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고도 씁쓸했던 어린시절 커밍아웃 04
시트콤 같은 청춘을 꿈꿨다. 개성 가득한 캐릭터들이 모여. 일이 끝나면 수다 떠는 그런 청춘.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퀴어애즈포크라던가 모던패밀리라던가. 사실 꿈꿨다는 표현보다 어릴 때는 그런 관계들이 자연스럽게 생기는 건 줄 알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런 관계가 자연발생적으로 생기는 게 아니라는 걸 배웠고,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라면 시트콤 같은 친구들을 직접 섭외하는 게 맞지 않나? 생각하며 내 시트콤의 배우들을 서연이와 함께 섭외하기로 마음먹었다.
맞커밍아웃을 한 서연이와 모여서 우리만의 시트콤을 만들기 위해 열띤 토론을 했다.
- 나는 게이, 너는 레즈. 추가로 바이, 트랜스젠더 그리고 훈남 게이 한 명까지 섭외하면 되겠다.
- 훈남 게이 낄 거면 존예 레즈도 껴줘.
- 안돼. 그럼 시트콤 멤버 홀수의 법칙에 어긋나. 아, 그럼 바이를 더 세분화해서 남자 여자 각 각 섭외할까?
- 그렇게 되면 트랜스젠더도 FTM이랑 MTF 한 명씩 섭외해야 하는 거 아니야?
- …
- 그나저나 우리 학교에 그런 사람이 있긴 할까?
- …
내가 기획한 내 인생 시트콤의 콘셉트는 성소수자 모임이었다. 다양한 성정체성의 인물들을 한 명씩 섭외해 왁자지껄 놀다가 주인공인 나와 훈남 게이는 결국 사랑에 빠지고 모두의 축복 속에 졸업하는 줄거리의 하이틴 시트콤. 시놉시스는 완료되었으니 이제 각자의 배역에 맞는 사람들만 섭외하면 됐는데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 학교는 평범 그 자체였고, 애들은 재미없었다.
- 근데 요즘 지수가 팜파랑 맨날 같이 다니지 않냐?
- 팜파가 누군데?
- 3반의 머리 짧은 여자애 있잖아. 예전부터 의자왕처럼 줄줄이 여자애들 끼고 다니는 애. 이름은 잘 모르는데, 그 정도면 팜므파탈 아니냐. 줄여서 팜파.
- 혹시 팜파를 우리 시트콤에 섭외하자는 거야?
서연이가 싫은 티를 내며 말했다.
- 아니 그게 아니지. 지수를 섭외하자는 거지. 팜파 옆에 있다면. 걔도 레즈일 가능성이 높은 거 아닐까?
- 나도 좋아. 아, 그리고 또 누구 없나?
- 현서도 이쪽인 거 같아. 머리도 짧고. 뭔가 선머슴아 같은 이미지잖아. 얘는 이쪽이 아닌 게 이상해
- 현서도 좋지…. 그럼 네가 처음에 말한 시트콤이랑은 거리가 멀어지는 거 아니야?
서연이는 순수한 얼굴로 나에게 질문했다.
- …. 에잇, 나도 몰라. 걍 섭외해!
나는 감독이자 발 빠른 캐스팅 매니저답게 섭외 회의(?)를 마치고, 곧바로 둘에게 다가갔다. 들뜬 표정으로 지수와 현서에게 할 말이 있다며 역 앞 골목에 있는 카페로 나오라고 했다. 둘은 들떠 있는 나의 표정에 덩달아 들떠하며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우리가 모인 카페는 내 시트콤의 콘셉트를 설명하기에 너무 작았다. 4명이 다닥다닥 앉을 수 있는 테이블 3개가 일자로 나열되어 있었고, 어느 자리나 사장님이 우리말을 들을 수가 있었다. 아. 우리가 하는 얘기 사장님한테도 다 들리겠네.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커밍아웃 다수 경력자답게 올곧이 지수와 현서에게 커밍아웃하며 이 자리에 모인 이유를 이야기했다.
- 나 남자 좋아해. 그리고 너네는 내가 기획하는 시트콤의 멤버가 되어줘.
- …?
현서는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소리에는 놀라지 않다가, 멤버가 되어 달라는 소리에는 이게 무슨 생뚱맞은 상황이냐며 설명하라고 했다.
- 내가 꿈꾸던 거야. 지수는 팜파랑 사귀는 거지? 그니까 레즈일 거고, 현서는 너는…. 그냥 여자 좋아할 거 같은데, 아니야?
그제야 지수는 맞다고 대답하며 앞으로 흥미진진한 일들이 펼쳐질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현서는 이게 뭔 개소리이냐며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 야, 나 레즈 아니야.
나와 서연이와 지수 셋은 놀라며 동시에 물었다.
- 레즈가 아니라고? 우리는 당연히 네가 100% 여자를 좋아할 줄 알았어.
어쩐지 오늘 나눈 대화 중에서 내가 게이인 것도 당연한 거고, 지수가 레즈인 것도 당연한 것이었지만 현서가 레즈가 아닌 게 제일 놀라운 사실인 듯 모두가 놀랐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내가 그리던 시트콤의 한 장면인 것만 같았다. 모든 게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배우 모두들이 웃고 있는 이 상황이 좋았다.
커피를 만들던 사장 아주머니는 우리말을 몰래 엿듣다가 내가 눈치를 주니 흠칫했다. 때 마침 손님이 들어와 주위를 환기시키면서 주문을 받았다.
- 오늘은 뭐로 드릴까요?
- 늘 마시던 걸로 줘, 마담
50대로 추정되는 퉁퉁한 중년의 남자가 느끼한 말투로 말했다.
- 네, 늘 마시던 에스프레소 샷에 우유 추가한 특제 음료로 준비해 드릴게요. 잠시만 거기 앉아있어요.
사장은 라테를 특별한 음료인 마냥 설명하며 스팀기로 거품을 만들었다. 우리는 모든 게 웃긴 낭랑 18세답게 카페 밖으로 나와 키득거렸다.
- 너네도 들었지? 나 카페에서 늘 마시던 거 달라고 주문하는 사람 처음 봐.
- 나도 처음 봐. 우리 시트콤 첫 화부터 대박 예감 아니냐?
- 아, 근데 시트콤이면 아지트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 오. 그럼 정해졌네. 여기 이 카페. ‘늘 마시던 거 카페’
2012년 여름 어느 날. 우리의 시트콤은 최종 캐스팅을 완료했으며, 아지트까지 마련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