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음을 그리는 화가다.
그러나 내 손은 붓을 쥘 줄 모르고, 물감의 농도를 섬세하게 가늠하지 못한다. 캔버스의 결을 따라 부드럽게 그어지는 선도 내겐 없다. 나는 이젤도, 팔레트도 없이 작업한다.
대신, 내 앞에는 언제나 하얀 공백이 있다.
먼지 쌓인 원고지일 때도 있고, 희고 차가운 빛을 뿜는 모니터 화면일 때도 있다.
사람들은 묻는다. “붓도 없이 어떻게 화가라 부르냐”라고.
나는 대답 대신, 조용히 한 줄을 쓴다.
내게 물감은 단어다.
‘쓸쓸함’이라는 잿빛 물감, ‘그리움’이라는 낡은 필름 같은 색, 그리고 ‘열정’이라는 짙고 뜨거운 색. 나는 마음속 어딘가를 흐르는 감정의 색에서 가장 정확한 단어 하나를 길어 올린다.
내게 붓은 문장이다.
투박하고 힘 있는 문장으로 고독의 그림자를 그려내고, 부드럽고 얇은 선의 문장으로 사랑의 결을 어루만진다. 어떤 날은 숨 가쁘게 몰아치는 문장이 폭풍 같은 시련을 그려내고, 다른 날은 잔잔히 스며드는 문장이 고요한 평온을 채운다.
나는 눈에 보이는 사물을 그리지 않는다.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그린다.
스쳐 지나간 바람의 향기, 오래전에 잊었으나 문득 되살아나는 기억의 온도, 말없이 울리는 마음속의 깊은 침묵. 그런 것들이 내가 그리는 풍경이다.
내 그림은 미술관 벽에 걸리지 않는다.
화려한 조명도, 비평가의 해설도 필요 없다.
나의 그림이 머무는 전시장은 오직 하나—
내 글을 읽는 누군가의 마음이다.
나는 바란다.
내 문장이 당신의 마음속 어딘가에 조용히 걸리기를.
단어들이 눈으로만 스쳐 지나가지 않고, 당신 안에서 천천히 녹아 하나의 풍경이 되기를. 눈으로 보는 그림이 아니라, 마음이 비로소 ‘보게 되는’ 그런 그림이 되기를.
그리고 그 그림이, 당신의 삶에서 아주 작고 조용한 위로가 되기를.
문득 떠오르는 미소가 되기를.
때로는 뜨겁게 차오르는 눈물이 되기를.
글이란 결국 그런 것 아닐까.
투명한 물감으로, 가장 깊은 곳에 지워지지 않을 그림을 남기는 일.
그래서 나는 오늘도 하얀 공백 앞에 앉는다.
당신의 마음에 걸릴 단 하나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B&E 01년 11월 어느 날
쌀쌀한 겨울 문턱을 열며 ...
* B&E 01년 : 브런치 작가로 거듭난 1년
* 이미지 출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