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기술자가 아닌 창작자로
요즘 채용 공고를 보다 보면 묘하게 흥미롭다.
“UI/UX 디자이너 경력 3년 이상, 웹 프로젝트 경험 필수”
“브랜드 디자이너, BI 작업 포트폴리오 보유자”
“모션 그래픽 디자이너, 애프터이펙트 능숙자”
요구 조건은 점점 세밀해지고 전문성은 높아졌다. 그런데 언제부터 디자이너들이 스스로를 이렇게 좁게 정의하게 되었을까.
현장이 갑자기 바뀐 것은 아니다. 클라이언트는 여전히 디자인을 원하고,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만든다. 다만 일의 방식이 달라졌다. 프로젝트가 복잡해지고 규모가 커지면서 역할이 세분화되었다.
UI/UX 디자이너, 브랜드 디자이너, 모션 디자이너, 그래픽 디자이너. 각자의 영역은 더 깊어졌지만 시야는 오히려 좁아졌다.
AI 툴도 하나 더 늘어났다. 미드저니, 챗GPT 등.. 새로운 선택지가 등장했지만 게임 체인저라기보다 도구의 확장에 가깝다. 방향을 정하고 최종 판단을 내리는 일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그럼에도 일은 더 효율적으로 돌아가는데, 디자인은 이상하게 더 평범해진 듯한 느낌이 있다.
최근 포트폴리오를 보며 가장 많이 든 생각은 “다들 정말 잘한다”였다. 깔끔하고, 세련되고, 트렌디하다. 하지만 놀랍도록 비슷하다.
웹사이트는 비슷한 레이아웃을 따르고, 브랜드는 비슷한 톤으로 정리되며, 모션은 비슷한 템포로 흘러간다.
언제부터 우리는 ‘잘하는 것’과 ‘다른 것’을 구분하지 않게 되었을까.
전문화는 분명 장점이 있다. 한 분야를 깊이 파면 퀄리티는 올라간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잃는 것도 있다. 경계를 넘나드는 시도, 예상 밖의 조합, 직관적인 실험—아티스트로서의 감각이 그 중 하나다.
웹디자이너는 웹만 보고, BI 디자이너는 BI만 본다. 타이포그래피를 연구하는 사람은 타이포만, 일러스트레이터는 그림만. 각자 자기 영역에서는 전문가가 되지만, 경계 밖은 낯설어진다. 그리고 그때부터 디자이너는 창작자가 아니라 오퍼레이터가 된다.
이 흐름을 만든 것이 교육인지, 현장이 교육을 그렇게 몰아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현재의 디자인 교육이 ‘전문가 양성’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UI 트랙, 브랜딩 트랙, 모션 트랙. 효율적이고 취업에도 유리하다. 그러나 뭔가 빠져 있다.
디자인의 본질, 형태와 색, 리듬과 여백을 가지고 노는 즐거움, 우연한 실험에서 발견되는 가능성, 그리고 자기만의 언어를 찾아가는 과정. 요즘 신입 디자이너들은 피그마를 능숙하게 다루고, 레퍼런스를 빠르게 찾고, 트렌드를 정확히 읽는다. 하지만 “왜 디자인을 하나요?”라는 질문 앞에서는 대답이 막힌다.
“취업하려고요.” “그나마 전망이 좋아서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딘가 허전하다.
AI가 등장하면서 아이러니가 생겼다. 기술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크게 늘었지만, 디자이너의 손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예전에는 직접 그리고, 만지고, 실험하며 시행착오를 통해 감각을 키웠다.
이제는 프롬프트 한 줄이면 결과물이 나온다. 효율적이지만, 그 과정에서 배우는 감각 "손"으로 만지며 얻는 직관, 실패 끝에 발견하는 새로운 "길"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AI는 결과를 제공하지만, 그 결과에 도달하기까지의 ‘여정’은 대신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 여정 속에야말로 디자이너가 성장하는 핵심이 있다.
AI가 실행을 대신하는 시대에 디자이너가 붙잡아야 할 역량은 무엇일까.
문제 해결 방법론
클라이언트의 요청은 늘 표면적이다. “로고를 새로 만들고 싶다”는 말 뒤에는 매출 부진, 브랜드 가치 하락, 내부 조직의 혼란 같은 진짜 이유가 숨어 있다. 디자이너는 이 숨은 문제를 찾아내고 가설을 세우며 실험으로 검증해야 한다. 디자인은 결과물이 아니라 문제를 푸는 솔루션이라는 관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비즈니스 이해
ROI, 전환율, 리텐션 같은 지표는 마케터만의 언어가 아니다. 우리가 만든 화면, 색, 동선이 어떤 수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할 때, 디자인은 비용이 아닌 투자로 읽힌다. “예쁘다”가 아니라 “효율적이다”를 기준으로 사고해야 한다.
협업 언어
개발자는 안정성과 확장성을, 마케터는 도달과 전환을, PM은 일정과 리스크를 우선한다. 같은 목표를 향해도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디자이너는 번역가가 되어야 한다. 기획서를 단순히 예쁘게 다듬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문제 정의와 해법을 시각으로 풀어내야 한다.
제약 속의 창의성
완벽한 조건은 없다. 짧은 일정, 제한된 예산,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오히려 창의성이 발휘된다. 때로는 80점을 빠르게 내는 것이 100점을 늦게 내는 것보다 낫다. 제약은 발목이 아니라 발판이다.
지속적 학습
툴과 트렌드는 하루가 다르게 바뀐다. 네 해 배운 지식으로 평생을 버티는 시대는 끝났다. 새로운 기술을 두려워하지 않고 스스로 학습하고 적응하는 능력이 곧 생존 전략이다. AI는 위협이 아니라 학습 속도를 가속하는 동반자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디자인 교육을 다시 설계한다면 두 가지 축이 함께 가야 한다.
하나, 전문성과 다양성의 균형. 한 분야를 깊이 파는 것도 중요하지만, 경계 밖을 경험하는 것이 새로운 가능성을 연다. 웹디자이너도 타이포를 실험하고, BI 디자이너도 모션을 만져보는 것. 이런 교차 경험에서 진짜 혁신이 탄생한다.
둘, 기술자가 아닌 창작자로 키우기. 툴을 다루는 법보다 생각을 표현하는 법, 트렌드를 따르는 법보다 자기만의 언어를 찾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AI를 활용하되, AI에 종속되지 않는 감각을 길러야 한다.
디자이너는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합리성과 감성, 효율과 실험, 전문성과 직관. 이 모든 요소의 균형이 필요하다.
이 질문은 신입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해당된다.
언제 마지막으로 클라이언트 없이, 마감 없이, 그저 재미로 무언가를 만들어본 적이 있는가. 언제 마지막으로 낯선 분야를 시도해봤는가.
전문가가 되는 것은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디자이너로서의 본능을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결국 AI와 다를 바 없다. 빠르고 정확하지만, 예측 가능하고 평범한.
디자이너의 가장 큰 자산은 전문성이 아니라 감각이다. 그 감각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AI 시대를 살아가는 디자이너가 반드시 지켜야 할 가치다.
디자인 교육을 다시 설계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다시 설계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글은 비쥬얼스토리의 프로젝트 경험에서 얻은 인사이트를 기반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