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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BE Aug 19. 2023

01 우리는 언제든 사랑에 빠질 수 있으니까 말하는데

여리고도 씁쓸했던 어린시절 커밍아웃 01




01 우리는 언제든 사랑에 빠질 수 있으니까 말하는 건데, 난 게이야.


- 우리가 언제든 사랑에 빠질 수 있으니까 말하는 건데….


이 말을 시작할 때면 상대방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 난 게이야.


이어서 한 말에 ‘알고 있는데 왜 굳이 꺼내냐?’는 표정을 짓는다.


사춘기 시절 커밍아웃은 대개 이런 방향으로 흘러갔다. 상대방이 여자이고, 왠지 모를 운명 때문에 친해지고 말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후진 없이 커밍아웃했다.


내가 봐도 이런 전개는 왕자병을 베이스로 도끼병과 돌아이를 추가로 진단받은 캐릭터나 소화가 가능하다. 하지만 내가 커밍아웃을 퀘스트처럼 여기기 시작한 그 출발점에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의 감정을 누군가가 사랑으로 착각하는 일을 방지하려는 데 있었다.




나의 첫 커밍아웃은 중학교 2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상대는 내가 핸드폰에 ‘천사’라고 저장한 애니메이션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친구였다. 천사를 천사라고 불렀던 이유는 나의 장난을 다 받아줬기 때문이다.


내가 특히 좋아했던 장난은 필통에 물건들을 하나하나 바닥에 흩뿌리는 것이었다. 필통을 열고 교실 바닥에 샤프, 지우개, 펜, 자 등 학용품을 하나씩 바닥에 올려놓으면, 친구는 줍는 장난(혹은 노동)이었다. 대부분 장난을 받아줄 만한 친구들한테 했기 때문에 큰 싸움으로 번지는 일은 없었지만, 같은 장난을 몇 번이고 반복하면 나에게 화를 냈다. 천사만 빼고 말이다.


천사는 수업을 듣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는 늘 뭔가를 그리고 있었고, 쉬는 시간에는 늘 뭔가를 보고 있었다. 2009년 전자기기 업계에는 엄청난 혁신이 있었다. 바로 MP3에서 업그레이드된 MP4가 나온 것이다. 3에서 4로 하나가 더해져서 그런지 종전의 것은 노래만 듣는 용도였다면 후에 나온 것은 텍스트를 넣어 읽을 수 있었고, 영상을 넣어서 볼 수 있었다. 그 시기에 천사는 전자기기의 혁신 속에서 무수히 많은 애니메이션과 팬픽을 소화하고 있었다.


가히 완벽한 커밍아웃 첫 상대가 아닐 수 없었다. 현실은 비즈니스 관계로 똘똘 뭉친 남자 아이돌 그룹이라 할지라도 소설 속에서는 동성 치정극을 찍고 있는 팬픽을 다 알고 있고, BL물들이 범람하기 시작한 시점에 안 본 애니메이션이 없다는 것은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에게 큰 거부감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 나에게 호의적인 상대라니. 커밍아웃을 안 할 이유가 없었다.


90년대생 표준의 커밍아웃이 있다면, 내가 천사에게 한 커밍아웃이 아닐까. 수업을 마치고 캔모아에서 생크림 바른 토스트를 먹으며 학교 담임 선생님을 욕하다가 늦은 저녁에 집으로 돌아간 뒤. 오후 11시까지 버디버디로 요즘 보고 있는 애니메이션을 이야기하다가. ‘야 엄마가 컴퓨터 끄래. 전화 콜?’하는 나의 말에 친구는 알겠다고 하며 자연스럽게 통화로 넘어가서 요즘 고민이나 가정사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때가 아니면 내가 얘한테 커밍아웃을 못하겠다.’는 생각이 운명처럼 들 때쯤 하는 커밍아웃. 일상적인 고민들을 이야기하다가 고민의 연장선으로 자연스럽게 성정체성의 소재로 넘어가는 이상적인 커밍아웃. 내가 천사에게 한 커밍아웃이 바로 그랬다.


첫 커밍아웃을 마친 다음 날, 우리는 더 각별한 사이가 되어있을 줄 알았지만 의외로 별거 없었다. 마음속으로 서로를 ‘친한 사이’라고 분류했던 것 같지만, 그 이상의 가까움은 생기지 않았다. 그렇게 천사와의 사이는 자연스럽게 멀어졌고 다음 해 다른 반으로 배정되면서 서서히 첫 커밍아웃 상대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아무런 사이도 아니게 되었다.




