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의 전성기는 지금부터이다
최근 스타트업 씬을 보면 묘한 변화가 감지된다. 2015년만 해도 미국에서 혼자 시작한 창업자는 전체의 22%에 불과했다. 그런데 2024년 들어 이 비율이 35%로 뛰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성공적으로 엑싯한 기업의 절반 이상이 1인 창업자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숫자 뒤에는 늘 이유가 있다. 기술이 바뀌었고, 도구가 달라졌으며, 무엇보다 '혼자서도 가능한 일'의 범위가 급격히 확장되었다. 특히 디자이너에게는 지금이 흥미로운 시점이다. 기획자에게 설명하고, 개발자와 조율하고, QA를 기다리던 그 모든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상상한 것을 직접 구현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 디자이너의 전성시대일까,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전문화일까.
전통적인 프로덕트 개발은 명확했다. 아이디어 → 기획 → 디자인 → 개발 → QA → 출시. 각 단계마다 전문가가 필요했고, 단계 간 이동에는 늘 커뮤니케이션 비용이 따랐다. 완성까지는 보통 수주에서 수개월이 걸렸다.
'프로덕트 개발 프로세스'라는 말 자체가 이제는 낡았다. 과거의 워터폴 방식이든 애자일이든, 결국 '역할의 분리'를 전제로 했기 때문이다. 기획자가 정의하면 디자이너가 그리고, 개발자가 만들고, QA가 검증한다.
지금은 다르다. Figma에서 UI를 그리고, v0.dev가 그것을 React 컴포넌트로 변환하며, Cursor AI가 코드를 수정하고, Vercel이 배포까지 마무리한다. 아이디어 → 프로토타입 → 검증 → 개선 → 출시. 며칠이면 충분하다.
이 변화가 단순히 '더 빨라진 것'일까, 아니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일까. 과거에는 디자이너의 비전이 여러 단계를 거치며 희석되곤 했다. '기술적 제약', '일정 이슈', '리소스 부족'이라는 말들 뒤에서 처음의 의도는 조금씩 변형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워크플로우는 그 통제권을 디자이너에게 되돌려준다. 설득하고 타협하는 대신, 직접 만들면 된다.
문제는 이것이 새로운 자유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부담을 의미하는지 아직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제는 코드 리뷰보다 프롬프트 리뷰가 중요하다"는 말이 있다. 정확한 관찰이다. 하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프롬프트가 디자이너의 새로운 작업 언어가 되었다는 뜻이다.
과거 디자이너는 시각 언어로 소통했다. 색상, 타이포그래피, 레이아웃, 위계. 이제 여기에 하나가 더해졌다. 의도를 구조화하는 언어.
"심플한 로그인 화면 만들어줘."
"B2B SaaS 제품의 로그인 화면을, 30~40대 마케터를 타깃으로, Linear의 간결함과 Notion의 친근함을 결합해, React와 Tailwind CSS로 만들어줘."
두 문장의 차이는 명확하다. 후자는 디자인 브리프 그 자체다.
흥미로운 점은, 좋은 프롬프트를 작성하려면 결국 좋은 디자이너여야 한다는 것이다. 맥락을 이해하고, 제약을 설정하고, 레퍼런스를 선택하는 일. 이 모든 것은 AI가 대신해주지 않는다. AI는 실행을 빠르게 해줄 뿐, 방향은 여전히 인간이 정한다.
그렇다면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은 새로운 기술이라기보다, 디자인 사고의 또 다른 형태에 가깝다.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 디자인하고, 코드를 생성하고, 배포한다. 며칠이면 작동하는 제품이 나온다. 실제로도 그런 사례들이 늘고 있다. 코딩 경험이 없던 사람이 AI 도구만으로 5~15일 만에 앱을 만들고, 천 명 이상의 사용자를 확보했다. DesignJoy를 운영하는 Brett은 디자이너 혼자서 연 23억 원의 매출을 올린다.
하지만 현실은 좀 더 복잡하다. 첫 시도는 대부분 실패한다. AI가 만든 코드는 에러를 뿜어내고, 의도와 다른 결과가 나오며,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한다. "module not found", "syntax error" 같은 메시지 앞에서 당황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 지점에서 길은 둘로 나뉜다. 포기하거나, 배우거나. 에러 메시지를 AI에게 다시 물어보면 답은 나온다. 그 과정에서 코드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문법을 외우는 게 아니라, 구조와 논리를 파악하게 된다.
