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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리바라기 May 13. 2024

책들의 시간 85.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 정세랑 에세이, 위즈덤하우스

  책을 읽는 일주일이 내내 행복했다. 재미있는, 술술 읽히는 책을 읽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 워낙 정세랑 작가님의 책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제목이 그다지 와닿지 않았으며, 또 굳이 여행기를 읽고 싶단 마음이 없었기에 오랫동안 읽기를 망설였던 책이다. 그러다 이제 읽기 시작했다. 나중엔 책이 끝나가는 게 아쉬워 잠시 덮어두었다가 마음이 근질근질하여 다시 읽은 책. 책 속 구절에 공감이 가는 부분이 워낙 많아서,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책 속 구절을 옮겨 적어 보내기도 여러 번. 재밌게 잘 읽은 책이다.   

   

1. 좋아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하기. 


  태어나서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푸른색들이 거기 있었다. 그저 들판과 자그마한 마을 하나를 그린 것뿐이었고 미완성작인데도 말이다. 세잔은 같은 제목, 그 평범하기 그지없는 제목으로 여러 점을 그렸다. 대작도 아니고 유명한 작품도 아니지만 완전히 매혹당하고 말아서 얼떨떨했다. 

  그런 경험들로 분명해지는 것 같다. 인상파 화가들을 좋아하는 마음이란 뭉뚝하지만, 세잔을 좋아하는 마음은 뾰족하고 정확하다. 세잔의 그림 하나를 좋아하는 마음은 더더욱 그렇다. 좋아하는 대상을 정교하게 좁혀나가는 데는 특별한 즐거움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 사람 내 작가야, 내 화가야, 그 그림 내 소유는 아니지만 그 내 그림이야……. 모호함을 덜어내고 확신을 보석처럼 꽉 쥐는 일의 충족감이 있었다. 무엇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이 쉬워진 세상이지만, 좋아하는 것이 많은 사람이 분명 더 행복하지 않을까?(362쪽)


  이 책은 여행의 장소별로의 일화가 담겨있는 여행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읽을수록 작가의 가치관과 삶이 더 잘 이해되는 책이기도 했다. 작가가 영국 런던 여행에서 만난 세잔의 그림을 보고 감상을 적은 부분이다. 작가의 말에 완전 공감이 되었다. 어떤 경험들로 분명해지는 마음들이 있다고 믿는다. 

  뭔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경험들로 분명해지며 그 대상들을 정교하게 좁혀나가는 데에 특별한 즐거움이 있다는 구절처럼, 요즘 점점 뭔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고 있다.      


  나의 여행기, 동네 산책. 퇴근하고 저녁에 늘 걷는 동네 길이 있다. 삼월, 봄인데도 벚꽃이 피지 않기에 오래 기다렸다. 그랬더니 어느 날 꽃이 만개하더니만 작은 꽃 터널이 만들어졌다. 달빛에 비친 꽃을 보는 것이 참 좋았다. 그리고 비가 오고, 꽃이 지고, 길에 하얀 꽃잎이 쌓이더니만 어느새 잎이 푸릇푸릇 무성해졌다. 또 봄에 라일락 향이 산책길을 감싸더니만 다시 밤 산책을 하는데 이번엔 아카시아 꽃 향기가 난다. 좋다. 어린 녹색의 단풍잎도 참 좋고, 빨간 프로펠러 같은 단풍나무 씨앗도 좋았다. 유난히 잎이 큰 나무는 이름이 무엇인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녹색의 잎에 연둣빛이 도는 산딸나무꽃은 신비롭기도 했다. 처음 그 나무 꽃이 신기해 찾아보았더니, 이름을 알게 되고, 이름을 알게 되니 온통 5월 초 산딸나무만 보인다. 


 계절의 변화가 산책을 더 풍요롭게 했다. 동네 산책길엔 수국이 없어서 아쉽기는 하지만, 여름이면 앵두가 열리고 가을이면 낙엽이 졌고 겨울이면 나뭇가지만 앙상했다. 그럼에도 계절의 변화를 산책길에서 만나는 것이 나는 참 좋았다. 겨울엔 봄이 올 때의 그 여린 움직임이 기다려지기도 했다. 

  아직은 좋아하는 마음이 뭉뚱 하지만 점점 정교해지리라 믿는다. 작년에 보지 못했던 것을 올해 산책길에서 발견하면 보물을 찾은 기분이 든다. 내가 알지 못했던 자연의 한 모습을 발견한 기분이다. 좋아하는 것을 이제는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2. 여행하는 삶


  필수적인 휴식이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고 일부에게만 주어지고 있는 것 같다. 누구나 당연히 인간적인 휴식을 누릴 수 있는 사회는 요원해 보이고, 혹사와 착취는 종종 근면과 편의의 표면을 하고 있어 구분을 하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듯하다. 모두가 쉴 때 쉴 수 있게, 일하다가 병들거나 죽지 않게 조금씩 불편해지는 것도 감수하고 싶은데 변화는 편리 쪽으로만 빠르고 정의 쪽으로는 더뎌서 슬프다.(150쪽)


  아르바이트를 한 것도 일을 한 시기라고 포함한다면, 나는 스무 살 때부터 일을 해 왔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고 잠깐 쉬었으며, 임용 공부를 할 때 잠깐 쉬었으니 그 시기를 빼면 이십 년이 넘는 세월이다. 그동안을 참 성실히 살아왔다. 여전히 일하는 것이 참 재미있고,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교사로 10여 년을 일하면서 처음과 조금 바뀐 점이 있다. 일과 삶의 균형 찾기. 


  수업 준비를 하면서 늘 시간이 부족해 주말이면 노트북과 교과서와 자료를 잔뜩 챙겨 와 집에서도 일을 했으며, 시험문제를 출제할 때는 밤에 잠을 잘 자지도 못했다. 아이가 배고프다고 말할 때, 밥 차려주는 시간이 아까워 울기도 했다. 일을 해야 하는데 밥을 차려야 해서.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런 잘못된 관념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일을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이 과하기도 했고, 학교에서는 여유로운 척, 일을 잘하는 척, 그런 척을 하느라 집에서 내 시간을 쪼개서 일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일과 삶의 균형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다. 아프지 않고 일하기 위해서. 


  먼 곳으로의 여행만 아니라 가까운 곳의 여행, 한나절의 외출, 예쁜 식물 카페에서의 책 읽기, 작은 산책, 좋은 사람들과의 저녁 식사. 이런 모든 시간이 나에게는 여행이다. 일에서 잠시 벗어나 에너지를 충전하는 여행.  필수적인 휴식이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고 있는 사회라는 것을 잘 안다. 작가의 말처럼 변화는 편리의 방향으로는 빠르고 정의 쪽으로는 더디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개인의 삶에서 개인이 추구하는 여유와 가치관의 변화, 실천이 모여 삶을 대하는 방식이 다양해질 거라 생각한다. 그것이 아주 작은 변화의 시작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3. 정리

  좋아하는 선생님들과 유명하다는 만두 파는 집에 갔다 왔다. 차를 타고 가면서 보게 되는 풍경들이 참 좋았다. 특히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시 구절을 이름으로 한 카페에서는 멀리 보이는 언덕의 풍경과 바람과 그날의 공기와 이야기들이 좋아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쉼이었다. 

  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하던지, 문득 책의 제목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의 구절이 이해되기도 하였다. 이 공간과 시간의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그 소중함을 알고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런 의미. 나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이야기 나눠 보기]

1) 자신이 정말 사랑하는, 또는 사랑한 여행지가 있다면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2) 여행이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이며, 여행이 필요하다 여긴 순간이 있다면 언제인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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