천사와 본격적으로 친해지기 시작한 것은 같은 고등학교를 진학하게 된 이후다. 우리가 입학할 학교는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남녀 공학이었다. 그것도 둘이 들어가면 셋이 졸업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문란하다는 소문이 있는 학교였다. 학교 측에서는 이런 루머를 잠재우기 위해 이듬해 신입생부터 남녀 분반 제도를 도입했다. 남자와 여자를 분리시켜 혹시 모를 출산을 방지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해 우리는 그 학교에 입학했다.


이 소식은 남자인 친구가 거의 전무한 나로서는 거의 공포와 같은 소식이었다. 남고생 특유의 허세와 서열 정리를 떠올리면 학교가 아니라 어디 아프리카 사바나로 끌려가는 너구리가 된 것처럼 무서웠다.


남녀 분반의 세계에서 살아남기는 역시 힘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입학하니 예상한 대로 모든 대화의 추임새로 욕과 허세가 그득했고, 몸싸움도 잦았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이건 어디까지나 입학 달인 3월에 한정한 얘기였다는 점이다. 수컷의 세계에서 서열 정리가 끝나면 더 이상의 예민함은 없었다. 4월부터는 사바나였던 교실이 동물원이 되어, 남자 동급생과 어렵지 않게 잘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사춘기 시기. 남녀 분반의 복병은 다른 곳에 있었다. 이성 간의 호기심이 성을 분리하며 증폭되어 버린 것이다. 연애에 큰 관심 없었던 친구들도 괜스레 이성에게 호감을 느꼈고, 자신감을 가지며 대시했다. 이런 문화에서 나도 복도를 걸어 다닐 때면, 여자애들이 내 번호를 물어보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한 달 사이, 세 명의 동갑내기 여자아이들이 내 번호를 물어봤다. 그중 번호를 물어본 한 여자애는 나와 같은 반 친구 J가 무려 5년간 짝사랑하던 여자였다. 그 여자아이는 내가 마음에 들어서 번호를 물어봤던 게 아니었다. 단지 질투심을 유발하여 J의 사랑을 확인하려 했던 거 같다.


J가 주연인 영화에서 나는 감초 게이 역할이었다. 누가 봐도 J와 그 여자애가 이어지는 전개였지만, J만 그걸 몰랐다.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J는 유도부 출신이었고, (스키니진이 유행하던 11년도이므로) 마르고 깍쟁이 같은 내게 열등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오죽하면 내가 입은 95치수 카디건조차 나를 쥐어패도 되는 이유가 되었을까.


그 해 수련회 때 일이다. J는 저녁을 먹고 날 따로 불러 산책을 제안했다. 그리고 숲길로 된 산책로를 터벅터벅 걸으며 진지하게 물었다.


- 너 내가 걔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지?


나는 잘 모른다고 답하려는 순간 주먹이 날라왔다. 어안이 벙벙해졌다. J가 좋아하는 여자애가 나의 번호를 따간 것과 지금 내가 뺨이 얼얼한 것과 상관관계를 찾을 수 없었다. 이 상황이 뭔지 파악할 겨를도 없이 J는 감정에 취한 투로 내게 말했다.


- 걔 되게 좋은 여자야. 때렸더니 후련하다. 잘해줘라.


더 납득할 수 없는 대사에 머리가 하얘져 할말을 잃었다. J가 찍는 드라마 장르는 로맨스 코미디인데 본인만 남자들의 우정을 다룬 액션물인 줄 아는 거 같았다.


- 야 인마, 이건 영화 친구가 아니야. 나 걔랑 사귈 마음 추호도 없으니 잘해봐. 나보다 너랑 더 잘 어울려.


- 아, 그럼, 다행이고, 나 눈물 날 뻔했다.


그 후, 그들은 졸업할 때까지 등하교를 같이했다. (걔 둘은 결혼했으려나.)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여자들의 고백을 막아야 했다.




아이디어를 떠올리다 유행이 조금 지났지만, 우결(우리 결혼했어요)이 생각났다. 상대배역을 물색하다 매일 같이 어울리던 천사가 떠올랐다.


- 우리가 남 눈치 안 보고 친하게 지내려면 이 수밖에 없어.


- 갑자기 뭔데?


- 우리 사귀는 건 아닌데 매일 같이 어울리고 있잖아. 주변에서 그걸로 썸을 언제까지 탈 거냐고 묻기도 하고, J 사건이 또 일어날 수도 있잖아. 난 게이기도 하고.... 그니까, 계약 커플 할래? 우결처럼 말이야.


