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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리바라기 Sep 18. 2023

책들의 시간 52. 계절 산문

# 계절 산문_박준 산문. #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오래전에 박준 작가님의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을 읽었다. 그보다 더 오래전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온 시인을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시를 짓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가볍게 들었던 적이 있었다. 이번 도서관 프로그램에 박준 시인의 강연이 있다는 안내 문자에 바로 신청을 했다. 그리고는 다시, 박준 작가님의 책을 펼쳐 들었다. 집에 있던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를 다시 꺼내 읽었고, 도서관에서 ‘계절 산문’을 빌려와 읽었다. 여전히 마음이 참 편해졌고, 때로는 슬퍼졌으며, 내밀한 어떤 이야기를 들은 기분에 내적 친밀감이 들기도 했다. 산문이, 시가 그러한 것이기에.      


1. 계절 산문

  책은 일월부터 십이월까지의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가 담긴 산문집이다. 때때로 시도 있고, 더 짧은 한 줄 글도 있다. 그것이 시처럼 느껴졌다가, 일기처럼 느껴졌다가 그랬다. 작가의 시간을 따라가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오르기도 하는 산문집이었다. 그래서 읽는 동안 정말 마음이 편했다. 나는 이런 글들이 참 좋다. 심심한 듯하면서도 곱씹을수록 이야기가 또 다른 생각과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그런 책들이 참 좋다.      


  며칠 전에는 여름 감기로 고생을 했습니다. 새벽 무렵에는 고열 탓인지 한번 깬 잠이 다시 오지 않았습니다. 문득 바다 한번 가보지 못하고 이 여름을 다 보내는구나 하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지도를 열고 제가 좋아하는 제주의 해안길들을 짚어보았습니다. 

  살아가면서 좋아지는 일들이 더 많았으면 합니다. 대단하게 좋은 일이든, 아니면 오늘 늘어놓은 것처럼 사소하게 좋은 일이든 말입니다. 이렇듯 좋은 것들과 함께라면 저는 은근슬쩍 스스로를 좋아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95쪽)


  칠월 산문은 좋아하는 단어를 발음해 보는 작가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그러다 좋아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 작가는 지도를 보는 일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기억하는 어떤 공간에 대한 이야기들을 한다. 그리고는 살아가면서 좋아지는 일들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말한다. 그 말이 가슴에 콕 와닿았다. 살아가면서 좋아지는 일들이 더 많아지는 삶. 

  칠월 산문을 읽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하여 떠올려 보았다. 학기 초 아이들과 수업을 하기에 앞서 늘 자기소개를 대신한 다양한 질문들에 대하여 답을 작성하게 해 볼 때가 있다. 그때 물어보는 질문들, 좋아하는 장면에 대하여 적어보자. 그런 질문들. 


  나는 이른 새벽의 출근길에 만나는 마을 아래로 내려온 달빛을 좋아한다. 과학적 지식과는 별개로 달이 작아졌다고 커졌다가, 그렇게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그렇게 반복되는 시간이어도 나는 달빛이 참 좋다. 그래서 달이 뜨면, 달이 떴다고 전화를 하고, 달과 관련된 신문 기사를 보기만 해도 함께 달을 보고 싶은 마음에 또 전화를 한다. 그렇게 달이 좋다. 근데 먼 출근 거리에 새벽에 길을 나설 때 푸르스름한 아직 채 밝지 않은 하늘에 달이 마을 가까이로 그렇게 내려온 것을 보면, 신의 은총 같아서 참 좋다. 가난한 마을에 내려주는 신의 작은 위로들 같아서. 

  살아가면서 좋아지는 일들이 더 많아지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처럼, 나도 그렇게 좋아하는 일들이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대단하게 좋은 일도 많아지고, 사소하게 좋은 일도 참 많아지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일상의 평온함이 좋은 것들과 함께 늘 감동으로 다가오기를 나는 바란다.      


