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책들의 시간 122.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기억해

# 소설_김멜라 외 7인_민음사

by 벼리바라기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_사진.PNG


주말 소설집 한 권을 읽었다. 재미있게 잘 읽었다. 한국의 작가 4명과 캐나다 국적의 작가 4명의 단편 소설을 모아 놓은 소설집이다. 총 8편의 단편이 실려 있었으며, 소설 속 어떤 문제에 대하여는 많은 공감이 가기도 했으며, 캐나다 작가의 글에서는 깊게 생각하지 못했던 난민 문제와 국적은 같지만 언어가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하여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비슷하지만 다른 개인의 삶에 대하여 생각했으며, 미래의 나와 내 가족의 모습을 떠올렸다.

시간이 정말 빨리 흘러간다는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워낙 세심하지 못하고, 때로는 필요 이상으로 많이, 선택적으로 둔감하기도 하여 세상의 변화에 어쩌면 잘 적응했고, 어쩌면 무디게 넘어간 편이다. 그런 성격에 책 읽기는 세상을 좀 더 너른 시선으로 볼 수 있게 만들어 준 감사한 취미다. 여전히 나는 책을 읽는 순간이 좋고, 책으로 인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빠지는 순간이 좋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 어떤 소설은 참 쉽게 와닿았지만, 어떤 소설은 소설 만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있었다. 이 책은 소설의 뒷부분에 작가의 말을 실어놓아, 소설 창작의 배경과 의도를 짐작하게 해 주었다. 그런 면이 소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1. 빚진 것이 있다 여기는 마음


오래전 그날 제이크가 나에게 크리어로 말을 걸던 것을 생각한다. 내가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느껴졌던 것도. 제이크는 내가 자라면서 놓치고 있었던 선주민다운 면을 일깨워 주었다. 나는 우리 관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 때문에 떠나지 않았다. 적어도 일부는 그것 때문이다. (77쪽)

처음 제이크가 바람을 피운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거였다. 그때 나는 새로운 앎의 단계에 도달했다. 모르는 단계와 그다음 의심하는 단계에 이어 새로운 앎의 단계에 이르러 최악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렇구나, 제이크가 바람을 피우는구나, 언젠가는 끝나고 제정신을 차리겠지, 하고 생각했다. 한번 그러고 나면 그것에 대한 보상하고 바로잡으려고 하겠지. 사과하겠지. 해명하겠지. 새로운 앎의 단계에서 나는 제이크가 나에게 빚진 것 게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여전히 우리가 서로한테 어떤 의무가 있다는 묵은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제이크가 늘 그랬듯 나보다 한걸음 앞서 있다는 걸 안다. 제이크는 나에게 빚진 상태에서 벗어났다. 의무는 창문 밖으로 사라졌다.(80쪽)

- 리사 버드윌슨의 ‘어디에서 왔어요?’ 중.


단편 소설 ‘어디에서 왔어요?’는 어린 시절 입양된 선주민 ‘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선주민들끼리 묻는 ‘어디에서 왔어요? “라는 질문은 오히려 ’나‘에게 소속을 확인받아야 하는 시험처럼 느껴져 불편했으며,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런 그녀에게 ’ 제이크‘는 선주민의 언어를 마음으로 이해하게 해 준 사람이었다. 하지만 부부의 시간은 처음과 같지 않았다. ’나‘는 제이크의 핸드폰에서 낯선 사람과의 대화를 발견했으며, ’나‘는 대화조차 많이 해보지 않은 이웃집 '스미스‘와의 불륜을 꿈꾼다.

고양이 '로이'가 죽던 날 ’나‘는 제이크가 불륜 상대와 호텔에서 나오는 것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깨달음, 아니 어쩌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는 인지, 또는 바람피운 남편이 자신에게 빚진 것이 있다는 생각, 그리고 해방. 그 과정이 소설 속엔 잘 드러나 있다.

결혼하고 살면서 어떤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 ’ 최악‘을 생각할 때가 있다. 이내 지나가는 일들임에도 불구하고 사소한 어떤 것이 불씨가 되어 남편에 대한 미움이 자랄 때, 그 미움이 밖으로 터져 나오지 못하고 속으로 삭기만 하여 더 큰 원망과 무관심으로 표출될 때. 그럴 때마다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 나중에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남편은 내게 미안해할 것이라고.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 최악‘이 사실 뭔지도 잘 모른다. 그게 이혼인 건가? 우리가 결혼을 통해 맺어졌지만 결국 우리는 우리 개인이지 않은가, 그런 생각들.


제이크의 불륜 상대가 스미스인 것을 알게 된 ’나‘는 제이크가 자신의 의무에서 벗어났음을 깨닫는다. 부부가 지녀야 하는 어떤 의무, 책임감. 사랑에 대한 신뢰. 제이크는 그것을 벗어난 결정을 했고, 오히려 ’나‘는 자유함을 발견한다.