천사는 잠시 고민하다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교내에서 공식 1호 커플이었다. 학교에서 게이와 일반 여자의 커플일 거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쉬는 시간마다 여자 반에 꾸역꾸역 찾아가 교실 밖 복도에서 천사를 찾을 때면 주변은 웅성거림으로 시끄러웠다. 그리고 곧 모세의 기적처럼 시선은 천사에게 집중되며 길을 열어주었다. 그 시선은 솔로인 동급생의 부러움이었던 것 같다. 나나 천사나 그 시선이 싫지 않았다. 세기의 커플 취급을 언제 받아보겠는가. 또 주변을 속이는 묘한 쾌감도 공존했다.


우리는 수업 시간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했다. 나는 천사가 다니고 있던 영어학원을 따라 등록하면서 같이 있는 시간은 훨씬 더 많아졌다. 매주 주말이면 2호선 지하철을 타고 서울에 있는 대학교들을 탐방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는 ‘우리 꼭 여기 대학교로 오자.’는 매주 정해진 대사처럼 주고받았다.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세상을 향한 비밀이 있다는 게 이토록 짜릿한지 난생처음 깨닫게 되었다. 게이라는 비밀은 늘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서 마음고생을 해야 하는 것이었는데, 계약 커플이 되고, 타인과 비밀을 함께 고민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또 게이이지만 동시에 이성애자 커플로 이중생활 하는 것이 로맨틱 코미디의 한 장면 같이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그런 마음이 강해질수록 학교와 세상을 더 속이고 싶어졌다. 더 진짜 커플처럼 보이기 위해 몸과 마음에 진심을 다했다. 추후 생긴 옆 반 커플을 레퍼런스 삼아 하나하나 따라 했다. 하교 시간이 되면 꼭 천사의 반 앞에서 기다렸다가 같이 하교했고, 커플 신발을 맞추기도 했다. 우리는 뒤에서 보았을 때 영락없는 풋풋한 고등학생 커플이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가짜 관계는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언제부터 이게 사랑이면 어떡하냐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같이 있는 것이 좋은 것과 별개로 천사에 대한 마음은 분명히 사랑이 아니었다. 차라리 나를 때린 J와 사랑을 했으면 했지! 천사와의 사랑은 그려지지 않았다. 나에게 천사와의 만남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우정이었다. 이유는 없다. 단지 나는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였을 뿐이다.




진짜 커플처럼 되어갈수록 우리의 관계는 어딘가 불편해지었다. 나는 주변 친구들에게 천사를 소개할 때 ‘여자친구’라고 소개해야만 했고, 그건 천사도 마찬가지였다. 여자친구 남자친구라는 호칭은 무의식 속에서 ‘우리는 진짜 연인 관계다.’라고 강압적으로 거짓을 주지시키는 느낌이었다. 이 혼란스러움은 게이였지만 이성애자로 자아를 찾아가는 어떤 성장 영화와는 결이 달랐다. 서로가 더 아프지 않기 위해 빨리 이 관계를 끊어내야 하는데, 어떤 방식으로 할지 몰라서 오는 어지러움에 가까웠다.


홀로 이별을 다짐하는 시간 속에서 천사의 마음이 얼핏 읽혔다. 약속을 잡고 일부러 잠수타는 나의 못된 행동에도 5시간이 넘게 카페에 앉아 기다리는 모습을 보며, 천사와 나는 비슷한 결의 사람이기에 알았다. 하염없이 기다리는 건 그리고 늦게까지 연락 없는 나를 책망하지 않는 건 천사가 천사여서가 아니라 나를 좋아했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천사도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내가 게이인 것도 알고, 카메라 없는 우결을 찍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나에 대한 호감이 싹트는 게 어색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 모두 터놓은 사이였지만, 서로를 향한 전례 없는 감정을 느끼며 점차 홀로가 되었다.




대외적인 커플로 지낸 지 백일 정도 지났을까. 친형이 자살을 했다. 전날 엄마의 생일을 기념하여 디올과 샤넬 향수 중 무엇을 고를까 같이 고민하던 형이었는데. 하루아침에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나는 형의 죽음을 이해하기에도, 나와 천사 겪는 감정을 이해하기에도 어렸다. 속수무책으로 발송되는 무차별적인 비틀거림의 원인들을 차단해야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사에게 전화로 이 관계를 끝내자고 했다. 말하면서도 이상했다. 실제로 한 연애도 아닌데 끊고 말고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또 어떤 식으로 끊어내야 하는지도 의문이었다.


진짜 연애였다면 서로가 서로를 위해 연락을 아예 안 하는 편이 옳았겠지만, 우리는 대외적인 커플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천사는 형의 죽음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상대인데, 내가 홀로 슬픔을 감당할 수 있을지도 의문스러웠다. 하지만 올곧이 천사를 끊어냈다. 내 이기심에 더 이상 이 혼란스러움이 가중되어서는 안 됐다.


우리는 정말로 사귀었던 커플처럼 한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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