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시간 170. 두고 온 여름

# 성해나 소설_창비

by 벼리바라기


5일간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연휴를 맞이하는 첫 책이었다. 봄이 온 것 같은데 이내 추운 날씨가 이어졌고, 아침저녁으로는 추위에 겉옷을 챙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한 낮엔 햇살이 뜨겁고 좋아 맑은 날들에 대한 예찬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분명 바쁜 일상이 온전히 사라진 것이 아님에도 연휴를 맞이하는 기분이 좋다. 노동절에 재량 휴업일에 어린이날까지 내리 5일을 쉴 수 있어 기차를 타고 본가에 내려왔다. 기차역에서 다 읽은 책. ‘두고 온 여름’

성해나 작가님의 ‘혼모노’를 재미있게 읽은 터라 쉽게 선택할 수 있었던 책이다. 책의 표지가 싱그러워 기대감을 가지게 만들었다. 다 읽고 나니, 기대감보다는 쓸쓸함이 더 크게 다가왔다. 그럼에도 책의 제목처럼 ‘두고 온’ 어떤 마음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된다. 살면서 나는 어디에 어떤 마음을 두고 왔는지, 지금 이렇게 시간이 흘러 지내고 있는지, 그런 생각을 해 본다.

1. 쉽사리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는 마음

그에게 넉살 좋게 다가가다가도 어느 순간 주춤 멈춰 서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안부를 물어줄 때, 구겨진 이불을 판판하게 펴주고 잠든 내 이마를 쓸어줄 때, 재하야, 다정히 나를 부를 때

비정에는 금세 익숙해졌지만, 다정에는 좀체 그럴 수 없었습니다. 홀연히 나타났다가 손을 대면 스러지는 신기루처럼 한순간에 증발해 버릴까, 멀어져 버릴까 언제나 주춤. 가까이 다가설 수 없었습니다.

가감 없이 표현하고 바닥을 내보이는 것도 어떤 관계에서는 가능하고, 어떤 관계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저는 알고 태어난 것일까요. (58쪽)

어떤 선생님은 성해나 작가님의 소설이 너무 쉽게 주제를 말해주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쉽게 이해되는 문장이 좋다. 사실 ‘혼모노’를 이해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는데 ‘두고 온 여름’은 쉽게 읽혀 좋았다. 문장이 쉽지만 내용이 가볍지 않은 그런 소설들을 나는 좋아하는 것 같다. 읽을 때 술술 읽히지만 오래 기억에 남아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만드는 여운이 담긴 소설들.

책을 다 읽고 마음이 쓸쓸해졌던 것은 끝내 마음을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는 그런 관계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기 때문이다. 소설은 ‘기하’와 ‘재하’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법률적으로 묶이진 않았지만 삶의 어느 한 시기 새로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형제, 아버지의 아들 ‘기하’와 어머니의 아들 ‘재하’의 이야기. 재하는 폭력적인 아버지를 떠나 엄마와 함께 기하의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다. 사진사였던 기하의 아버지는 재하에게 따뜻함으로 다가가지만 재하는 그 따뜻함이 사라질까 머뭇하게 된다.

새로운 관계를 맞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더 그런 것 같다. 어릴 때 친구들과 친해지는 방법은 그냥 다가가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그러다 슬며시 내가 먹던 과자를 나눠주는 일, 그리고 등하교를 같이 하고, 어느 날은 놀이터에서 그네를 같이 타는 일이었다. 그러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가족의 비밀 같은 것을 털어놓고 함께 울었고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한 시절을 잘 지내다 학교가 달라지면서 또는 이사를 가면서 그렇게 멀어지기도 했다.

어른을 대할 때는 또 다른 마음이다. 대답을 잘하는 것, 인사를 잘하는 것, 시키는 심부름을 잘하는 것, 뭐 그런 것들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다시 직장 동료가 아닌 마음을 나눌 친구를 만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글 속 구절처럼 다정에는 좀 체 익숙해지지 않는 것, 그런 순간을 만날 때가 있다. 세상을 살아내면서 생긴 조심스러움이, 두려움이 이제는 좀처럼 사람을 믿지 못하고, 다정함을 경계하게 만든 것이다. 상처를 안고 있는 어린 재하에게는 낯선 아저씨의 다정함이 못내 그리웠음에도 이내 멀어질까 두려워 다가설 수 없게 만들었겠지.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참 쓸쓸해졌다.

