어가 세계에 대한 그림을 그린다고 주장합니다. 언어가 세계에 대한 그림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그에 따라, 언어와 세계는 1대 1 대응관계를 이루며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라고 기술합니다. 일단 세계에 대해, 1 ~ 2.063 명제를 통해 <논고> 는 존재론을 다룹니다. 1번,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 1.1번,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다. 1.13, 논리적 공간 속 사실들이 세계이다. 우리 세계를 그려보면, 일단 가장 원자적인 ‘대상’ 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대상과 대상의 관계인 ‘사태’ 가 존재하죠. 그 모든 사태들이 ‘사실’ 을 이루고, 사실이 곧 세계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논리적 공간이라는, 모든 사태들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무한한 배경 위에서 벌어지고요. 이 교실을 떠올려봅시다. 책상이라는 대상, 연필이라는 대상, 칠판이라는 대상, 벽, 바닥, 천장 등의 대상들이 있죠. 하지만 단지 이 모든 대상들을 모아놓는다고 해서 그게 이 교실을 이루지는 않잖아요. 사태가 일어나야 합니다. 칠판은 벽에 걸려있고, 연필은 책상 위에 있고, 책상은 바닥 위에 있고, 등등등. 그 모든 사태들이 모여, 사실, 즉 이 교실이라는 세계를 이룬다는 겁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도 이렇게 대상과 대상들의 관계인 사태들을 모두 합해놓은 사실로 존재한다는 것이 <논고> 의 존재론입니다. 아까 언어가 세계에 대응하고, 그에 대한 그림이라고 했죠? 그림이론에서는 언어 또한 이렇게 대상 - 사태 - 사실 과 같은 형태를 띕니다. 우리는 대상에게 이름을 붙이죠. 모든 대상들에게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름과 이름의 관계를 언어에서는 요소명제라고 칭합니다. 요소명제는 사태에 대응하겠죠. 그리고 요소명제들의 모음인 복합명제가 곧 언어를 이룹니다. 언어에서의 복합명제는 세계의 사실과 대응하고, 곧 언어는 세계에 대응하게 되죠. 아까의 예시를 다시 가져오면, 우리가 언어를 통해 이 방을 묘사할 때 칠판, 벽, 책상 등등의 이름들을 사용하죠. 하지만 이름만 있으면 되는게 아니고, 벽에 칠판이 걸려있다, 는 요소명제가 필요합니다. 이 모든 요소명제가 곧 이 방의 언어적 묘사라는 복합명제를 이룹니다. 언어가 세계에 대한 그림을 그리는 거죠.


