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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리바라기 Sep 25. 2023

책들의 시간 53.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_박완서 에세이_세계사


  학교 다닐 때를 되돌아보면 나는 선생님의 영향을 참 많이 받은 학생이었던 것 같다. 중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이 국어 선생님이셨고, 중학교 2학년 담임 선생님도 국어 선생님이셨다. ‘넌 나를 참 많이 닮았구나.’ 그리 말씀해 주신 담임 선생님과 방학이면 ‘버려진 배추들에 마음이 아프다’라고 적힌 엽서를 보내셨던 담임 선생님 생각이 학교에 있을 때면 종종 난다.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 땐 나이가 지긋하고 풍채가 좋으신, 그러나 늘 술 냄새를 미세하게 풍기셨던 국어 선생님을 좋아했으며, 그분이 하신 ‘목소리가 낮고 부드러워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구나’라는 말씀이 힘이 되어 못난 얼굴에 자존감이 떨어질 때에도 ‘나는 목소리가 좋은 사람이야’ 그렇게 마음의 힘을 얻곤 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문학 선생님은 내게 ‘벼리’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알려주신 분이시고, 그분이 늘 하시던 ‘주말은 책과 함께’를 나는 담임일 때 금요일 종례마다 아이들과 외치곤 했다. 기억에 오랜 남아 이제는 삶이 되어 버린 말들이 내게 함께한다. 거짓말처럼 그분들 모두 국어 선생님이셨고, 나는 그렇게 ‘국어’가 좋았었다. 

  중학교 때였다. 국어 선생님의 반 답게 학급엔 학급문고가 비치되어 있었다. 몇 권 안 되는 책 중, 내 기억에 박힌 책이 바로 박완서 작가님의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였다. 제목이 너무 강렬하여, 매달 보는 시험에, 성적으로 복도에 명렬표를 붙였던 참 잔인했던 학교 생활에 그 책의 제목만으로는 나는 위로가 되었던 것 같다. 그것이 나에게 ‘박완서 작가님’을 기억하게 했던 첫 번째 사건이다. 

  그리고 드라마 ‘나목’. 박근형 배우와 김희애 배우가 주연이었던 드라마. 그 특집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았었다, 나중에 ‘나목’이 박완서 작가님의 첫 작품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책에 실린 ‘중년 여인의 허기증’을 읽으면서 ‘나목’을 쓰고 있는 사십 세의 박완서 작가님을 떠올리니,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울렁임이 있었다.      


1.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1학년 때도 시험 치는 일이 잦아 시험지에 이름을 쓸 때마다 나는 고민도 되고 짜증도 났습니다. 복잡하고 획수가 많은 내 한자 이름은, 성명을 기입하라고 마련된 네모난 빈칸을 삐져나오기 십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집에 가서 엄마한테 내 이름이 너무 어렵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더니 엄마가 하시는 말씀이, 나는 밤 열두 시에 태어났는데 여아를 순산했다는 소식을 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두 분이 그때부터 밤새 머리를 맞대고 옥편을 찾아가며 지으신 이름이 내 이름이라는 거였습니다. 그 후 다시는 내 이름에 대한 불평을 안 하게 되었습니다. 불평은커녕 새 생명을 좋은 이름으로 축복해 주려고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을 두 남자, 점잖고 엄하기로 집안에서 뿐 아니라 마을에서도 알아주는 상투 튼 할아버지와 젊은 아버지를 떠올리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존중받고 사랑받았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132쪽)


  이 책은 작가님이 발표하셨던 수많은 수필 중 몇 편을 다시 추려 만든 것이다. 그래서 발표의 시기가 다 다르고, 시간 순서대로 엮이어 있지도 않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수필은 ‘할머니와 베보자기’이다. 서울로 이사를 간 손녀가 개성으로 소풍을 온다고 하니, 할머니가 개성역으로 마중을 나온다. 일본인 여선생님과 함께, 학급 친구들이 다 같이 소풍을 개성으로 가던 시절, 일제강점기였지만, 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작가의 모습도 새로웠고 개성으로 소풍을 가던 시절에 대한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할머니가 자신을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는 어린 작가의 모습, 그리고 그런 아이를 발견하여 이름을 부르는 할머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넘치는 사랑의 모습이어서. 그리고 그림이 그려졌던 부분이 인용한 부분이다. 딸, 할아버지에게 있어서는 손녀가 태어나자 머리를 맞대고 이름을 짓는 모습이 얼마나 따뜻한지 가슴이 촉촉해져 왔다. 


  나의 이름은 두 개다. 아빠가 지어주신 호적상의 이름과 할머니가 절에서 지어 온 이름. 어린 시절 이름이 두 개인 것이 마냥 재미있긴 했지만, 나는 아빠가 지어주신 내 이름을 참 좋아했다. 어느 장군의 이름에서 따온 중성적인 느낌의 이름. 어린 시절 아빠 무릎에 앉아 ‘잔다르크’를 보던 한 장면의 기억이 오래 남아 있다. 중성적 이미지의 이름으로 인해 남자아이냐고 병원에서 많이 물어보았다고도 들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이름을 지어놓고 불렀다는 아빠의 사랑이 나에게는 크디크다. 그래서 이 부분의 수필을 읽을 때 괜스레 눈물이 핑 돌았다. 나도, 참 많이 사랑을 받고 태어났구나, 그런 마음. 사랑받은 기억은 이처럼 힘이 세다. 그래서 사랑이 필요한가 보다.      