쉽사리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어쩔 수 없는 거리감이 재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요즘의 나에게도 있음을, 나는 잘 안다. 참 많이 좋아하고 다가가고 싶은 사람이 있음에도 내 다정함이 부담이 되어 멀어질까 두려워 이내 다정함을 감추고 마는 날들이 많아졌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 마음을 들여다보아야겠다.


2. 뒤늦게 전하는 말

옥춘당 조각을 집어 입안에 넣었다. 달고 화한 맛이 혀끝부터 천천히 퍼졌다. 입안에서 사탕 조각을 굴리며 내가 왜 이곳에 왔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재하에게 해주어야 했을 말들을 뒤늦게나마 중얼대보았다. 잘 지냈니, 보고 싶었어. 잘 지냈으면 좋겠다. 미안해 같은 평범하고도 어려운 말들. 이제 와 전송하기에는 늦어버린, 무용한 말들을. (중략)

재하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때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부르고 또 어떤 말을 나누게 될까.

창밖을 보았다. 버스는 탄천교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무것도 두고 온 게 없는데 무언가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132쪽)

냉정하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던 기하는 나이가 들어 사업에 실패하고 온종일 사무실에 앉아 구글어스를 들여다본다. 그러다 우연히 발견한 재하의 사진을 보고는 무작정 재하를 찾아간다. 어쩌면 어린 자신의 냉정함에 상처받았을 더 어린 재하를 향한 사과의 마음을 품고서.

책을 읽으면서 내게도 그런 사람이 있나, 어린 시절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이 있나,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잘 기억나지 않았다. 오히려 오랜 시간 사과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사람만 기억이 났다. 나는 이제 와 전송하기에 늦어버린 무용한 말들을 잔뜩 품고 있는 기하였다.

대학시절 미숙했던 감정을 품고 참 좋아했던 선배가 있었다. 비 오는 날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고 싶다던 스무 살 어린 대학생의 소원을 들어주었던 선배, 좋아할 수밖에 없었고 열심히 좋아했지만 끝내 마음은 닿지 않았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상대가 원치 않는 내 감정의 표출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좋아한다는 나의 감정에 휘둘려 상대의 감정을 모른 척했다. 그렇게 거리를 두는 선배를 많이 미워했다. 아주 시간이 많이 흐른 다음, 사랑은 혼자의 감정으로 완성될 수 없는 일임을 배웠다. 그리고는 선배에게 사과의 말을 하고 싶었지만, 이미 나를 기억조차 못할 것 같아 마음마저 멈추었다.

3. 정리

책을 읽으면서 내내 책 제목 ‘두고 온 여름’의 풍경을 생각했다. 지난해 전주에서 만났던 싱그러운 여름의 풍경도 떠올랐고, 그보다 오래전에 갔었던 여수의 일렁이는 바다의 더운 윤슬도 떠올렸다. 내내 후덥지근하게 내리는 비의 냄새도 떠올랐고, 소설 속 기하와 재하의 가족이 간 어떤 왕의 능,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지난다는 문, 그 사이로 무수히 자란 풀의 모습도 상상했다. 책에 실린 작가 인터뷰에서 기하와 재하를 향한 작가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누구든 그곳에서는 더 이상 슬프지 않기를”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책이다. 여름이 그러한 계절인가 보다 그런 마음도 들었다. 많이 슬프지만 결국은 반짝이는 계절로 기억되는, 그렇게 또 눈부신 그런 계절인가 보다 그런 마음.


[이야기 나눠 보기]

1) 쉽사리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는 마음을 가진 적이 있습니까? 그런 마음이 언제 생겼으며, 그 마음을 어떻게 풀어냈는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2) 평범하고도 어려운 말을 건네지 못했던 순간이 있는지요? 그 말은 무엇이었으며, 지금은 그 말을 전했는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