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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리바라기 Sep 11. 2023

책들의 시간 51. 저만치 혼자서

# 저만치 혼자서_김훈_문학동네


  아주 오래전 교과서에 실려 있었던 내용 중 김훈 작가님의 글이 있었다. 자전거 여행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처음에 그 지문을 학생들과 함께 공부할 때는 재미보다는 ‘지루함’이 컸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가르칠수록, 글을 읽을수록 재미있었다. 그래서 좋았던 기억이 있다. 풍부하면서도 그림이 그려지는 자연에 대한 묘사는 힘이 있었고, 곱씹을수록 그 맛이 더해지곤 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다른 책에 대한 도전은 없었다. ‘밥벌이의 지겨움’은 제목이 좋아 기억에 남긴 했지만, 작가의 다른 책을 부러 구해 읽지는 않았다. 

  이번 책 ‘저만치 혼자서’는 읽다가 마음이 너무 아파서, 중간에 책을 덮었더랬다. 근데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다시 펼쳐 들었다. 읽으면서 담대할 수는 없었지만, 읽다가 포기하고 싶지는 않은 책이었다. 총 7편의 단편집이 실려 있는 책이었으며, 다 읽어내었을 땐, 제목이 ‘저만치 혼자서’인 것이 저마다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일 수 있음을, 그리고 제목을 정할 때 김소월의 시 ‘산유화’에서 가져온 것처럼, 그래도 ‘꽃 피는 삶’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음을 받아들였다. 작가의 소설에 대한 이야기인 ‘군말’ 부분을 읽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슬픔에, 분노에, 속상함에, 서글픔에, 외로움에 휘몰아치던 감정이 잠잠해졌다. 다행이다.

      

1. 시대의 폭력성


  저녁 여섯 시 무렵에 노량진에서 시간은 시들었다. 시간은 메말라서 푸석거렸고 반죽되지 않은 가루로 흩어졌다. 저녁이 흐르고 또 익어서 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말라죽은 자리를 어둠이 차지했다. 저녁 여섯 시 무렵에는 시장기가 몸속에 번졌다. 저녁마다 시장하기는 했는데, 지나간 시장기는 기억 바닥에 매몰되어서 모든 시장기는 처음이었다. 몸이 시장하면 어둠의 가루들 속에 허기가 번져서 눈앞이 시장했다. 저녁의 시장기가 몸에 번지면 몸이 비어서 창자에 바람이 지나가는 느낌이었고, 길 건너편 사육신 묘지의 숲이 멀어 보였다. (161쪽)

 


  노량진 학원을 다닌 적이 있다. 교육학과 전공 수업을 듣기 위해서. 그때는 어렸었고,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으며, 주 내내 학원을 다니는 것이 아니라, 특강을 듣는 정도여서, 주말 새벽에 노량진에 가서 저녁이면 집에 돌아오곤 했었다. 지하철을 한가득 메운 사람들. 무거운 가방을 메고 노량진 역에 내리면 역사에 김밥을 파시는 분과 떡을 파시는 분들이 가득했고, 사람들은 저마다 일용할 양식을 사 들고 학원으로 들어갔다. 지정석이 아니어서, 일찍 오는 순서대로 자리에 앉았으며, 강사의 얼굴은 보이지도 않고 커다란 화면으로 강의를 보면서 들었던 기억들이 있다. 그러면서도 인터넷 강의가 아닌 실강을 선택한 이유는 조금이라도 그 무리 속에서 경쟁하여야만, 마음을 놓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 때문이었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여러 단편 중 하나, ‘영자’. 노량진 고시원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그때의 공기와 풍경이 고스란히 느껴지면서도 비참함이 밀려왔던 것은, 젊은 청춘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나는 동거녀를 구할 때 추접스러운 조건을 제시하지 않았다. 여자의 고향이나 가족관계, 장래희망, 취미, 월수입, 체중, 몸 사이즈, 무슨 대학을 나왔는지, 성형을 했는지, 무슨 직종 지망인지, 몇 수인지를 묻지 않았다. 노량진 구준생들은 대체로 내세울만한 학벌이나 경력이 없었다. 지방에서 무슨 대학을 나왔건, 노량진에서는 모두 지잡대로 평준화되었다. 지하철 전조등이 어둠을 훑고 지나가는 밤에 몇 마디 말을 나눌 수 있고, 몸을 잘 대주기만 한다면 동거녀가 지잡대건 지잡퇴건 나는 상관없었다.(160쪽)


  딸의 대학 생활을 들을 때마다, 또 한숨처럼 내뱉는 진로에 대한 딸의 막연한 두려움을 마주할 때마다 청년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빠듯함에 안쓰러움이 몰려온다.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 용돈만으로는 생활할 수 없기에 딸아이는 학교 생활을 하면서도 두 개의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그것에 대하여 불평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효녀라고 생각한다. 스무 살이 넘어 ‘성년’이 되어서는 자기의 밥벌이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미 출발선이 다른 아이들의 삶에서 공정하지 못한 삶을 보게 된다. 

  ‘영자’를 읽으면서, 나는 오히려 시대의 폭력성에 대하여 생각했다. 작가의 말처럼 ‘제도가 사람을 가두고 조롱하는 모습, 인간의 생존 본능을 자기 착취로 바꾸어버리는 거대한 힘’이 젊은이들을 내몰아, 감정보다는 편의를 위한 동거를 선택하고, 철저히 개인의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 서로의 아픔을 외면하면서, 동정마저도 사치로 만들어버리는 것, 쿨함을 가장하여 감정마저도 속이는 것, 그리고 처절한 가난 속에서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려 몸부림친다고 한들, 이미 물질적 계급으로 나뉘어 가난도 대물림되어버리고 마는 것, 그것이 시대의 폭력이 아닐까? 