2. 오늘


  마늘을 한 접 더 사오는 것으로 남은 겨울을 준비합니다 그대로 두어야 할 것은 분명하지만 새로 들여야 할 것을 잘 알지 못하는 탓에 반쯤 낡았고 반쯤 비어 있는 채로 새해를 맞습니다 어제는 ‘들’이라 적어야 할 것을 ‘틀’로 잘못 적었지만 고치지 않았습니다 달라질 것은 이제 많지 않습니다 내일은 바람이 잦아든다고 하니 구경을 겸해 뒷산을 오를 것입니다 며칠 전 내린 큰 눈이 아직 나무들 위에 쌓여 있을 테고 그러나 어디서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날리는 백매(白梅)를 함께 보았던 사월도 부럽지 않을 것입니다(92쪽)


  시인의 강연을 듣고 나서, 시가 더 좋아지는 것은 단 한 번의 만남이어도 그것이 참 소중하여 기억하게 되기 때문이다. 좋았다. 시인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었던 시간은. 


  시인의 강연을 듣기 위해 시집을 다시 꺼내 시를 읽었다. 처음 이 시집을 읽었을 때 가장 마음에 들었던 시는 ‘삼월의 나무’였다. ‘우리의 끝이 언제나/한 그루의 나무와/함께한다는 것에 있다’는 그 구절이 참 좋아서 그 시가 좋았었다. 그런데 다시 읽을 땐, 다른 시들이 더 많이 마음에 들어왔다. 어느새 내 생활은 2018년의 그때보다 조금 더 안정되어 있고, 마음의 열망은 조금 식어 평온함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며, 함께하는 일상들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더 커졌다.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도 계절 산문과 비슷하게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감이 드러나는 시들로 묶여 있다. ‘오늘’은 남은 겨울을 준비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새해를 준비하면서도 무엇을 새로 들여야 할지 몰라 반쯤 낡고 반쯤 비어 있는 채로 새해를 맞이하는 사람. 달라질 것도 많이 없어진 나이인지도 모르겠다. 겨울나무에 쌓인 눈이 떨어질 때 화자는 지난 사월 함께 매화꽃을 보았던 그때를 떠올리며 부럽지 않을 것이라 말하고 있다. 새해를 맞이하는 그 순간. 

  일상을 살아가다 만나게 되는 어떤 기념일들에 대하여, 마음을 쓰던 순간들이 있다. 사람들에게 카톡을 보낼 때에도 꼭 밤 12시, 날이 넘어가는 시점에 보내면서 그 누구보다 먼저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과 함께 축하받고 싶은 마음들이 있었다. 새해는 더 큰 의미였다. 나에겐. 늘 새해에 하고 싶은 것들을 하나하나 적어 마음을 크게 부풀리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점점 변해가는 것을 느낀다. 화자가 ‘마늘을 한 접 더 사오는 것으로 남은 겨울을 준비’하는 그 마음처럼 차곡차곡 오늘과 내일을 준비하며 살아간다.      


3. 정리


  시인의 강연을 듣고 집으로 돌아와, 아이와 밥을 먹고 마트를 가고, 그리고 다시 집에 들어와 브런치 글을 쓴다. 글을 쓰다 다시 일어나 마트에서 사 온 양파를 깨끗이 씻어 놓는다. 그동안 아이는 큐브를 맞추느라 정신이 없다. 탁탁탁 돌아가는 큐브 소리가 마냥 좋다. 아이와 한 공간에 있어도 각자 다른 일을 하는 그 일상에서도 따뜻함이 있는 것, 나는 그 순간이 참 좋다. 

  시인의 산문집과 시집을 읽으면서 내내 느껴지는 마음의 따뜻함이 꺼지지 않아서 그런 마음이 들었나 보다. 시인의 목소리가 정말 너무 좋았고, 생각보다 키가 많이 컸으며, 책에서 읽었던 내용이 떠올라 강연을 듣는 중간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가을이다. 시인의 시 ‘가을의 말’에 나오는 구절, ‘여름보다 이르게 가는 것들 지나, 저녁보다 늦게 오는 마음 지나, 노래 몇 자락 지나, 과원果園 지나, 넘어짐과 일어섬 그마저도 지나서 한 이틀 후에 오는 반가운 것들’ 그 구절이 맞이할 나의 가을을 기다리게 한다. 넘어섬과 일어섬을 지난 한 이틀 후에 오는 그 반가운 것들을 기다리는 마음이다. 지금 나는.      


[이야기 나눠보기]

1) 계절 산문을 써 본다면, 나는 어떤 계절의,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까? 

2) 여러분의 오늘은 어떤 모습입니까? 시 ‘오늘’처럼 여러분의 ‘오늘’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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