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들
시골에서의 초반부와 도심에서 진행되는 중후반부의 분리에서부터 출발하자. 과거의 시퀀스가 현재의 시퀀스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즉 둘 사이의 경계가 명확히 나타나는 ‘넘어감’의 지점은 사진관에서 같은 작업이 다른 형태로 반복되는 순간이다. 죽은 자와 살아있는 자들이 함께 사진을 찍는 작업은 과거 시퀀스와 현재 시퀀스 양쪽의 첫 장면으로 등장한다. 반복과 차이. 차이는 어디에 존재하며, 무엇을 겨냥하는가? 사자와 생존자들을 한 프레임 내에 담는 작업은 이 영화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변의 이미지>는 단적으로는 유령성을 포착하는 과정이며, 그 과정이 과거와 현재라는 두 시간성에 걸쳐 반복되는 순간 인간이 유령과 함께 공명하는 (공생해 온 혹은 공생해 나가는) 방식에 대한 탐구이다.
그러나 유령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단지 희미한 분위기로 출현할 뿐이다. 차이는 그곳에 있다. 출현의 빈도와 경로. 50년 전, 과거 시퀀스의 모든 장면은 공포스럽다. 모든 프레임에는 서늘함이 감돈다. 반면 50년이 지난 현재의 장면들에는 그러한 공포감이 부재한다. 사진을 찍는 작업으로 잠시 돌아가보자. 과거의 사진에는 이중 노출로 촬영한 사망한 아버지의 이미지가 살아있는 안토니아와 어머니의 이미지에 희미하게 합성되어 있다. 아버지는 안토니아와 어머니가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는 순간에 물리적으로 부재하지만, 이미지 속에서의 셋은 함께 존재한다. 과거의 장면들에는 물리세계와 이미지의 세계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유령성이라는 역량이 존재한다. 그러나 현재의 사진에는 유령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죽은 자를 연기하는 아버지가 누워있다. 곧이어 아버지의 새끼손가락이 장난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딸이 웃는다. 이미지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현재에 찍힌 사진을 확인하지 못한다) 오직 물리 세계, 정보의 세계, 과학의 세계만이 확인될 뿐이다. 그렇다면 유령성은 완전히 죽어버린 것인가? 아니. 안토니아는 과거와 현재 모두에 등장한다. 늙은 모습으로 등장해, 알아보기 힘들 뿐이다. <불변의 이미지>의 소개글은 영화를 안토니아와의 재회 드라마로, 즉 안토니아를 다시 찾는 이야기라 말한다. 조금의 수정. 유령성과의 재회 드라마, 유령성을 다시 찾아가는 이야기.
이제 50년 후, 현재의 유령성이 어떤 모습으로 변화해 있는지 말해보자. 과거의 사운드스케이프를 가득 채우던 자연의 웅웅 거림은 고동치는 기차의 소음으로 대체되었다. 인간의 통제권 바깥의 자연은 곧 공포감이 스며들던 공백의 자리였다. 진동하는 자연이 자아내던 공백을 유령성으로 메우던 인간의 문화적 역량. 그러나 과거의 마지막 장면, 안토니아는 자연 속, 숲 속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잇는 인터루드와도 같은 짧은 쇼트에서의 늙은 안토니아는 풀숲에서 걸어 나온다. 현재의 장면들에는 숲을 비롯한 한치의 자연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로지 각진 벽돌과 콘크리트만이 풍경을 장악하고 있다. 프레이밍은 서늘하다 싶을 정도로 날카로우며 인공적이다. 억압당한 공포감, 서식지를 박탈당한 유령성은 마지못해 – 마치 폭발하며 저항하는 것처럼 – 튀어나온다. 전반부에 비해 밋밋하다 싶을 정도로 평이한 후반부에서 때때로 갑자기 출현하는 공포스러운 장면들. 안토니아가 밤에 일어나 남자친구의 잘린 목에 대한 괴담을 들려주는 짧은 신을 떠올려보라.
이러한 출현이 나타나는 경로 – 즉 유령성이 감각되는 경로의 차이에 방점을 찍자. 과거의 유령성은 물질화된다. 죽은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은 인화되었고 (이 사진은 현재 시퀀스에도 한 번 등장한다) 여자들은 유령 두건을 뒤집어쓴 채 곡물을 타작한다. 십 대의 안토니아가 숲 속으로 걸어가는 순간 그녀의 책에서는 기이한 초록색 광선이 뿜어져 나온다. 그러나 현대의 유령성은 물리적이지 않다. 영화 전반의 모호한 섬뜩함을 유령성이라 특정하는 것이 비약처럼 느껴질 정도로, 안토니아의 괴담을 제외하면 현재 시퀀스에 명확히 유령성이라 명명할 수 있는 장면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 유령성을 포착하는 과정에 영화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그의 방법론은, 그가 인물의 입을 빌려 말하듯, 잘린 팔의 통증을 감각하는 것처럼, 실재하지 않는 이미지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 이미지. 새로운 유령성의 거주지가 되어주는 영토가 곧 <불변의 이미지>를 비롯한 모든 영화가 아닐까.
<파묘>와 <잠>에서 땅을 뚫고 올라오거나 정신을 뚫고 올라오던, <오디션>과 <큐어>에서 살인마로 의인화되던 현대인들의 비물질적인, 영토 없는 공포감. 마치 안토니아의 휘슬이 성대가 제거된 새의 울음소리를 대체하듯, 현대인들의 빈곤한 유령 - 이미지적 역량을 대신하는 것이 영화라는 주장은 어쩌면 과하게 시네필스러운 주장일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영화가 현대의 유령성이 다루어지는 영토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분명한 사실뿐이다. 어쨌거나 이미지는 유목민처럼 영역을 옮겨갈지언정 존재하기를 계속해 이어나간다. 우리에게 <불변의 이미지>가 던진 질문은, 십 대의 안토니아와 50년 후의 안토니아가 동일인물이라 확신할 수 있었던 지점의 애매함, 무엇이 그녀의 딸이 무려 (영화상의) 2시간이 지나고서야 그녀를 알아보게 되었는가이다. 영화의 유령성과 자연의 유령성. 두 유령성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La imatge permanent>라는 제목을 통해 확언하는 감독의 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