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고도 씁쓸했던 어린시절 커밍아웃 02
17살 때 친형은 죽었다. 자살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빠한테 연락이 왔다.
- 경비 아저씨가 전화가 왔는데, 우리집 난간에서 누가 떨어지는 걸 봤다고 해. 집에 한 번 가 봐야겠다.
나는 누가 잘못 본 것 가지고 너무 오바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며 전화를 끊었다. 선생님한테는 잠깐 집에 다녀와서 수업을 들어야 한다 – 수업료 아까우니까 다시 꼭 오겠다고 말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따라 날씨가 화창했다. 이제 막 추운 봄이 끝나서 얇은 셔츠 하나 입고 밖에 돌아다니기 좋은 날씨였다. Avril Lavigne의 What the hell을 들으며 추위에서 시원함으로 변한 봄바람을 정면으로 만끽했다. 어떤 불안한 징조 없이 날씨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상상할 수 없는 불운은 막상 겪기까지 가늠조차 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저 신났던 거 같다. 아무 일 없을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 그렇게 굳게 믿었으니까.
현관문을 열었을 때 다 닫힌 문들 사이에서 열린 문 하나를 보았다. 베란다 문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회색 후드티가 벗어져 있었다. 형의 것이었다. 나는 아빠한테 전화했다. 그리고 무슨 대화를 했을 텐데, 아빠의 목소리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후에 나는 장례식장에 놓여져 있었다.
경찰로 보이는 사람이 아빠한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부검까지는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타살은 아닌 것 같다. 집에 있는 컴퓨터와 일기장을 살펴보니 평소에 죽음에 대해 생각해 왔던 것 같다. 그래도 부검을 해야 한다면 해도 된다. 하지만 몸을 다 헤집어 놓기 때문에 같은 아들을 둔 입장에서 이 방법은 안 했으면 좋겠다. 뭐 대충 이런 내용의 말들을 중년의 아저씨가 하고 있었다.
둘의 말을 듣는데 심장이 이전과는 다르게 뛰기 시작했다. 집에 있는 컴퓨터를 다 살펴봤다는 대목에서 며칠 전에 검색한 키워드들이 떠올랐다. 게이. 남자 성기. 이반. 또 어느 겹겹이 쌓인 노란색 폴더에 있는 야동들이 떠올랐다. 이 모든 것이 들키고 말면 인생이 끝날 것 같았다. 형의 죽음에 슬퍼해야 했지만, 게이인 게 들킬까 봐 두려웠다. 죽음보다 아웃팅이 더 무서웠다.
형의 장례식장에서 나는 울지 않았다. 눈물이 나지 않았다. 슬퍼하는 대신 자책했다. 죄책감이 나의 모든 감정을 지배했다. 내가 게이인 게 뭐라고. 그거 밝혀지는 게 뭐라고. 죽음 앞에서마저 슬퍼하지 않고 어떻게든 집에 가서 컴퓨터에 남겨진 흔적들을 지울 생각만 하는지. 내가 하는 생각들이지만 나조차 납득할 수 없는 것들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같은 생각을 반복하다 보니 신박하고 영악한 변명들이 떠올랐다. 그건 바로 나는 일반이고 형이 게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얼마 후 컴퓨터를 다 살핀 경찰로 보이는 아저씨가 ‘오 - 오늘 죽은 당신의 아들은 게이예요. 그걸로 삶을 비관했어요.’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빌기 시작했다. 검색창에 내가 남긴 키워드에는 성적인 것 말고 성정체성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춘기의 슬픔에 관한 것들도 있었으니까. 예를 들면 게이 왕따. 게이 정신병. 게이 자살. 죽은 사람은 말을 할 수 없으니까. 이 방법도 좋다고 순간 생각했다. 정말 어리석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이 잠깐은 형이 게이였다고 치고. 그 이후 나는 영영 엄마 아빠한테는 남자를 좋아하는 걸 말하지 못하는 건가? 그러다가 여자랑 결혼을 하고 자칭 플라토닉 러버로 살며 중간중간 유부남 게이 커뮤니티에 들어가서 몰래 만남을 해야 하는 건가. 나는 원래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인간이었나. 나는 왜 살지. 나도 죽어야 하나. 죽어야 할 사람은 난데 왜 형이 죽었을까.
형의 죽음 앞에서 이기적인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정말 미웠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나에 대한 미움이 형에 대한 짜증으로 변해갔다. 왜 죽어서 날 아웃팅 위기에 빠뜨렸는지로 시작해 삼일 내내 육개장만 먹는 것도 싫었다. 장례식장에서 치킨을 시켜 달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그리고 이 좋은 날. 이제 모든 것이 찬란할 것만 같은 날씨의 이때. 나의 모든 사기를 꺾고 죽은 형이 참 싫었다.
