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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리바라기 Aug 28. 2023

책들의 시간 49. 집의 일기

# 집의 일기_박성희 에세이_책사람집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예약 도서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걸음에 달려갔다. 다만, 일정이 너무 많아, 도서관에서 오래 머물지 않겠다는 다짐과 책은 예약 도서만 찾아오겠다는 다짐은 했더랬다. 하지만 막상 도서관에 도착하니, 그냥 못 지나치겠다. 아이는 차에서 기다리게 하고는, 신간 도서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계속 소설만 읽어왔기에, 가벼운 수필이 읽고 싶었고, 마음이 편안한 책들을 읽고 싶었다. 밤에 잠들기 전, 침대 머리맡에다 두고, 읽다가 스르르 잠드는 책. 편안한 꿈을 꾸게 만드는 책. 그런 책이 읽고 싶었다. 내용은 전혀 모르기에 그런 책인지 알 수 없었지만 끌렸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책은 하얀 표지에 그 흔한 그림조차 없었다.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앞면에 책의 제목이 적혀 있는지도 잘 모른다. 깨끗한 느낌, 제목도 ‘집의 일기’. 또 무엇보다 마음이 끌렸던 지점은 ‘이 책은 실로 꿰매어 제본하는 전통적인 사철 방식으로 만들었습니다.’라는 구절이었다. 그냥, 책의 만듦 자체도 마음에 드는.

  어떤 배경지식도 없었고, 작가에 대한 정보도 없었지만, 작은 끌림으로 책을 읽었다. 가벼우면서도 느릿느릿, 그리고는 마음이 편안해졌고, ‘아, 이렇게 살고 싶다’라는 작은, 아니 어쩌면 참으로 큰 소망이 생겼다.      


1. 무언가를 소망하는 삶.


나는 그저 내가 좋아하는 색깔과 내가 좋아하는 공기와 냄새, 내가 좋아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살고 싶을 뿐이다. 이것이 집을 짓는 목적이다. 그래. 그냥 그렇게 살고 싶은 대로 짓고 싶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면 안 된다는 말만 한다.(19쪽)     

시골 농사꾼의 생활 수칙 ‘스스로 깨우치고 지키기’. 세끼 식사를 늦지 않게 챙겨 먹고 일찍 푹 잔다. 특히 몸이 안 좋다 싶으면 무조건 많이 잔다. 노년의 농사 초보자라면 더더욱 지켜야 할 철칙! 절대 무리하지 않는다.(48쪽)


  책의 작가는 칠순이 넘으신 분이다. 언제 집을 지었는지는 나와 있지 않지만, 시골집을 짓고 싶은 소망이 있으셨고, 그렇게 용기를 내어 집을 지었다. 터를 만났을 때 여기구나, 그런 마음이 들었으며, 집이 모양을 갖추어 갈 땐 너무 큰 것은 아닌가에 대한 불안감도 있었으며, 마음에 드는 창 하나를 갖고 싶다는 그 소망에서 출발한 집이 완성되었을 땐, 집은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살고 싶은 생활 방식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작가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집이 살고 싶은 생활 방식을 의미한다는 말의 의미. 정말 그러한 것 같다. 작가가 텃밭을 가꾸고, 꽃을 심고, 정원을 만들어가고, 집의 공간 어디에서 전통 방식으로 책을 엮어나가며, 책을 읽고 차를 마시고, 산책을 하며 눈 내린 날 달을 보러 나가고 싶어 하는 그 모습이 바로 살고 싶은 방식을 실현하는 것, 그것이 집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임을.      


  시골 농사꾼의 삶을 살아가면서 작가는 생활 수칙을 정한다. 그 생활 수칙이 어찌나 단단하고 좋던지, 가만가만 나의 삶을 돌아보았다. 그러지 않았는데, 살다 보니 성향이 조금 변했다. 뭔가를 계속 기록하고 목표를 정해 지워가면서 사는 삶, 그러다 그것이 어쩌다 작은 목표의 성취가 되었고, 규칙적인 삶의 방식이 되었으며, 나를 조금씩 성장하게 만들었다.

  배달 음식을 시켜 먹는 것이 점점 줄어들더니, 이제는 집에 있는 것들로 조금씩 요리를 해 먹게 되었고, 아무런 양념 없이 양파만 볶아도 달달한 그 맛이 좋아지기 시작하였으며, 사다 놓은 재료를 다 소비하고 났을 때 뿌듯한 그 느낌을 만끽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는 점점 어른이 되어가는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남들보다 많이 늦은 사십 대에 들어서야 겨우.

 그럼에도 뭔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하나씩 생기기 시작하고, 그것이 열망처럼 조금씩 자라다가, 사라지다가 또 생겼다가 그렇게 변화를 겪었다. 생각나면 하고 싶은 것들을 하나씩 적기 시작했더니 어느새 그 목록이 많아졌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읽어주었더니, 그렇게 사소한 것들이  하고 싶은 것이냐며 물었고, 마음만 먹으면 훌쩍 떠나 실천할 수 있는 것들도 사실 많은데, 일상에 치여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는 것, 소망하는 삶의 모습이 있다는 것, 좋은 사람과 함께하고 싶은 목록들이 있다는 것이 좋다.      