2. 부모의 자리


이혼에 이르기까지의 사유를 이루 다 말할 수 없고, 말하여질 수 없는 부분이 더 많을 테지만, 그날 저녁 수월천의 얼음에 실려 떠내려가는 개를 바라보면서 나는 전남편과 전 시어머니, 그리고 고향에 얽힌 사람들이 그렇게 비명을 지르며 멀어져 가는 환영을 느꼈다. 이혼율이 해마다 늘어난다는 통계 숫자를 신문에서 읽으면서 나는 나의 생애가 숫자 속에 매몰되기를 바랐다. (69쪽)     

철호는 말로 표현되거나 말로 구성되는 자리가 아닌, 다른 감각의 세계에서 사는 아이 같았다. 철호는 후각과 청각이 짐승처럼 날카로웠고, 감각의 영역이 넓었다. 중학교 때 철호는 어슴푸레한 새벽에 일어나서 공원과 야산을 쏘다니다가 돌아오곤 했다. 돌아와 다시 잠들어서 학교에 자주 지각했다. (중략) 철호는 아득히 소멸하는 선율 그 너머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저물고 또 밝아오는 시간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아이였다. 그 감각이 대금의 선율처럼 철호를 세상 밖으로 끌고 나갔을 것이다. 젖을 먹을 때 내 젖꼭지 언저리를 훑어서 짜내던 잇몸의 움직임이나, 자라서 여자아이를 강간한 범행도 그 동물적 감각에 이끌린 것이라고 나는 짐작하고 있었다. 내가 먼 곳으로 이사를 가더라도, 십 년 뒤에 출소한 철호가 후각과 청각으로 더듬어서 나를 찾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76~78쪽)


  ‘손’이라는 단편이다. 이 단편을 읽고는 책을 덮었다. 다시 꺼내 들어 읽기까지 마음의 고통이 조금 있었다. 아주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되었고, 또 아이를 스스로 키운 적도 없었지만, 아이가 자랄 때마다 점점 더 아이가 좋아지더니, 지금도 여전히 참 아이가 좋다. 스무 살이 넘은 아이이건만, ‘육아는 끝이 없다’ 그렇게 내뱉곤 한다. 하지만 그 아이가 참 좋아서 그 아이가 사는 세상이 좋았으면 좋겠다 싶고, 자주 오는 행복에 때때로 오늘 불행을 이길 힘을 얻어 살아가면 좋겠다 싶다. 또한 좋은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고, 건강하게 잘 자라면 좋겠다 싶다. 세상의 모든 부모의 마음이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이 단편, ‘손’을 읽었을 땐, 마음이 너무 아팠다. 강간 범죄를 저지른 아들을 둔 엄마와, 강간을 당한 후 결국 자살을 선택한 딸을 둔 아버지의 이야기. 부모의 자리가 너무 가혹하여 마음이 아팠으며, 자식의 잘못 앞에 부모의 영향이 없다고 할 수 없어 또 마음이 아팠다. 

  

  며칠 전 방송에서 25년 차 선생님의 인터뷰를 듣는데, 이런 말씀을 하셨다. 

  “위기 학생 뒤에는 위기 가정이 있고, 위기 가정 뒤에는 위기 사회가 있어요.”

  그 말이 계속 기억에 남았다. 위기 학생과 위기 가정, 그리고 위기 가정과 위기 사회. 개인적 문제가 사회의 문제에서 독립적일 수 없다는 말. 소설은 철호의 엄마인 ‘나’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개인적 사유의 이혼이 아이를 범죄자로 만든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는 부모의 자리. 개인적 불행의 삶이 사회의 이혼율에 매몰되어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은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 것이며,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삶이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워낙 이혼율이 높은 사회임을 실감한다. 그래서 이혼 가정의 모든 아이들이 위기 학생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방송에서 어린 시절 충족되지 않았던 부모와의 관계와 결핍을 현재 삶의 불행으로 연관 짓는 것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소속된 공간에서의 성장 과정이 지금의 선택과 삶에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부모의 자리가 참으로 무겁다.      


3. 정리. 


  읽을 때는 힘들었지만, 끝내 손에서 놓지 못한 책. 그래서 글을 쓰면서도 하고 싶은 말을 온전히 다 쏟아내지 못했다. 작가님은 ‘손’이라는 제목이 마음에 든다고 하셨다. 그리고 ‘노동하는 손, 사랑하는 손, 쓰다듬는 손, 주무르는 손, 주는 손, 받는 손, 부르는 손, 보내는 손, 기도하는 손, 연장을 쥐는 손, 악기를 쥐는 손, 무기를 쥐는 손, 고운 손, 부르튼 손, 그리고 이 세상의 수많은 손잡이와 남아 있는 손들의 자취와 표정’에 대하여 글을 쓰고 싶다고 적으셨다. 궁금해졌다. 내 손은 어떤 손인지, 소설 속 영옥이가 차가운 물에 뛰어들었지만 끝내 꽉 잡고 싶었던 생의 어떤 순간들을 나는 제대로 붙잡고 살아가고 있는지, 시대의 폭력 속에 다행히 그나마 괜찮다 안주하며, 부끄럽게 마주 잡는 손은 아닌지, 반성과 성찰 속에 오늘 하루를 보낸다.      


[이야기 나눠 보기]

1) 우리 시대의 폭력성이라고 생각되는 제도나 정책, 법과 규칙이 있다면,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2) 부모의 자리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 부모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이 있다면 무엇인지, 또는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부모로서의 책무감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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