장례식 마지막 날에는 어떤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냥 집에 들어가고 싶었다. 우는 사람도 보기 싫었고 나에 대한 자책도 하기 싫었고 형에 대한 미움도 키우고 싶지 않았다. 그냥 집에서 푹 자고 싶었다. 다시 돌아가서 원래의 일상을 찾고 싶었다.
사람이 죽으면 삼일장을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삼일장은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모든 감정이 없어졌다. 아마 내가 슬픔을 느꼈다면 슬픔도 없어졌을 것이다. 상주하며 조문객을 받고 인사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장례식이 끝나니 나의 정신과 몸은 탈탈 털려 있었다. 아무 생각을 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른 것이다. 그렇게 17년간 같은 집에서 살아온 형의 장례식에서 슬픔은 느끼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형이 죽었어도 내 삶은 이전과 달라진 게 별로 없었다. 잠깐은 온 세계가 슬퍼했던 것 같지만 곧바로 자신의 위치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갔다.
내가 우려한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게이인 것은 여전히 아무도 몰랐다.
집에 돌아와 서둘러 컴퓨터를 켜서 이전의 검색 목록들을 살펴보았다. 형은 자살하는 방법에 대해 검색했었다. 컴퓨터를 잘 모르는 나도 몇 번의 검색으로 죽음에 대한 사인을 바로 알 수 있었는데, 경찰은 오죽했으랴. 그렇게 생각하고는 이미 클릭을 끝내 초록색에서 보라색으로 변한 링크들을 하나하나 살펴가며 형이 어떤 글을 읽고 어떤 생각을 했을지 추적해 나갔다.
‘어떤 방법으로 죽는 게 가장 아프고 안 아픈가요?’라는 지식인의 글이 눈에 띄었다. 가장 아프게 죽는 방법은 불에 타서 죽는 것이라고 누군가 댓글을 달았다. 그리고 누군가는 아파트에 떨어져서 자살하는 것이 가장 안 아플 것이라고 댓글을 달았다. 질문한 사람은 왜냐고 물었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보통 심장마비로 죽기 때문에 크게 아프지 않을 거라고 적어 놓았다. 그리곤 사족으로 ‘P.S. 높은 곳에서 떨어져서 죽는 것보다 코브라한테 물려서 죽는 게 제일 베스트예요.’라는 말을 달아 놓았다. 죽음을 장려하는 건가? 그래도 이 글을 보며 형이 그나마 안 아프게 죽을 수 있는 추락사를 선택한 것이 다행이라고 여겨졌다.
날을 더 거슬러 올라가 내가 검색한 목록을 살펴보았다. 내가 상상한 것에 비해 게이를 키워드로 검색한 것들은 찾기 힘들었다. 아니 거의 아예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토라도라. 엘펠리트. 보쿠라노. 일본 애니메이션 검색어가 주를 이루았다. 또 일부는 인터넷 강의 검색 기록이 있었다. 내 삶에서 게이라는 정체성은 극히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된 대목이었다.
1년 전쯤의 기록까지 올라갔었는데, 그때에 형은 우울함과 우주에 대한 검색을 했었다. 천체 학자들은 우주를 연구하다가 어느 궤도에 오르게 되면, 인간이 한없이 작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한다. 누군가는 그 깨달음 속에서 ‘좆같은 세상 내 멋대로 살아보자. 어차피 한낱 미물인 걸’이라고 생각하며 막살기 시작하고, 다른 누군가는 극도의 우울함을 느끼며 죽음을 선택한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형은 우주를 참 좋아했다. 고3이 읽기에 힘든 과학 잡지를 사서 구독했었고, 어떤 것들은 미국에서 직수입해서 그림 자료를 모으곤 했다. 또 나는 나이가 들어서도 읽기 힘들 것 같은 검은색 표지의 코스모스를 몇 번이고 읽는 모습을 보았다. 형은 우주를 연구하면서 아마 나름대로 배운 게 있는 것 같다. 어떤 천체학자들처럼 말이다.
며칠 후 친척들이 다 모여서 형의 물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내가 장례식장에서 게이 이슈로 자의식과잉이 되어있을 당시, 어른들은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라는 결론을 내리며 형의 흔적들을 다 지우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입을 모았던 것을 얼핏 들었다. 그리고 형의 모든 물건을 다 치우는 날이 그날이었다.