그렇게 언어의 한계가 곧 우리의 세계의 한계이고, 세계에 대응되지 않는 문제들, 예를 들면 윤리나 도덕처럼 대상 혹은 요소명제에 대응시킬 수 없는 것들은 우리 세계 내에 속해있지 않으므로 언어를 통해 이를 다루는 것은 아무런 의미 없는 행동이라 <논고> 는 주장합니다. (신은 정의롭다. 와 같은 요소명제들은 대상들이 우리 세계 속에 있지 않기에 진위를 떠나 그에 대한 기본적인 토의마저도 아무런 의미를 창출하지 못합니다. 정의 같은 개념들은 세계 외부에서 세계를 관찰하고, 어떠한 판단을 내린 결과이기에) 그러한 연고로 비트겐슈타인은 <논고> 에서 이렇게 언표합니다. 6.41, 세계의 뜻은 세계 밖에 놓여있지 않으면 안된다. 6.421, 윤리는 초월적이다. 그렇게 결국 6.45, 언표될 수 없는 대답에 대해서는 물음도 언표될 수 없다. 수수께끼는 존재하지 않는다. 5.61,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우리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한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잘못된 사용을 통해 이 세계 속에 존재하지 않는 문제들, 즉 세계에 대응하는 언어의 영역 내에 존재하지 않아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주장합니다. 그림이론에서는 우리는 언어가 세계의 그림을 그리고, 그에 대응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진리함수이론은 앞에서 말한 언어의 문제들, 철학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언어를 명확히 해야 한다 주장합니다.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대신, 철저히 논리적인 기호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거죠. 요소명제는 사태의 일치 여부에 따라 참 또는 거짓이 됩니다. 내 손 위에 사과가 존재한다라는 요소명제는 거짓이죠. 복합명제는 요소명제들의 모음이니, 복합명제의 진리값은 요소명제에 달려있죠. 비트겐슈타인은 진리표를 통해 요소명제의 참 또는 거짓에 따른 여러 복합명제의 진리치를 정리합니다. 이 부분은 언어학보다도 논리학의 영역에 가까우니 간략히 하겠습니다. 이 표에서 p나 q라는 요소명제의 진위여부와 관계없이 항상 진리가 되는 항진명제 (p->p)&(q->q) TTTT, 항상 거짓이 되는 항위명제 (p->~p)&(q->~q) FFFF 가 있습니다. 명제를 아직 배우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명제란 논리적인 증명을 통해 참 혹은 거짓으로 판명날 수 있는 문장이죠. 예를 들자면,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같은 문장이요. 아무튼, 이 둘을 다루는 학문이 수학과 논리학이며, 나머지 요소명제 p나 q의 진위에 따라 진리치가 달라지는 복합명제들은 과학에 의해 다루어진다고 <논고> 는 규정합니다. 이러한 복합명제 이외의, 나는 ㅇㅇ을 사랑한다 등의 논리적인 증명을 통해 참 거짓이 판단 불가능하여 진리치를 따질 수 없는 명제들은 전부 가짜명제이며, 아무리 우리가 그것에 대해 말해봤자 우리는 절대 결론에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논고> 는 그의 철학을 6.53 ~ 7번 명제를 통해 매듭짓습니다. 말해질 수 있는 것, 그러므로 자연 과학의 명제들 이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형이상학적인 어떤 것을 말하려고 할 때는 언제나, 그가 그의 명제들에 있는 모종의 기호들에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음을 알려 주는 것, 이 방법이 유일하게 엄격히 올바른 방법이다. 나의 명제들은 다음과 같은 점으로  인해 뜻풀이이다. 즉,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만일 그가 나의 명제들을 통해 나의 명제들을 넘어 올라간다면, 그는 결국 나의 명제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는 말하자면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한다. 그는 이 명제들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면 그는 세계를 올바로 본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그의 전기 철학은 말 그대로, 철학의 문제를 언어의 엄밀한 사용을 통해 해결합니다. 감정, 감각, 선과 악, 삶의 의미 등 철학이 다루던 문제들을 말할 수 없는 것, 언어로 그릴 수 없는 것, 결론에 도달할 수 없는 문제들로 치부하며 그것들에 관해 침묵해야 한다고 결론짓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들이 절대 말해질 수 없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다는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말해질 수 있는 것들보다도 우리 인생에 있어 중요합니다. 단지, 그것들은 이 세계의 영역, 언어의 영역 내에서 언표될 수 없기에 말해질 수 없을 뿐이고, 오로지 보여집니다. 행동을 통해, 그리고 나머지 모든 것을 통해 보여집니다. 또한 <논고> 는 마지막에서 자기언급을 하며 철학적 문제를 논하며 철학적 논의의 무의미성을 다루는 자신의 모순성에 대한 유감을 표하며 이 책을 이해한다면, 이 책이 저지른 모순을 뛰어넘어야 한다 언표합니다.



전기 철학은 <논고> 를 통해 끝납니다. 아까 시골 초등교사가 된다고 했죠. 비트겐슈타인은 <논고> 로 모든 철학적인 문제들이 해결되었다고 생각했고, <논고> 출판 문제를 스승인 러셀에게 맡긴 채 시골 초등학교 교사가 됩니다. 1920년부터 6년동안 그렇게 교사로 생활하다가, 26년에 학생을 체벌한 문제로 학교에서 쫓겨나고 다시 철학계로 복귀하게 됩니다. 앞서 출간한 <논고> 는 당시 어마어마한 열풍을 불러일으켰고, 비트겐슈타인은 철학계의 슈퍼스타였습니다. 그는 케임브리지로 돌아와 여러 학자들과 교류하며 강의를 하는데, 그 때 그의 강의를 기록한 강의록이 <청색, 갈색 책> 입니다. 철학계로 돌아와 학문적인 성찰을 계속하는 과정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논고> 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점차 인지합니다. <논고> 는 철학 전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언어를 도구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그가 생각했던 세계와의 일대일 대응관계, 대상과 사태와 사실에 대한 그림을 그리는 기능보다도 훨씬 복잡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죠. <청갈색 책> 을 지나 <철학적 탐구> 를 내게 되며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언어에 대한 입장을 전면적으로 수정합니다.




