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벼리바라기 May 20. 2024

책들의 시간 86. 풀업

# 강화길 소설, 현대문학 H 시리즈

  제목이 의미하는 게 뭔지도 잘 몰랐지만, 강화길 작가의 소설이라니, 읽고 싶었다. 강화길 작가의 단편 ‘음복’이 워낙 강렬했기에, 다른 몇 편의 책을 읽었어도 ‘음복’만큼 크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좋아하는 작가로 이야기할 만큼 책들은 늘 생각할 것들을 많이 내포하면서도 조금은 불편하게, 그러면서도 어렵지 않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현대문학 PIN 시리즈의 책이다. 손에 잡히는 크기의 책으로 참 잘 읽힌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제목 ‘풀업’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러고는 피식 웃음이 났다. 

 

 요새 아침마다 출근하면 선생님들과 학생들을 위해 마련된 체육공간에 들어가 철봉에 매달리곤 한다. 예전부터 매달리기는 1초도 하지 못했지만, 그냥 턱을 괸 상태로 매달리지는 않더라도 철봉에 매달려 버티는 것만으로 운동이 된다는 체육 선생님의 말씀에, 10초만 매달려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지 어느덧 한 달이 넘었다. 사실 그 효과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다만 처음엔 10초를 매달렸다면 지금은 20초를 매달릴 수 있는 정도의 미비한 변화이지만 그래도 그냥 철봉에 매달려 숫자를 세는 것이 좋아서 아침마다 빼먹지 않고 한다. 근데, 그 철봉 같은 운동기구가 ‘풀업’ 기구였다니, 책을 읽고 ‘풀업’을 찾아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재밌고 신기하고 놀라우면서도 기분 좋은 우연.     

 

1. 변화의 시작, 운동의 힘


  지수는 전체적으로 마른 편이었지만, 배가 조금 나왔고 어깨와 팔뚝에 살이 많았다. 그에 비에 다리는 앙상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특별히 싫어하지도 않았다. (보통 사람의 평범한 몸이라고 생각했다.) 그녀 역시도 유명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을 보면 질투와 경외감이 들었고, 어떤 열망이 일어나곤 했다. 그런 몸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 질투하고 경외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런 감정을 받는 대상이 되는 것. 하지만 상상은 딱 거기까지였다. 지수는 그 이상 바라지도 않았고 그 열망을 위해 노력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40쪽)


  전세 사기로 엄마의 집에 들어가 살게 된 지수는 잠을 잘 자지 못하며, 미운 사람들이 나오는 꿈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매번 새벽에 깨서 엄마가 거실로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 창밖을 바라보던 지수는 어떤 여자의 모습에 이끌려 그 여자를 따라가 헬스장에서 운동을 등록하게 된다. 그리고 지수는 조금씩, 서서히, 그리고 마침내 달라진다. 

  그 여자가 하고 있던 운동이 ‘풀업’이었다.      


  여자는 지수의 인생에서 단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고, 상상해 본 적 없는 운동을 하고 있었다. 철봉처럼 생긴 높은 기구에 두 팔로 매달린 채, 온몸을 들어 올렸다 내리고 있었다. 여자의 몸이 위로 올라갈 때마다 등의 근육이 꿈틀거리며 모양이 잡혔다. 지수는 그 모습에 조금 넋이 나갔다. 뭐랄까, 여자에게서 어떤 힘이 느껴졌다. 무슨 일을 겪든, 어떤 일이 일어나든, 절대 꺾이지 않을 것 같은 그런 힘. (37쪽)


  지수에게 건강한 마음을 만들어 주었던 운동이 근력운동이었다면, 나에는 그런 변화의 시작은 바로 걷기였다. 지금 생각해도 참 감사한 일이다. 이렇게 걸을 수 있다는 것, 걷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걷는다는 것. 물론 걷는 것 이상으로 많이 먹고 많이 자서 나는 날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나는 단단해졌다. 몸과 마음이. 걷기를 통해. 


  내가 인식하는 나의 모습과 타인이 인식하는 나의 모습이 다르다. 예전에는 타인이 인식하는 나의 모습에 나를 맞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고 싶어서. 조금 더 친절하고 배려심이 넘치고, 예쁜 사람이고 싶어서. 하지만 몰랐었다. 이미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것을 모른 채 나는 현실의 나를 부끄러워했던 적이 많았다. 그러니 늘 움츠린 채 살았고 자존감은 낮았으며, 사람들의 눈을 잘 쳐다보지 못했고, 늘 나의 감정보다 타인의 감정을 살피는데 익숙했다. 걸으면서 조금 달라졌다. 스스로 이미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나니,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은 열망이 타인을 향하지 않고 나를 향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좋았다. 다행이고.          

 

2. 가깝고도 먼 관계, 가족. 


  그때 느낀 당혹감과 억울함. 그러면서도 그녀 자신이 잘못했을지 모른다는 의심. 동시에 밀려드는 어떤 역겨움. 지수는 그 ‘마음’에 대해, (지금까지도) 영애 씨에게 절대 말하지 않았다. 숨겼다. 그리고, 영애 씨를 향한 진심 역시 감췄다. 

  그러니까 사실 지수는 엄마인 영애 씨가 어색하고 불편하다는 것. 

  그래서 말이 많아진다는 것.

  지수는 그 사실에 오랫동안 죄책감을 느꼈다. (29쪽)


  이 책의 가장 주된 내용은 결국 엄마와 딸, 자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서른 중반이 되도록 전세 사기를 당해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와 함께 사는 미혼 딸. 그런 언니에게 늘 가시가 돋친 말을 하는 동생. 그걸 가만히 듣고만 있는 주인공 지수. 