친척 어른들의 눈으로 보기에 ‘형의 것’으로 짐작되는 모든 것들이 100L 불투명 쓰레기봉투와 마트에서 주어 온 커다란 상자에 쌓이기 시작했다. 당시 유행했던 뚱뚱이 노스페이스 패딩이며 형이 수집하던 과학 잡지들이며 형의 모든 것들이 버려지고 있었다.
그때 이모가 타미힐피거 스트라이프 카라 셔츠를 집어 상자에 넣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이 옷은 버릴 게 아니라고 혼잣말하며 옷을 꺼내는 데 엄마한테 들키고 말았다.
그 옷은 형이랑 같이 입던 옷이었는데, 새 옷이었고 내가 가진 여름옷 중 가장 비싼 옷이었다. 13만 원쯤. 엄마는 하나 새로 사 줄 테니까 버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나를 설득했다. 사주지 않을 걸 알았기 때문에 안버리고 싶었다. 내가 입고 싶다고. 저 옷이 나랑 잘 어울린다고 말 대답하며 엄마와 실랑이를 벌였다. 그 순간 아빠의 모습을 보았다. 아들 잃은 사람 표정치고 생각보다 밝았다. 그러면서도 엄청난 허무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보니 복잡한 마음에 옷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정말이지 형의 거의 모든 것들이 없어졌다. 남은 거라곤 아이팟 클래식과 맨투맨 몇 벌. 그리고 소설책 몇 권뿐이었다. 친척들이 다 떠난 텅 빈 방에는 나와 형의 물건들이 있었다. 나는 형과 단 둘이 있는 것만 같았다. 몇 안 되는 버려지지 않은 것들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리고 아이팟에 담긴 음악과 소설 몇 권 만이 형을 애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직감했다.
형과 나의 음악 취향은 전혀 달랐다. 귀공자에 바른 남자의 정석이었던 형은 그 나이의 인기 있는 남학생답게 힙합을 좋아했다. 그리고 나는 그 시절 게이의 표본답게(?) 걸그룹 음악만 들었다.
아이팟 클래식 시리즈의 용량은 120GB로 당시 혁신적인 전자기기였는데, 형은 순수 노래로만 100GB를 채웠다. 곡 수로는 1만 6000곡 정도 됐었다. 그 많은 용량을 어떻게 채웠을까 경의로움이 들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형이 듣는 음악 장르의 폭이 다양했다는 거였다. 재생목록으로 구성된 곡들은 힙합이며 트로트며 클래식까지 있었다. 형이 힙합만 좋아했다는 것은 내 착각이었다.
재생목록을 하나하나 눌러가며 구경 중에 ‘동생’이라는 폴더가 띄었다. 안에 들어가 보니 내가 좋다고 형한테 소개해준 노래들이 있었다. 내가 옆에서 스피커로 큰 소리로 들을 때는 듣기 싫다고 끄라며 해드락 걸더니, 뒤에서는 이렇게 재생목록 만들어 놓은 걸 보며 내심 형제라는 게 새삼 실감이 나서 실소가 터졌다.
나는 걸그룹 노래를 듣기만 한 게 아니라 가성으로 따라 부르는 걸 좋아했다. 형은 그런 동생의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때 되게 싫어하는 표정을 지었는데, 또 동생이어서 욕할 수 없으니 어이없어서 웃는 개구쟁이 표정을 지었는데, 분명 엄청 익숙한 표정이었는데, 그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이제는 볼 수 없는 존재라는 걸 형의 아이팟을 만지는 순간순간 상기되었다. 보고 들을 수 있는 건 형이 아닌 이 아이팟과 무수히 많은 노래뿐이었다.
이어폰으로 최상단에 있는 재생목록을 틀어 노래를 들으며 형이 남긴 소설을 읽었다. 난독증에 가까울 정도로 책을 못 읽는 나였는데, 이 책은 어떻게 해서든 읽어내고 싶었다. 고백하건대 첫 한 권은 첫 10장만 20번은 읽은 것 같다. 두꺼운 소설책은 처음이었기에 두려웠고, 또 읽히지 않았다. 하지만 앞부분이라도 계속 읽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글 속에서 장면이 그려지기 시작했고, 글이 속도감 있게 읽히기 시작했다.
한 5번째 책이었을까. 책을 드는데 책 표지가 어색하게 튀어나온 느낌이 들었다. 범상치 않은 느낌이었다. 무서운 촉으로 유서인 걸 알았다. 유서는 없는 줄 알았는데, 내가 처음으로 발견한 것이다. 꼬깃꼬깃 접힌 종이를 펼치니 익숙한 글씨체가 나왔다. 또박또박 써도 흘겨진 형의 악필 글씨였다.
