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시 시인과 시골 농부의 생태일기_손의 일기_이소연시인, 주영태 농부
독서 모임을 가기 전에 인근의 작은 독립서점에 갔다. 몇 년 전에 들렀던 책방이었는데 다시 방문해도 참 좋다. 두 마리의 개가 반겨주었다. 강아지를 좋아해도 잘 만지지 못하는데 겁나지 않은 척 괜찮은 척했다. 그랬더니 강아지들도 나를 무심히 봐줬다.
서점에서 발견한 참 좋은 책. 잘 샀다. 제목부터 운율이 느껴지는 ‘고라니라니’. 도시 시인과 시골 농부의 생태일기라는 책의 설명도 좋았고, ‘손의 일기’라는 부제도 좋았다. 서점에 앉아 책을 읽다가 너무 재미있어서 아껴 읽고 싶은 마음이 들만큼. 책 속 농부와 시인의 손에 담긴 열매와 꽃과 작고 귀여운 생명들의 사진을 보면서 손의 일기라는 부제가 이해되었다. 농부님의 거친 손의 마디마디와 상처 입은 손가락, 그 위에 살포시 안겨 있는 풍성한 열매들과 작은 생명들이 모두 하나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었다. 이렇게 무해하고 참 좋은 책을 발견하여 읽을 때면 조금은 선한 마음이 샘솟는다. 다정해지는 나를 발견하게 해 주는 책이다.
1. 사랑하는 사람만 볼 수 있는 새로움
오랜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얻어지는 감정이 있다는 것을 안다. 시간이 결여된 상태에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미래의 감정이 아주 멀리서 우릴 기다리고 있을까? 자연을 오래오래 끌어안고 사귀어 온 사람에게 또다시 다가오는 새로움에 대해서라면 나는 아는 것이 없다. (중략) 아무도 모르고 사랑하는 사람만 아는 무엇이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만 볼 수 있는 새로움도 마땅히 있을 것이다. 산을 사랑하는 사람은 산이 맨날 새롭고, 시를 사랑하는 사람은 시를 읽을 때마다 새롭겠지. 그런데 영원에 대해서라면 자신이 없다. 산은 저렇게 푸르고 날마다 새로워서 영원을 약속하는 것 같지만 사람은 영원을 믿을 수 없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우는 영화는 왜 그렇게 많은지. 사람에게서 그 익숙하고도 믿음직스러운 초록빛을 본다면 사랑은 영원하다는 말이 지금처럼 터무니없이 들리진 않을 것이다. (26쪽, 이소연 시인님)
이소연 시인님이 주영태 농부님의 차를 탄 적이 있다. 그때 농부님이 시인님에게 좋은 것을 같이 보고 싶은 마음에 산을 보라고 재촉하였다. 그때의 마음을 이소연 시인님이 글로 표현한 부분이다. 농부님은 산이 얼마나 좋은지, 얼마나 멋진 산인지 설명하고 싶어 했지만 결국 감탄사만 늘어놓으며 시인님에게 계속 산을 보라고 했다. 자연을 오래오래 끌어안고 사귀어 온 사람에게 또다시 다가오는 새로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농부님은 늘 산을 보지만, 산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서 산이 맨날 새로웠을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는 새로움을 산에서 발견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아는 새로움에 대하여 나도 안다. 오랜 시간을 알고 지내온 분이 있다. 각자의 일상과 일터와 삶이 바빠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어느새 십 년이 훌쩍 넘은 인연은 한 달에 한두 번 함께 단풍나무가 커다랗게 자란 밥집에서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으로 함께 하지 못한 시간의 차이를 차곡차곡 채운다. 늙어가는 손 주름을 발견하기도 하고, 크게 아프신 이후로 소화를 잘 못 시키는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변함없는 멋진 이야기들과 삶을 보는 새로운 시선과 그분의 말을 통해 듣는 일상의 이야기들은 나를 매료시킨다. 나는 그분에게서 익숙하고도 믿음직스러운 초록빛을 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늘 새로움을 발견하게 하는 그분 곁에 오래오래 머무르고 싶다.