<철학적 탐구> 는 <논리 철학 논고> 가 주장했던, 언어가 세상에 대응되는 본질 자체를 부정하며 들어갑니다. 언어와 세계는 일대일 대응을 이루지 않는다는 거죠. 언어에 대해 그는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수학이나 논리학적 언어, 즉 기호가 아닌 이상 생활언어를 비롯한 언어는 여러 뜻을 지닙니다. 손님은 신이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두 문장에서 신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 그리고 지칭하는 대상이 다른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죠? 후기 철학의 주요 개념은 크게 세 개로 나뉩니다. 언어 용도 이론, 게임 이론, 그리고 가족 유사성. 추가로 사적 논증도 있겠네요. 전기 철학이 언어가 이미 세상에 대응되는 형태로 그림처럼 만들어져 있다고 주장했다면, 후기 철학은 언어가 만들어지는 것이라 묘사합니다. 언어 용도 이론부터 살펴봅시다. 언어는 상황과 맥락에 크게 의존합니다. 언어에서 맥락을 제거하게 되면 그 언어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죠. 한 단어의 의미는 대상이 아닌, 쓰임, 용도와 연관되며, 낱말의 의미는 단어가 어떻게 쓰이냐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하고 소멸하기도 합니다. 또한 언어 게임 이론을 통해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규칙이 게임처럼 합의되는 것이고, 맥락에 따라 어떤 언어규칙을 따를지가 언어에서 합의된다고 주장합니다. 그 규칙은 우리가 언어에 둘러싸여 살면서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고요. 언어는 그리고 전체적인 공통점, 전기의 철학이 주장했던 그림 이론과 같은 본질은 없지만, 가족 내에서 친족이 공통점을 공유하는 것 처럼 일종의 유사성을 띈다고 규정하는 것이 바로 가족 유사성입니다. 이렇게 후기 철학은 언어 자체를 유동적이며, 가변적이고 모호한 것으로 묘사합니다. 단어 하나하나의 정확한 실체가 없이, 우리 모두가 언어라는 게임을 하고있는 겁니다. 이 주장은 사적 언어 논증을 통해 한번 더 강화되는데, 사적 언어라 하면 간혹 제가 이 물건을 슐로미라고 부르기로 했다고 가정해봅시다. 제가 여러분 중 하나에게 슐로미를 가져다달라고 한다면, 아무도 못알아듣겠죠? 그 언어의 사용 규칙 자체가 서로 합의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사적 언어, 즉 개인이 혼자만이 사용하는 언어는 존재하지 않고, 언어는 합의를 통해 만들어지고 사용된다는 것으로 후기 철학은 매듭지어집니다.


물론 <논고> 의 6.53 ~ 7번 명제에서 드러났던 철학 자체에 대한 부정은 후기 철학에도 남아있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철학의 문제 자체가 언어의 용법을 이해하지 못해 생겨난다고 생각했고, 철학의 문제는 곧 언어에서 발생하는 문제이기에 언어에 대한 올바른 접근과 사용을 통해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언어를 명확히 알고, 언어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안다는 것.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이 끝났습니다.



저는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이 단지 언어학에만 적용되는데에 그치지 않고, 인식론까지도 확장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의 내용은 제 개인적인 생각들이니, 그냥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하고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언어의 사용 또한 실제 개념과 큰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저만의 작은 인식론으로 여기고 대충만 들으셔도 됩니다.


