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OBE Aug 19. 2023

03 내가 여자를 좋아했으면 너를 좋아했겠지

여리고도 씁쓸했던 어린시절 커밍아웃 03


03 내가 여자를 좋아했으면 너를 좋아했겠지


학창 시절에 매해 반에 한 명씩은 ‘얘는 말을 할 수 있을까?’할 정도로 말 수가 적은 동급생이 있다. 또 꾸미지 않았지만 안경을 벗으면 미소녀가 되어버리고 마는 친구도 있다. 서연이는 그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친구였다.


걸스 토킹은 여자 화장실에서 화장을 고치며 벌어진다면, 보이즈 토킹은 소변기 앞에서 일어났다. 오줌의 배출과 함께 진짜 속내가 나오는 원리였다. 나는 쉬를 싸면서 옆에 같은 반 남자아이들의 말을 엿듣곤 했는데, 심심찮게 들리는 말이 ‘서연이 예쁘지 않냐, 나 오늘 걔한테 말 걸어 본다.’였다. 막상 반에 돌아가면 화장실에서의 허세 가득한 말투는 아니었고. 순수한 남학생 말투로 서연이에게 말을 걸었다.


서연이가 처음부터 이렇게 인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도수 높은 직각사각형의 갈색 안경을 쓰고 조용히 그림만 그리던 시절에는 나를 제외한 남자애들은 서연이에게 관심 갖지 않았다. 남자들이 서연이한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진부한 애니메이션 설정인 ‘안경을 벗고 간 수학여행’ 때부터였다. 수학여행 이후 보이즈 토킹의 주된 인물로 급상승한 서연이를 허세 가득한 남자 애들한테 뺏길까 봐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달에 한 번 짝을 바꾸는 날이 돌아왔다. 운명처럼 서연이와 나는 짝이 되었다. 짝이 되기 전에 신비하고 궁금 투성이었던 서연이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해댔고, 우리는 잘 맞았고, 금방 친해졌다.


짝이 되기 전에는 단순히 호기심의 관심이었다면, 이후에는 전과는 다른 미묘한 친밀감이 느꼈다. 또 수업시간에 멍 때리고 있을 때, 나도 모르게 서연이와의 미래를 그려보기도 했다. 송도에 자리한 H사의 신축 오피스텔에 사는 마른 체형의 커플이 커피 머신으로 에스프레소를 내리고, 각자의 일을 조용히 하다가 브런치를 먹는 장면이었다.


혼란스러웠다. 게이라는 걸 알면서도 내가 나도 모르게 여자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색했다. 천사가 내가 게이인 걸 알면서도 나를 좋아했던 것처럼 나는 내가 게이인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여자를 좋아하는 것이었다. 청춘은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었지만 그게 내가 될 줄은 몰랐다. 내가 여자를 좋아하다니!


나는 서연이를 멀리하고 싶었지만 멀리할 수 없었다. 우리는 짝이었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너무나 가까웠고, 집에 가서 멀어진 순간에도 카톡을 통해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그렇게 우리는 더 가까워졌고, 어느덧 여름 방학이 찾아왔다.


여름 방학은 두 달 동안 서연이를 보지 못하게 될 시간이었다. 짝이 되고 한 껏 용기 내 다가간 시간들이 리셋되는 것은 정말 끔찍했다. 서연이한테 무슨 말이든 해야만 할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정하지 못했다. 너를 좋아한다고 말해야 할지. 아니면 나는 게이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아무튼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 네가 날 좋아하게 될까 봐 말하는 건데…. 아니다. 내가 널 좋아하게 될까 봐 말하는 건데…. 나 게이야.


서연이에게 나의 말 중 어느 말이 더 크게 다가갔을까.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에 놀랐을까. 아니면 내가 게이라는 것에 놀랐을까. 아니면 이 두 가지 사실을 자신한테 말하는 나라는 사람에게 놀랐을까.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오른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음을 참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헷갈리는 서연이의 표정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하여 재촉하여 물었다. 그리고 서연이는 나에게 말했다.

- 나도 너랑 비슷해.


비슷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까, 자신도 동성애자라는 걸까.


- 나는 여자를 좋아하는 거 같아.


서연이도 내게 커밍아웃을 했다.


이전 04화 02 친형 장례식장에서 떠올린 인터넷 검색 기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