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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육아휴직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기적

by Soul

육아휴직이라고 하면 으레 갓난아기가 떠오르지만, 우리 집 아이는 벌써 초등학교 1학년이다. 생뚱맞게도 이 시기에 남편이 3개월 육아휴직을 낸 것이다. 명목상은 육아휴직이지만 그 속에 숨은 뜻은 본인의 안식년으로 삼을 심산이다. 중국발 보이스피싱의 정신적, 금전적 피해자가 된 아내의 육아를 돕고, 사건의 후속 조치를 해야 한다며 회사에는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웠다. 단지 그건 결코 3개월간 수습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이왕 육아휴직 허가를 받은 만큼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더 친밀한 관계가 되기를 기대하였다.


십 년 전, 우리가 막 결혼식을 올렸을 때 남편은 다니던 중소기업에서 퇴사한 상태였다. 그리고 나는 민간단체 소속의 계약직 평생 교육사였다. 우리 커플은 둘 다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지 못한 채 결혼한 셈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권고사직 비슷한 것을 받게 되었다. 아직도 그때의 질문이 생생하다. “평생 교육사처럼 영리를 추구하는 일보다는 사회복지 쪽이 더 본인에게 맞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언뜻 듣기엔 배려하는 듯하였으나 실상은 몰아붙이는 쪽에 가까웠던 물음. 머지않아 사측과 합의하여 퇴사하는 쪽으로 결단하고 집에 있으면서 일을 알아보았었다.


신혼여행 다녀온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부부는 그렇게 백수가 되었다. 남편이 일을 구할 때까지 먹여 살리려고 했었는데, 역시 사람의 앞일은 알 수가 없다! 물론 삼십 대 초반이라는 젊은 나이였으니, 일을 못 구하리라는 부정적인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냥 서로 좋아서 취미생활을 함께하고, 깊어가는 밤을 만끽하며 시간을 보냈다. 살면서 가장 시간이 천천히 흘렀던 나날이 아니었나 싶다. 낮과 밤의 구분은 필요치 않았다. 원하면 언제든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아하는 영화도 보고, 밤새도록 대화도 나누며, 연애 시절 나의 통금 때문에 하지 못했던 일들을 마음껏 했다. 그렇게 두 달을 둘이서 탱자-탱자 보내고 아직 매서운 추위가 코끝을 시리게 했던 2월 말에, 남편은 고대하던 취업 합격 통지서를 받게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봐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곧이어 한 달 뒤 나도 공공기관에 입사하게 되었고 본격적인 맞벌이에 돌입하며, 신혼집을 놔두고 남편 회사 사택에 들어와 살면서, 꿈꿔왔던 신혼 생활은 끝나버렸다. 신혼집은 25평이라 넉넉했고 훗날 식구가 늘어난다 하더라도 살기 좋아 보였는데, 18평도 안 되는 사택에 들어가자니 속으로 영 내키지 않았었다. 그래도 남편의 직무상 야간 호출도 불사해야 했기에 순응했다. 그렇게 곧 끝날 줄만 알았던 사택살이가 시작되어 그 뒤로부터 십 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것이다. 그동안 둘도 없는 외아들이 태어났고, 전업주부가 되면서 시간이 거침없이 지나간 것 같다. 새삼 감회가 새롭다. 사내 환경에 적응 및 사람들과 교류하며 야근과 밤샘도 불사하고 현재의 자리까지 올라온 남편에게, 그동안 수고했다, 애 많이 썼다고. 바빠서 미루어뒀던 애정 표현을 했다.




처음엔 남편이 집에 있다는 것이 그렇게 어색할 수 없었다.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나서 집에 돌아왔을 때, 침대에서 색색 하는 숨소리, 거실에서 타닥타닥 자판을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가 들리면 휴직했다는 것이 실감 났다. 가정주부가 얼마나 쉴새 없이 일하는지 보여줄 절호의 기회다! 집안일의 강도를 늘렸다. 평소 아침을 먹지 않고 출근하던 남편이었는데, 집에 있으니 끼니를 제법 든든하게 챙겨 먹으려 했다. 요리라고는 짜파게티밖에 못 끓이는 남편을 위해 반찬도 더 신경 쓰고 장도 자주 봤다. 하필 식기세척기가 고장이 나서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었다. 육아휴직지원금이 기존 월급보다 더 적으므로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생각 끝에 아이가 다니던 학원 중 한 군데를 끊었다.