‘화장으로 해주세요. 엄마아빠 죄송합니다.’
원래 유서는 이렇게 현실적이야? 우주를 좋아하는 형답게 참 매정하면서도 배려 있는 첫 말이라고 생각했다.
안의 내용을 살피니 피붙이 형제로서만 이해 가는 언어로 채워져 있었다. 우리 집 가문에 흐르는 나쁜 피들이 점철되어서 우울로 번진 - 아무도 모르지만 나만 아는 말들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내 마음을 아리라.’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형의 마음을 아는 사람일까.
적어도 형은 내 마음을 알았다. 형은 내가 게이인 걸 알았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형은 중학교 1학년일 때 들켰다. 중학생은 초등학생보다 늦게 학교 수업이 끝났다. 보통은 내가 먼저 하교해서 집으로 돌아오면 2시간 정도 후에 형이 왔다. 그날도 당연히 2교시 정도 더 하고 집에 오겠지 하는 안일한 마음에 서둘러 P2P사이트에서 야동을 다운로드하고 바지를 내리고 손으로 중요 부위를 주물럭 거리고 있었다. 절정이 다 단 순간 현관문 비밀번호가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띠.띠.띠.띠.띠로로. 하얀 액체가 뿜어져 나오는 순간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짧은 순간에 엄청난 선택의 기로에 휩쌓였다.
- 바지를 먼저 올려야 할까. 컴퓨터를 먼저 꺼야 할까.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심정으로 왼손으로는 바지를 치켜올렸고, 오른손으로는 컴퓨터를 껐다. 나를 과신한 행동이었다. 형은 내가 보고 있는 야동의 실루엣을 보았고, 바지를 올리고 있는 엉성한 자세도 보았다.
형은 입이 무거운 사람이었다. 나의 모습을 보고도 엄마한테 이르거나 하지 않았다. 평소 내 행실을 통해 게이임을 알았다는 듯 보고도 못 본 척했다. 커밍아웃은 나 스스로 하라는 의미였던 거 같다. 타이밍은 어긋났지만 형은 내가 게이인 것을 아는 유일한 가족이었다.
유서를 다시 접힌 결대로 접었다. 그리고 과거로 플레이백 하는 것처럼 책을 책장에 꽂았고 엄마아빠한테 유서에 대해 말하는 건 보류하기로 했다. 밖에 나갔다가 집에 돌아올 때면 퉁퉁 부운 눈으로 가족들 앞에서 웃으려 하는 모습 앞에서 차마 유서를 말할 수는 없었다. 대신 엄마아빠가 잘 찾을 수 있게 다른 책들보다 약간 앞으로 빼놓기로 했다. 아직은 나만 아는 유서지만, 언젠가 부모님도 알 수 있게. 형이 가족들에게 나의 커밍아웃할 시간을 기다려준 것처럼.
그 후 나의 모든 일상은 속도감 있게 제자리를 찾아갔다.
화창한 날씨의 어느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여름 바람이 섞인 봄바람이 포근했다. 날이 좋을수록 마음은 서글퍼졌다. 그 시기 즈음 날씨는 내게 복선처럼 느껴졌다.
이 봄이 끝나면 형은 내 기억 속에서 잊혀질 것만 같았다. 그럴수록 형에 대한 모든 기억들을 되살려 내려고 노력했다. 외모부터 말투까지 기억해내야만 했다. 반곱슬의 머리에 검은 뿔테에 다부진 몸과 저음의 말투까지 몽타주를 끼워 맞추듯 형을 생각해 냈다.
- 집에 돌아가서 보면 되지.
습관적으로 당연히 집에 있을 형을 상상했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도 형은 없을 것이다. 다시 한번이라도 실제로 마주하면 내 몽타주는 살아 움직이게 될 텐데 형은 더 이상 없었다.
잊지 않기 위해 시간을 붙잡아야 한다는 조바심에 발을 막 동동 굴렀다. 인도에 사람들이 보이다가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선명하던 차도의 방향 표지판의 글씨가 안보였다. 몽타주도 생각해내려 할수록 선명해지지 않고 더 옅어졌다.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시간도 움직이지 않을 거라 믿었다.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제발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말아 달라고 대중없이 소리쳤다. 형에게 미안하다고 말해야 한다고. 또 보고 싶다고 말해야 하는데 누구한테 말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때 내 동공에서 이물감이 느껴졌다. 눈을 비비니 그동안 끼고 있었던 소프트렌즈가 튀어나왔다.
‘아, 이 렌즈 비싼 거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