  책을 읽으면서 내내 가족 관계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로 가족을 설명하던 시절이 있었고, 지금도 유효하긴 하지만 가족의 구성 자체가 많이 달라진 요즘임을 느낀다. 

  지수는 학창 시절 억울하게 담임 선생님의 언어폭력에 노출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지수가 느낀 감정, 당혹감, 억울함, 그리고 자신이 잘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늘 다른 사람의 감정을 헤아리고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들여다보는 아이였을지도 모를 지수. 지수는 끝내 엄마에게 자신이 느꼈던 그 마음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 또한 지수는 엄마가 불편하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말이 많아졌다. 우리가 어색함을 덜기 위해 정말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듯이. 


  나는 엄마에게 살가운 딸이 아니다. 엄마랑 내가 느끼는 어떤 친밀감이 분명히 있지만 엄마의 이야기를 친밀하게 들어주는 딸도 아니며, 엄마도 나에게 말하지 않는 무언가가 참 많으신 것을 잘 안다. 그래서 엄마에게 친구가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내가 끝끝내 말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이 있듯, 엄마도 그러함을 알게 된 후 나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가족이지만 적당한 어색함, 거리감, 그리고 독립적 관계. 나는 그게 마음에 든다. 

  그런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엄마의 양육에 영향을 받은 건 아닐까? 아니면 타고난 어떤 성격적 측면에서 기인한 걸까? 중학교 시절 학부모회 회장을 맡을 정도로 사교적인 엄마의 기대에 나는 늘 못 미치는 딸이었다. 전교 1등을 해 주면 엄마 기가 살 것 같은데, 반에서 2~3등 하는 학생이었으며, 집에서도 화장을 곱게 하시고 원피스를 입고 늘 바른 자세로 천천히 어깨를 펴고 걸으시는 엄마와 달리 늘 어깨를 움츠리고 땅만 보며 걷던 나였기에 엄마는 늘 내게 살을 뺐으면 좋겠다고, 어깨를 펴고 배에 힘을 주고 걸으라고 말씀하셨다. 마흔이 넘도록 엄마의 애정 어린 걱정과 잔소리는 끊임없었다. 가끔, 아주 가끔은 스트레스를 받긴 했지만, 결론적으로는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스트레스는 그때뿐이었으며 이내 내 삶의 일상을 찾아 나갔다. 대학을 집에서 조금 먼 곳을 간 것, 일찍 결혼한 것 등 청소년기를 제외하고는 엄마와 떨어져 지냈던 시절이 더 많았던 것이 오히려 독립적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도와준 것은 아닐까?      


  소설 속 지수처럼 가족이 어색하고 불편하며,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어쩌면 ‘소유’의 개념이 더 익숙한 가족 관계가 그런 죄책감을 갖게 했는지도 모른다. 또 유교 사회의 관념이 뿌리내린 사회에서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 부모의 말에 순종적인 자녀에 대한 인정 등 사회적 분위기도 죄책감을 갖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적인 가족상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가족의 특성과 자신의 성향에 대한 이해, 그리고 공감이 지금 우리에겐 어쩌면 더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3. 정리


하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인 건 근육이 잡힌다는 점이었다. 이전에는 허리를 손으로 잡으면 물렁물렁했다. 하지만 이제는 꽤 단단했다. 마치 살의 조직 자체가 변한 것 같았다. 체력도 좋아졌고, 잠도 훨씬 잘 자고, 말 그대로 튼튼해졌다. 건강해진 것이다. 

  물론 그녀가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기분, 강해진 것 같다는 인상은 착각일 수도 있었다. 몸이 튼튼해졌다고 해서 인생의 고난 앞에서도 강해지리라는 법은 없었다. (105쪽)


  지수가 운동을 통해서 얻은 것은 근육, 단단한 살의 조직, 체력뿐만이 아니었다. ‘강해진 것 같다는 인상, 기분’, 나는 지수가 운동을 통해 삶을 살아가는 자세에 대하여 익힌 것이라 이해했다. 책의 말미에 작품에 대한 해설과 비평이 실려 있다. 비평을 읽으면서 책을 좀 더 잘 이해하고 되었다. 우리가 우리에 대하여 말하지 못하는 어떤 것들이 우리가 우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스스로를 이해하고 발견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도 잘 알게 되었다. 

  공감 가는 부분이 유난히 많은 소설이다. 재미있다. 읽는 내내 엄마를 떠올리기도 했으며, 내가 가진 결핍과 부족에 대하여도 생각했다. 유난히 관계 맺기를 어려워하는 마음도 들여다봤으며, 구구절절 이야기를 하고 돌아온 날 자책과 반성으로 일기를 쓰던 시간들도 떠올렸다. 그러면서 걷는 것이 나에게 준 변화에 대하여도 생각했다. 이야깃거리가 참 많은 소설이다. 

  소설 속 지수가 선택한 삶이 엄마와 동생 미수에게도 긍정적 영향을 주었으면 좋겠다.      


[이야기 나눠 보기]

1) 변화의 시작이 되었던 활동, 행동, 또는 계기가 있다면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변화 전과 후의 자신의 모습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2) 가족과의 관계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보일 수 있는 가족이 있다면 누구이며, 그렇지 않은 가족이 있다면 왜 그런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작가의 이전글 책들의 시간 85.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