2. 농부님의 이야기
고창 청보리 축제가 끝나면 눈물 자국 선연한 강아지들이 자신을 버린 주인의 차와 비슷한 차만 보면 전력질주로 쫓아가다 털레털레 버려진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게 안쓰러워 이웃 영래 누나는 유기견 열일곱 마리를 데려다 키웠다. 버려진 개들을 애정으로 품어 줘도 개들이 받은 상처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틱행동을 하기도 하고 사람을 물기도 했다. 오랫동안 인간을 향한 경계의 끈을 놓지 못했다. 영래 누나는 월급의 반을 반려견 병원비며 밥값에 들였다. 끈 풀려 집 나간 애들도 결국 누나 집 마루 밑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 작게 구부러진 개의 등뼈를 보면 사람이 미워진다. (109쪽, 주영태 농부님)
이번 방학에 완주 살이를 하면서 고창을 다녀왔다. 스무 살 무렵에 다녀왔던 선운사가 그립기도 했고, 한 시간 내외로 다녀올 수 있는 거리이기도 해서 고창을 처음 방문했다. 고창이 청보리 축제로 유명한 곳이구나,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책을 다 읽었을 때에는 고창에 다시 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농부님의 손 가득 쥔 삐삐 껍질도 보고 싶고, ‘오배이골’의 섬휘파람새도 보고 싶었으며, 농부님의 작두콩밭을 완전히 망쳐버린 새끼고라니도 보고 싶었다. 조그마한 강아지의 발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농부님의 글 가운데 몇몇 글은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농민들이 지켜 내는 가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나락 값에 대한 이야기, 껌 값은 몇십 배 올랐는데 농수산물의 가격은 이십여 년 전의 가격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울분, 밥 한 공기 300원도 안 되는 쌀농사에 대한 억울함, 소의 눈에 담긴 당숙모의 삶과 고라니 새끼와 차에 부딪쳐 죽어가는 동물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생생하게 마음에 들어와 슬픔이 차오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시골에 버리고 가는 강아지들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강아지들은 자신을 버린 주인의 차와 비슷한 차를 보면 전력질주로 뛰어간다고 한다. 그리고는 다시 버려진 자리로 돌아오는 강아지들, 주인을 기다리는 한없는 마음이 전해져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렇게 버려져 상처 입은 상태로 살다가 죽어간 강아지들을 보며 농부님은 사람이 미워진다고 하셨다. 자신이 키우던 강아지를 시골에 버리고 오는 사람들의 그 행동에 화가 난다. 책임질 수 없으면 키우지 말아야지, 그런 마음도 들고 사랑엔 책임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3. 정리
그가 부탁하면 나도 모르게 최선을 다하고 싶어진다. 농부 친구는 받기만 해서 미안하다고 한다. 정말 이상하다. 나도 그에겐 해 준 것 없이 받기만 하는데 말이다. 아무리 줘도 받기만 하는 기분은 아무에게나 가질 수 없는 것 같다. 한 존재를 향한 이 지극한 감정은 마치 오래전에 잃어버려서 땅속에 묻힌 유물 같다. (13쪽, 이소연 시인님)
시인님과 농부님이 어떻게 이렇게 좋은 만남으로 책을 만들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나중에 농부님이 연애를 해 책 쓰는 일보다 연애에 더 정신이 팔렸을 때 시인님은 농부님이 즐겁고 기쁘게 자신을 기록하는 일을 잊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만들어진 한 권의 책 ‘고라니라니’. 마음을 담아 보내온 복숭아를 한껏 베어 문 시인님을 상상하게 되고, 볶은 콩의 고소함을 오래 상상하게 되는 그런 책이었다. 그러면서 내 곁에 있는 참 좋은 사람들, 그 사람들과의 귀한 인연을 떠올리게 만드는 책이었다. 한 존재를 향한 지극한 감정을 내가 잊지 않고 오래오래 기억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야기 나눠 보기]
1) 사랑하는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새로움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지금 여러분은 어떤 새로움을 발견하고 있는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2) 아무리 주어도 받기만 하는 기분을 느낀 적이 있다면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