문제는 이것이 모든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역량인가 하는 것이다. '디자이너가 개발까지 할 수 있다'와 '디자이너가 개발까지 해야 한다'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기술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크게 늘었지만, 디자이너의 손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예전에는 직접 그리고, 만지고, 실험하며 시행착오를 통해 감각을 키웠다. 이제는 프롬프트 한 줄이면 결과물이 나온다.
효율적이지만, 그 과정에서 배우는 감각—손으로 만지며 얻는 직관, 실패 끝에 발견하는 새로운 길—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AI는 결과를 제공하지만, 그 결과에 도달하기까지의 '여정'은 대신해주지 않는다.
'Vibe Coding'이라는 말이 있다. AI와 대화하며 기능과 감각을 실시간으로 조율하는 방식이다. 완벽한 코드를 처음부터 작성하기보다, 원하는 느낌에 맞춰 계속 수정해나간다. 마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듯, 디자이너는 전체 비전을 제시하고 AI는 세부를 실행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디자이너는 지휘자가 되는가, 아니면 단지 지시를 내리는 오퍼레이터가 되는가. 그 경계는 생각보다 모호하다.
1인 디자이너로 살아가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들 말한다.
비즈니스 이해력. 단순히 예쁜 화면이 아니라, 이것이 왜 필요하고 어떤 가치를 주는지 이해해야 한다. ROI와 전환율을 읽고, 마케터와 개발자의 언어를 이해하며, 제약 속에서 창의성을 발휘해야 한다.
AI 활용 능력. Cursor, v0.dev, ChatGPT 같은 도구를 상황에 맞게 조합하고, 프롬프트를 구조화하며, 생성된 결과를 검증하고 개선할 줄 알아야 한다. 도구의 수가 아니라 활용의 맥락이 중요하다.
빠른 실험 정신. 완벽함보다 속도, 계획보다 실행. 만들면서 배우고, 실패를 통해 성장하며, 작은 단위로 쪼개어 점진적으로 개선해나가야 한다.
그런데 이 목록을 보면 묘한 기시감이 든다. 이것은 디자이너의 역량인가?
AI 시대의 아이러니는 이것이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전문성의 경계는 흐려지지만, 동시에 각 분야의 깊이는 더 요구된다. 웹디자이너도 타이포를 실험하고, BI 디자이너도 모션을 다루며, UI 디자이너도 코드를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하려다 보면 어느 것도 깊이 파지 못하는 상황이 온다. 예전에는 "한 우물을 파라"고 했다. 지금은 "여러 우물을 동시에 파야 한다"고 말한다. 두 조언 모두 맞는 것 같으면서도, 둘 다 불완전하다.
1인 디자이너의 시대는 분명 왔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디자이너가 가야 할 길인지는 여전히 질문으로 남는다. 누군가에게는 자유이고, 누군가에게는 부담이다. 누군가에게는 기회이고, 누군가에게는 피로다.
결국 이것은 선택의 문제다. 디자이너로 남을 것인가, 빌더가 될 것인가. 전문성을 깊이 파갈 것인가, 경계를 넘나들 것인가. 팀의 일원으로 일할 것인가, 혼자 모든 것을 책임질 것인가.
AI는 도구일 뿐이다. 중요한 건 그 도구로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떤 디자이너로 살 것인가이다.
1인 디자이너의 시대가 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길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여전히 팀 안에서 깊이 있는 전문성으로 승부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경계를 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선택이 아니라, 그 선택이 스스로에게서 나왔는가 하는 것이다. 트렌드를 따라가는 것과, 자신의 방향을 찾는 것은 다르다.
AI 시대를 살아가는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다. 변화를 받아들이되 휩쓸리지 않고, 새로운 것을 배우되 본질을 잃지 않으며, 효율을 추구하되 감각을 지키는 것.
디자이너의 전성시대는 도구가 만드는 게 아니다. 그 도구를 어떻게 쓰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엇을 잃지 않는가에 달려있다.
이 글은 비쥬얼스토리의 프로젝트 경험에서 얻은 인사이트를 기반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