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단상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를 바꾸었다. 살면서 주민번호를 변경할 일은 극히 드물다. 혹여 개명하는 일이 있을지언정 말이다. 주민번호를 바꾸니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다행히 공공기관에서는 알아서 등록해 준다고 하나, 그 외의 은행이나 카드사, 보험사, 카카오톡 등은 일일이 방문 또는 연락하여 변경을 신청해야 한다. 기관의 직원들은 이구동성으로 ‘명의변경’이라며 전부 새로 만들어야 한단다. 주민번호만 바뀌었을 뿐인데 이전의 나는 사라지고 새로운 무언가가 나를 대체하는 것 같다. 나는 이렇게 그대로인데.
보이스피싱은 어리숙한 사람들 혹은 어르신만 당하는 것이라고 여겼었다. 하지만 실제 겪어 보니 얼기설기 얽혀든 거미줄처럼 치밀했고, 일단 믿기 시작하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개미지옥과도 같았다.
5월 마지막 주 나흘간 경찰, 검찰, 금융감독원에서 번갈아 가며 전화가 왔다. 그들은 내 휴대폰 번호, 생년월일, 이름을 알고 있었으며 그럴듯한 공문까지 보내 명의도용 범죄에 연루되었다고 협박했다. 하필 주민등록증을 분실한 상태였고, 범죄자가 농협 지점장이었다고 해서 깜박 속았다. 맨 먼저 경찰서에서 사건에 연루된 사실을 알려왔고 자연스레 담당 검사와 연결해 주었다. 검찰 사칭한 자는 본인 신분증을 찍어 보냈고, 실제 검찰청에서 근무하는 검사와 같은 이름을 댔다. 그가 보낸 공문은 스무 가지도 넘었는데 사건번호도 적혀 있었고, 피해자들이 법원에 보낸 탄원서, 잡힌 범인이 나를 공범이라 지목한 진술서 등 종류가 다양했고 내용이 치밀하였다. 검찰청에서는 내가 동조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지 않으면 구속된다고 했다. 눈물이 났다.
“말도 안 됩니다. 전 아무 죄도 짓지 않았어요. 가족을 힘들게 할 순 없어요. 아이가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될 거예요. 피해자 입증하려면 변호사 비용도 엄청날 텐데, 어떻게 이런 일이….”
방법은 오직 하나, 수사에 협조하는 것뿐. 게다가 이 사실을 제3자에 발설하면 안 된다는 조건이 붙었다. 이후 카톡으로 기상, 외출, 취침하는 일상을 생판 남에게 보고해야 했다. 입이 근질거렸으나 가족에게 금전적 피해를 줄 순 없다고 생각하니 남편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답답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들은 ‘그저 이 상황을 빨리 종결시키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도록 날 극한으로 몰아갔다. 그 과정에서 휴대폰이 해킹되었으며, 안에 있던 모든 정보와 사진들이 유출되었다. 자연히 주민번호 뒷자리도 털렸다.
금융감독원 대표번호 1332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과장 사칭한 자가 말했다. “본인 명의로 된 대출이 발생하였으니 범죄자들을 잡으려면 똑같이 대출을 받아서 경로를 추적해야 한다. 국가안심계좌를 개설하였으니 그리로 돈을 보내면 계좌추적을 하겠다”라고 말이다. 그들은 삼 일째 되던 날 마침내 아이 교육비로 저축해둔 쌈짓돈까지 합해서 0천만원을 털어갔다.
대개 돈을 받고 나면 범죄자들은 연락을 끊게 마련이다. 그런데 취침보고까지도 계속 답장을 하더니 다음날 전화가 왔다. 내 수사가 도움 되었으며 오늘은 꼭 피해자 입증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안심시킨 뒤, 도장 찍지 않은 공문을 보내왔다. 그 당시만 해도 꼼짝없이 속고 있었는데, 은행에서 걸려온 전화가 나를 구원했다.
“혹시…. 누군가에게 협박받고 계신 거 아니세요?”
말문이 턱 막혔다. 천성적으로 거짓말을 잘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금전을 이체받는 대상자와 용도에 대한 진술이 일관되지 못했고, 눈치 빠른 모니터링 직원이 이를 알아차린 것이었다. 더구나 돈을 보냈던 계좌는 사기의심계좌였다. 정신 차리고 검색해 보니 공문 속 사건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또 다른 피해자가 쓴 글을 찾았다. 내 경우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았다. 사칭범 이름까지도 말이다. 잠옷 바람인 것도 잊고 즉시 인근 경찰서로 달려갔다. 곧이어 깜짝 놀라 회사 일을 제치고 달려온 남편을 부둥켜안고, 죄책감과 후회가 뒤범벅된 눈물을 펑펑 쏟았다.
한 달여간 그놈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했고 악몽에 시달렸다. 남편이 정신건강의학과에 같이 가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할 정도였다. 남편에 대한 죄책감은 그가 나를 용서함으로써 해소되었다. 나를 가장 괴롭게 만들었던 건, 어리숙한 사람처럼 취급했던 피해자들과 내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학창시절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고3 때 반에서 1등도 했었다. 그런 내가 ‘공문은 반드시 우편으로 온다’라는 상식을 잊고 그들의 대본 속에서 놀아났다는 사실이 너무 자존심 상했던 것이었다.
휴대폰이 해킹당했을 때 연락처도 유출되었다. 2차 피해를 막고자 보이스피싱 사실을 카톡 프로필에 적을 때는 주위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바보 취급할 것인가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 소중한 내 사람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컸기에 그리 했다. 결과적으로 나를 손가락질하는 지인은 한 명도 없었다. 머리 좋고 이성적인 어떤 친구조차도(그녀가 분명히 내 멍청함을 꾸짖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피해 사실을 오롯이 인정해주며 내게 잘못이 없다고 말해주는 것이었다. 감사한 일이다.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날 사랑할 수 없게 만든다(『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 저, 2권 218p). 이번 사건으로 인하여 나는 내 오만함을 인정하는 동시에, 사기 피해자들을 어리석은 사람들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 그런 시선을 받았을 때 얼마나 괴로울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들 나름의 사정이 있었을 것이며, 사기를 계획한 범죄자들이 악한 것이다.
사건은 아직 종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놈 목소리를 떠올려도 더는 고통스럽지 않다. 수많은 사기 피해자들에게 위로를 전한다.
당신 잘못이 아니야, 삶을 놓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