  사랑은 내리사랑인 것임을 잘 안다. 부모님께 받은 사랑의 힘이 참 큰데 나는 그 사랑의 힘을 딸에게 전하고 있다. 엄마에게 좀 더 잘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처럼 쉽지 않다. 그런데 딸에게는 마음을 먹을 필요가 없이 잘하고 있다. 우리 아이가 사랑을 많이 받아, 넘치는 그 사랑으로 풍성하고 충만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길 바란다.      


2. 중년 여인의 허기증


  식구들을 위해 장을 보고 맛있는 반찬을 만드는 일, 매일매일 집 안 구석구석을 쓸고 닦아 쾌적하고 정갈한 생활환경을 만드는 일, 아이들 공부를 돌보고 가끔 학교 출입을 하는 일, 뜨개질 옷 만들기 – 소위 살림이라 불리는 이런 일들을 나는 잘했고, 또 좋아했지만, 아무리 죽자꾸나 이런 일을 해도 결코 채워질 수 없는 허한 구석을 나는 내 내부에 갖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210~211쪽)     

  자랑할 거라곤 지금도 습작기처럼 열심히라는 것밖에 없다. 잡문 하나를 쓰더라도, 허튼소리 안 하길, 정직하길, 조그만 진실이라도,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진실을 말하길, 매질하듯 다짐하며 쓰고 있지만, 열심히라는 것만으로 재능 부족을 은폐하지는 못할 것 같다.(216쪽)


  수필의 제목이 ‘중년 여인의 허기증’이다. 살아가면서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어떤 갈망들이 있기는 하다. 워낙 체제든 상황이든 순응적인 성격이라, 갈망 또한 오래가지 못했고, 행복에 대한 진입 장벽도 낮아 작은 일에 쉽게 행복해했다. 물론, 그 행복이 주는 기쁨의 지속시간은 짧아 잦은 성취와 행복감이 필요하긴 하다. 그래서인지 ‘채워질 수 없는 허기증’이란 말을 들었을 때 바로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작가가 우연히 잡지에서 소설 공모를 보고는 성실한 노동처럼 글을 쓰고, 그리고 결과를 기다릴 때의 모습, 그 작품에 대한 애착으로 마음이 들썩들썩하는 장면을 읽을 때, 브런치 작가 도전 후 메일을 기다리던 순간이 떠올랐다. 감히 작가의 상황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순간이지만, 나에게는 참 중요한 순간이었기에 답신을 기다리는 마음이 초조했다. 사실, 잠들기 전 늘 브런치 글을 읽곤 했는데, 그때마다 어쩜 이렇게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많을까, 그렇게 생각했더랬다. 브런치 작가는 일기를 적었다가 떨어지고는 일주일 만에 다시 마음의 준비를 하고 독후감상문을 써서 붙었다. 

  ‘브런치 작가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메일 제목만으로도 가슴이 쿵쾅거렸다. 퇴근 중이어서 메일을 제대로 열지는 못하고 마음만 급했다. 그게 작년 구월의 일. 벌써 책을 읽고 쓰기 시작한 글이 52편이 넘었다. 일 년 52주의 기간 동안 참 성실히 글을 썼다. 다만, 인기 있는 글은 아니어서 구독자도 많지 않고, ‘하트’도 많지 않지만, 글을 쓰는 동안 나는 행복했으며, 조금씩 성장하고 있으며, 감정의 고요와 안정을 경험하고 있다. 어떤 날은 딸이 읽었으면 좋겠단 마음으로 글을 쓰기도 하고, 어떤 날은 차마 말하지 못한 연서를 쓰는 마음으로 최대한 감정을 숨겨서 적기도 한다. ‘브런치 스토리’의 글쓰기는 나의 작은 열망이었으며, 지금도 이어지는 열심이다.      


3. 정리


  박완서 작가님의 글은 워낙 유명하여, 괜스레 모든 글을 읽은 것 같은 착각을 느끼기도 하고, 또 학교 교과서에도 많이 실려 있어 익숙하기도 했다. 독서 모임의 책으로 선정되어 다시 읽으면서, 작가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개인적 아픔의 깊이를 헤아릴 수는 없지만, 그 과정 가운데 위로가 되기도 하였으며, 나이 듦에 대한 생각도 조금은 정리가 되는 기분이었다. 책은 늘 많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경험하게 하고, 특히 수필은 진실된 삶의 어떤 모습에 때로는 경건함을 느끼게도 한다. 그래서 나는 책이, 책 읽기가 참 좋다.      


[이야기 나눠 보기]

1) 사랑받은 기억은 사람을 여유롭고 풍성하게 만듭니다. 사랑받은 기억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2) 일상을 살아가면서 채워지지 않는 어떤 허기, 간절히 채우고 싶은 어떤 열망이 있는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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