가끔 나는 내 결혼생활에 있어 남편에게 빚진 것이 있단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나 말고 다른 사람 만났으면, 그의 결혼생활이 조금 더 재미있었을까, 조금은 더 행복했을까. 그런 마음. 사실 온전히 나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그 마음이 나는 이제 연민이 되어 그를 떠나지 못한다. 그 또한 내가 불쌍할까, 그런 마음이 들기도 한다.

2. 죽고 싶은 순간, 그리고 살아지는 마음


그 뒤 어느 순간부터 지수의 눈이 차분하게 빛났다. 그간 고민해 온 문제에 어떤 답을 얻은 얼굴이었다. 지수는 이 집 말고도 갈 데가 있음을 깨달았다. 거기 수호가 있다는 것도.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만날 방법이 있다는 데 작은 기쁨마저 일었다. 그 뒤 지수는 주머니 속에 '그래, 그래도 돼'라는 말을 공깃돌처럼 넣고 다녔다. 그리곤 틈날 때마다 그 말을 자주 만지작거렸다. 한번 그런 생각이 들자 반대로 그러지 않을 이유를 찾기가 어려웠다. (115쪽)

- 김애란, ’ 빗방울처럼‘ 중.


책에 실려 있는 단편 중 가장 마음 아리게 다가온 작품은 김애란 작가님의 단편이다. 전세 사기를 당해 결국 집을 사게 된 부부, 초록이 만연한 창밖 풍경이 참 좋아 그 집을 선택했지만 결국 그 집을 떠안아 생긴 빚을 갚기 위해 남편 수호는 무리하다가 심근경색으로 죽는다.

참 좋았던 집이 일순간 ’ 들어가기 싫은 곳‘이 되고 나자 지수는 사람들이 자기 삶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얼굴로 거리를 누비며, 태연하게 오늘을 믿고, 내일을 기대하며 지낼 수 있는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었다. 그렇게 들어가기 싫은 집은 누수가 되었고, 그 물방울 소리에 지수는 죽음을 결심한다. 막상 죽음을 결심하고 나니, 그러지 않을 이유를 찾지 못할 정도로.


집에 대한 욕심이 별로 없다. 가끔은 좁은 복층 빌라 집이 우리 둘이 살기엔 괜찮단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다. 어렸을 땐 기찻길 옆 동네 주택에 살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엔 전원주택 단지의 2층 주택에 살았다. 마당엔 나무가 있는 집. 그리고 결혼을 하고는 오래된 아파트에서 살았다. 전세였지만 튼튼한 집이었다. 비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이어도 오래된 아파트는 나름의 안락함을 주었다. 다만 5층 낮은 아파였지만 물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사한 집. 어느새 7년이 되었다. 제일 꼭대기 층에 복층이지만, 외부 베란다가 있어 하늘을 마주할 수 있는 집. 그게 좋았다. 하지만 누수 문제가 있었고, 아랫집은 우리 집으로 인해 큰 피해를 보았다. 보험이 있어 큰돈이 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물이 뚝뚝 떨어지는 집 외벽을 볼 땐 속이 상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그렇게 마음을 다지며 그 시기를 지났다. 그래도 다행인 건, 나는 우리 집이 참 좋다. 살림을 잘 못해서, 청소해 주시는 분이 매주 오셔서 치워주시지만 내 쉴 곳이 있다는 것이 참 좋다.

지수, 소설 속 주인공 지수. 또독, 똑똑 물 떨어지는 소리에 죽음을 결심했다가, 벽지를 발라주기 위해 온 사람의 한 마디에 다시 힘을 얻는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

우리도 그 말을 그렇게 기다려 오며 사는 삶인지도 모른다. 무슨 일 있니? 물어봐 주는 누군가의 한 마디. 소설을 다 읽고 지수의 앞으로의 삶을 생각해 보았다. 거실 창 너머 무성한 초록에 빗방울이 내릴 때 지수는 또 살아내지 않을까. 그러기를, 그렇게 살아내기를 바란다.


3. 정리


주말 책 한 권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해야 할 일들은 있었지만, 주말이니 미루게 되는. 주말에는 책을 읽어야지, 영화를 봐야지, 그리고 드라마도 봐야지, 참 좋은 사람들과 밥을 먹어야지. 그래야 일을 할 수 있다는 마음. 이번 주말은 책이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와 세 권을 번갈아 가며 읽었다. 좋아하는 드라마는 집중하고 싶어서 아껴 보았고, 아이와 함께하는 점심은 귀하고 귀해 여러 번 검색하고 찾아갔다. 이렇게 한 주를 쉼으로 채워나갔다.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미래이지만, 오늘의 하루가 편안하기를. 오늘의 하루가 내일을 살아가는 자양분이 되기를 빌어본다. 그 가운데, 나에게 책이 있다는 사실이 참 좋다.


[이야기 나눠 보기]

1) 누군가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마음이 든 적이 있습니까? 언제이며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2)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위로를 받았던 적이 있다면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또는 누군가에게 전했던 나의 말이 있다면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책들의 시간 121. 마음 그리운 날엔 분홍 소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