앞서 대상과 대상이 관계를 이뤄 사태를 만든다고 했었죠? 어떠한 대상이 임의의 다른 대상과 결합하여 사태가 될 가능성을 ‘형식’ 이라고 부릅니다. <논리 철학 논고> 는 세계가  대상-사태-사실로 이루어진다는 존재론, 그것을 언어로 확장시켜 언어가 이름-요소명제-복합명제를 통해 존재하는 세계의 그림을 그린다고 말합니다. 또한 언어를 통해 보여지는 세계의 한계를 강조하며 대상보다는 사태, 사실에 집중하죠. 전 사태가 아닌, 형식에 초점을 맞춥니다. 대상과 사태를 이어주고, 사태 / 사실의 형성의 기반이 되는 것, 즉 끊임없이 발생하기를, 사태로 일어나기를 멈추지 않는 우리의 실세계의 가장 명확한 형체를 보여주는 것이 형식이기에. 키워드는 발생입니다. 발생의 형태를 포착한 것이 형식입니다. 대상의 형식은 가능성이기에, 사태로 일어날 수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운동의 모든 의미의 발생을 함유하고 있는 것이 형식입니다. 저는 비트겐슈타인이 존재론과 그림이론의 형식이 언어는 비록 빗겨나갔지만, 우리의 인식체계의 작동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칸트의 도식 개념을 빌려옵시다. 여기 우리의 머리, 우리의 논리적 공간이 존재합니다. 우리의 머리 속에서, 즉 인식 체계 내에서 우리는 세계의 그림, 도식을 그립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각자의 일상이나 삶에 따라 다르겠죠? 학원 학교 집만을 왕복하는 학생은 세상의 그림을 그릴 때 학원, 학교, 집에 대한 도식을 그립니다. 아니, 학원, 학교, 집의 형식을 그립니다. 우리는 세계를 인식할 때, 단지 공간만이 아닌 그 공간 자체가 함유하는 모든 운동의 가능성으로 세계를 인지합니다. 형식의 총체가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입니다. 그의 지도가 도식입니다. 저는 우리의 인식이 세계에 대한 도식을 그리는 운동의 형태가 그림이론에서 세계를 언어가 그리는 것과 닮아있다고 느낍니다. 단지, 도식은 사태가 아닌 형식을 그리죠. 그렇게 인식은 세계에 대한 도식이라는 지도를 가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단지 형식만이 아닌, 대상들에 대한 독립적인 사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세계가 인식으로 넘어오며 형식이 대상으로부터 온 것과 반대로 인식 속에서 형식을 통해 대상의 대략적인 형태를 유추하는 것으로 이뤄집니다. 거푸집에 철을 부어 모형을 만드는 것처럼 형식이라는 우리 인식의 거푸집에서 대상을 머릿속에서 현상하는 겁니다. 따라서 대상은 온전히 우리의 인식 속에서 독립적으로 존립할 수 없고, 언제나 인과와 묶이며 왜곡되어 현상됩니다. 사람이 같은 대상을 봐도 그것을 다르게 기억하는 것 또한 이 인식의 원리입니다. 우리가 보는, 아는, 기억하는 세상은 우리의 인식 속 세상이기에 우리는 절대 대상 그대로에게, 사태 그대로에게 닿지 못할 것이라는 게 제 결론입니다. 단지 우리는 어두컴컴한 방 속 사람처럼 세계를 더듬거리며, 그것의 형태를 머릿속에 부분적으로 엉성하게 그릴 뿐입니다.


정리하자면, 우리는 세계의 형식만을 압니다.