적막한 집에서 혼잣말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남편과 주거니 받거니 대화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십 년 전과의 차이가 있다면 보다 현실적인 대화를 많이 나누게 되었다는 점이다. ‘결혼은 현실’이라는 말처럼 대화의 주제가 주로 먹고사는 문제로 바뀌었다. 급변하는 부동산 시장, 카드 혜택, 통장 잔액, 생활비 정산, 저녁밥 메뉴 같은 것들 말이다. 두런두런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 있으면 어느새 아이를 데리러 갈 시간이 다가왔다. 남편이 쉬어도 주 양육자는 여전히 나였다. 가끔 몸이 안 좋을 때 대신 아이 픽업을 해 준 적도 있었지만 말이다. 안식년이라고 마음껏 부려먹기엔 미안했다. 10년만의 휴식인데, 그동안 얼마나 하고 싶었던 일이 많았을까 싶어서.


남편의 버킷리스트 목록엔 영화관 가기, 콘서트장 가기, 여행, 운동, 부동산과 AI 공부하기 등이 쓰여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나서 오전에는 각자의 할 일을 하고, 주로 오후에 버킷리스트를 채웠다. 남편은 도통 혼자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는, 외로움을 잘 타는 성격인지라 이리저리 끌려다녀야 했다. (남편은 나돌아다니길 좋아하고, 나는 집순이에 가깝다!) 영화도 생전 보지 않던 F1 같은 레이싱, 체인소 맨 같은 고어물을 꾸역꾸역 보았다. 체인소 맨은 애니메이션이라더니 잔인한 장면이 넘쳐나서 손가락으로 눈을 가려가며 보아야 했다. 콘서트장 대신 강남 페스티벌이라는 행사에 갔었는데, 지금은 잊힌 90년대 가수가 출연한다고 해서 지하철을 타고 수많은 인파를 헤쳐가며 무대 앞까지 도달했던 생각이 난다. 영화관에서 같이 먹던 짭짤한 팝콘 맛이나 G.O.D. 라이브 목소리에 오길 잘했다며 활짝 웃던 남편의 미소도 떠오른다. 급조해서 보게 된 한강 드론쇼라든지, 무작정 떠난 오사카, 푸꾸옥 여행은 아이에게도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 같다.


3개월은 금세 흘러갔고 남편은 회사에 복귀하여 나는 다시 홀로 집에 남았다. 누군가는 남편이 삼식이(?)가 되면 골치 아프다, 부부는 따로 떨어져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들 한다. 물론 일부는 동의한다. 요리를 전혀 못 하는 남편이니 꼼짝없이 삼식이가 되겠지. 그때도 나는 남편을 위해 기쁘게 음식을 만들 수 있을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린 사랑의 정의는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었는데, 이번 일을 겪으며 생각이 달라졌다. 사랑이란 ‘상대방을 기쁘게 하는 것’.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므로, 한 단계 더 나아간 개념이라 생각된다. 이해할 수 없다 해도 그 사람의 미소를 보는 것만으로 기쁜 것. 이해한다는 건 머리에서 끝나버린다.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 내 즐거움보다 상대가 기뻐하는 것이 더 좋다면 속절없이 사랑에 빠져버렸다는 증거다. 하지만 사람인지라 온전히 양보하고 희생만 하지는 못할 것이 분명하다. 그래도 세월에 익어갈수록 더 성숙하고 깊어지는 사랑을 배워가리라.


caleb-ekeroth-wSBQFWF77lI-unsplash.jpg 내 즐거움보다 상대가 기뻐하는 것이 더 좋다면 속절없이 사랑에 빠져버렸다는 증거다. / 그래도 세월에 익어갈수록 더 성숙하고 깊어지는 사랑을 배워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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