2. 기분을 풀어주는 사소한 습관


  다시 한번 우리 둘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 어쩔 수 없는 차이. D가 끊임없이 국제 정세에 대해 이야기한다 해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들어 넘겨야 한다. 이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 추운 겨울날, 한밤중에 눈길을 밟으며 달 보러 나가자고 하는 여자가 이상한 거다. 그냥 이 선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게다가 낮부터는 기침을 하기 시작한다. 내가 졌다. 다른 이들에게 나와 같은 감상을 요구하지 않기로 한다. 내게는 대단히 중요한, 삶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지만,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니라는 걸 항상 명심해야지.

  있는 연필을 다 모아 연필깎이에 넣고 돌려 깨끗하게 깎았다. 뾰족한 연필로 글을 쓴다. 사소하고 고요한 순간. 이런 때가 가장 좋은 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기쁜 소식이 들려올 것이라는, 바라던 일들이 결국은 이루어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지만 그것에 크게 매달리지는 않는다. 어떤 힘든 일이 있더라도 견디겠다는 단단한 마음이 온몸에 배어 스스로에게 힘을 주는, 그런 매일매일이 되게 하소서, 기도한다. (193쪽)     

남아 있는 나날을 온통 강인함에 대한 강박과 더 가지고 싶은 욕심에 기대어 살아간다면 끝내는 그 하나하나를 놓아야만 하는 박탈감 때문에 괴로워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흔한 노년의 모습이다. 그 마음을 놓고 내 몸도 그냥 허허로이 바람 속에 맡겨 날려 보내는 것. 그것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소멸의 길이라 생각한다. 손목의 통증도 자연현상일 뿐이다.(201쪽)


  사소하고 작은 일로 픽 토라질 때가 있다. 나이가 들면서 이제는 그럴 일도 많이 없어졌지만, 그 이유가 기대감이 없어져서이기도 한 것이 조금은 서글퍼지기도 한다. 하지만 난 이 평화로운 나이대와 시간이 참 좋다. 사실 기억의 왜곡인지는 몰라도 치열하게 싸운 적도 별로 없다. 하지만 기억에 아프게 남아 있는 장면은 있다. 싸울 때 아이가 함께 있었던 순간. 충분히 그 시간을 기억할 만한 나이였는데, 묻지도 못하겠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게 너무 아프게 다가와,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다 보니, 어느새 평화로워졌다. 나는 지금 이렇게 뭔가를 같이 해 주기를 바라는 그런 기대 없이 늙어가는 것이 좋다. 그렇게 굳이 바라지 않더라도 가족의 이름으로 무언가를 함께 하는 순간들이 많고 지켜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꼭 싸움이 아니더라도, 토라짐이 아니더라도, 기분이 마구마구 가라앉을 때가 있다. 선명한 이유를 찾지도 못하겠는데 깊은 우울에 빠지는 순간. 그럴 땐 벗어나야 한다. 그렇다고 작가의 말처럼, 강인함에 강박을 가지고 싶진 않았다. 사람이 우울할 수도 있는 거지, 그렇게 여기며 약함을 인정하고 견디려 해 보지만 쉽지 않다. 감정에 자유로워지는 것, 울고 싶을 땐 울고, 웃고 싶을 땐 웃자고 다짐하기도 하지만 당장 뭔가를 하지 않으면 슬픔에 매몰될 때가 있다. 그럴 때의 작은 습관, 시공간을 탈출하게 만들어주는 작은 습관, 그런 게 필요하다.


  작가에게는 습관은 아니었겠지만 연필을 깎는 것이 마음을 움직이는 버튼이었나 보다. 나에게는 그런 버튼이 책 읽기이다. 마음이 지나치게 힘이 들면, 책을 읽는다. 책 한 권을 빼 들고 누워서 책을 읽는다. 소설이면, 재미있어 그대로 좋고, 인문학 책이면 밑줄 그을 부분들이 많아 또 그것대로 좋은. 하지만 가장 좋은 책은 그림이 그려진 책들이다. 가볍게 술술 넘어가는 책. 그런 책을 읽다가 잠이 들었다 깨면 마음이 한층 부드러워진다. 책은 나에게 삶의 매 순간에 대한 처방전이다.      


3. 정리.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와 한 주 동안 세 권의 책을 읽었다.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이윤엽 판화 그림책)’는 시골 생활의 모습과 자연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책이었으며, ‘골목 방랑기(정세원)’는 너무 낯설어 이게 무언가 싶었지만 다 읽고 나니 인제의 신남과 원통이 가고 싶어진 책이었으며, 이번 책 ‘집의 일기(박성희)’는 소망하는 삶에 대한 건강한 열망을 품게 해 주었다. 좋다. 책 읽는 삶. 기분이 좋을 때에도 책을 읽고, 기분이 나쁠 때에도 책을 읽는다. 바쁠 때에도 책을 읽으면, 마음이 정리가 되고, 우선순위가 정해졌으며 외롭고 높고 쓸쓸할 때에도 책을 읽으면 위안이 되었다. 책은 나에게 그랬다.

  ‘집의 일기’를 읽으면서, 집을 청소하고 싶어졌다. 집도 그러하기에, 삶의 많은 순간들이 이루어지는 공간이기에. 나의 한 주가 편안해질 것 같은 느낌이다.      


[이야기 나눠 보기]

1) 나에게 집은 어떤 공간인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2) 기분을 풀어주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다면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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