형식만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지만, 존재한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형식 뿐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대한 도식이라는 형식의 지도를 그린다고 했죠? 그렇다면 도식은 우리가 이 세상을 여행하며 파악할 때 가장 중요한 정보가 됩니다. 이는 행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죠. 우리의 행동의 선제적인 목적과 과정은 도식을 기반으로, 거푸집에 쇠를 부어 무언가를 만드는 것처럼 찍어내어집니다. 도식은 곧 행동을 찍어내는 공장인 행동양식의 기반이 되죠. 도식은 또한 하나의 형식이기에 우리는 형식이라는 물길을 따라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개념과 개념의 충돌은 언어를 통해 방지될 수 있습니다. ‘이 문장은 거짓말이다’ 라는 문장을 살펴봅시다. 문장이 거짓말이라 가정한다면, 문장은 참이 되어 거짓이 되고 그러므로 참이 되어 거짓이 됩니다. 그에 따라 참이 되고, 거짓이 되고요. 문장이 참이라 가정한다면, 문장은 거짓이 되어 참이 되고 따라서 거짓말이 되며 그 과정이 무한하게 이어지죠. 이런 역설은 왜 발생하는 걸까요? 이 문장에서는 시간과 비시간이 충돌해 무한역진을 만들어냅니다. 비시간이라는 호수에 시간적 요소가 물수제비처럼 무한하게 튕겨내며 결과를 도출해내는 겁니다. 이 문장은 거짓말이다 라는 자기지시적 선언은 비시간적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 참 또는 거짓으로 발산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죠. 비시간적인 언표가, 가정이 대입되며 실시간으로 논리적인 판단의 과정을 낳게 된다면 역설보다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답을 낳게 되는 겁니다. 이를 위의 원시개념과 모방개념의 형식을 빌려와 문장 자체의 선언과 가정,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들의 충돌관계로 묘사해본다면 이 그림이 됩니다. 가장 원자적인 선언 SF와 가정VT/F가 존재합니다. 일차적으로, 대상과 대상이 존재하죠. 그리고 사태가 발생합니다. VT를 가정해본다면, SFVT는 SVF를 낳습니다. 한 번의 판단과정을 거쳤죠? 이제 SF는 SVF와 다시금 충돌해 SSVT를 낳습니다. 두번의 판단과정을 거쳤습니다. 이런 식으로 SSSVF, SSSSVT로 뻗어나갑니다. S는 충돌횟수를 나타냅니다. 이러한 식으로 역설 또한 하나의 형식의 형태로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형식은 또한 하나의 형식입니다. 형식은 형식입니다. 형식은 대상이고, 형식은 대상에서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기에 형식 또한 형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형식의 자기언급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형식은 대상과 대상의 사태 발생 가능성 자체입니다. 그런데 형식이라는 개념을 인식하는 우리에게, 인식체계 내에서의 개념으로서의 형식은 도식 속 표상으로 존재합니다. 표상은 또한 인식 속 형식론에 속하므로 형식의 개념이 형식론의 꼬리를 물어버리는 순환이 발생하게 됩니다. 형식은 형식 안에 존재하지만, 그렇다면 형식이 아닌 무언가는 어디에 속하는가? 이 물음에 대해 형식론은 대답할 수 없게 됩니다. 형식에 속해있는 형식이 아닌 무언가에 대해 형식은 설명하지 못한다는 거죠. 쉽게 말한다면, 원시 개념, 원본이자 실재하는 실세계의 어떠한 현상 또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이를 인식해서 우리가 사유하게 되는 인식 속의 모방 개념이 존재합니다. 모방 개념은 원개념, 원시 개념과 오로지 형식만을 공유하며, 모방 개념 자신 또한 형식의 연구의 형태로 존재합니다. 이 모방개념 속에서 사용되는 모든 형식을 형식a 라 칭하고, 형식이라는 개념, 형식이라는 단어의 정의 자체로서의 ‘형식’ 즉 모든 형식a들의 총체이자 집합을 형식A라 부릅시다. 형식a와 형식A의 관계, 이 사태의 패턴 속에서 형식a는 항상 그의 개념인 형식A의 논리 하부에 위치합니다. 혹은, 형식a라는 대상들의 총체의 형식이 바로 형식A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형식을 통해 형식의 자기언급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를 다루는 것 또한 형식Aa의 형식을 가지기에 이는 항상 더 큰 물고기 이야기처럼 되어버립니다.


시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시간 자체가 비시간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해본다면, 형식이 가지고 있는 약점을 이해할 수 있겠죠?


이제 마무리를 지어 봅시다. 철학은 중요합니다. 우리는 자유롭기 위해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봐야 합니다. 우리의 결론은 전부 다 다르겠지만, 그 결론이 곧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겠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의미없다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합니다. 명확한 언어 외의 모호한 언어로 세계 밖의 개념에 대해 논하는 것은 아무 의미없는 행동이며, 그것을 막는게 철학의 역할이라고요. 하지만 전 철학이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우리만의 삶을 살며 그 삶의 기반을 쌓는 과정이 철학적인 고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래로 파고 들어가야만 토대를 쌓을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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