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의 쉼표, 경주
설렌다.
여행은 언제나 그렇다.
특히 가족여행은 내게 오래 스며드는 향 같다. 시간이 지나도 잔잔히 남는 여운이 있다.
어느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여행은 ‘인생의 쉼표’다.
턱밑까지 차오른 삶의 버거움을 잠시 내려놓게 하고, 마음 한켠을 고요히 식혀준다.
그리고 다시 나를 충전시킨다.
특히 이번 여행은 큰딸 한별이 세심하게 준비한 우리의 쉼표다.
가족 모두의 얼굴에도 들뜸이 묻어 있었다.
“각자 빠진 거 없이 다 챙겨야 한다!”
평소보다 조금 들뜬 아내의 목소리가 집 안을 부드럽게 채운다.
“넵, 여왕폐하! 속옷이랑 배터리 이상 없습니다!”
능청스러운 막내 윤채의 말에 아내가 피식 웃는다.
그 웃음이 공기를 한결 따뜻하게 만들었다.
다음 날 아침, 하늘은 눈부시게 맑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KTX에 올랐다. 자리에 앉자마자 우리는 오랜만에 느긋한 대화를 나눴다.
일상에선 늘 시간이 모자랐는데, 기차 안에서는 시계가 잠시 멈춘 듯했다.
창밖 풍경이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아이들은 실없는 농담에도 웃음꽃을 피우고, 아내는 삶은 계란을 내밀었다.
역시 여행에는 사이다와 삶은 계란이 빠질 수 없다.
이 촌스러운 습관은 우리 부부에게 오래된 ‘여행의식’ 같은 것이다.
두 시간쯤 달려 경주역에 내리자, 공기가 달랐다.
낯선 곳이지만 이상하게 익숙했다.
바람 속에 오래전 기억이 스며 있는 듯했다.
첫 목적지는 황리단길.
낮은 기와지붕 아래로 사람들이 오가고, 오래된 담벼락에는 세월의 색이 묻어 있었다.
그 사이마다 새 가게들이 세련되게 들어섰지만, 골목의 숨결은 여전히 옛날 그대로였다.
점심으로 백숙을 먹었다. 김이 피어오르는 냄비 앞에서 가족이 둘러앉는다.
첫 숟가락에 몸이 풀리고, 마음까지 따뜻해졌다.
식사 후엔 경주빵과 보리빵을 하나씩 사서 나눠 먹었다.
빙수집에 들러 멜론빙수와 파인애플빙수를 시켰다.
차가운 얼음보다 아이들의 웃음이 더 시원하게 퍼졌다.
오후에는 ‘추억의 달동네’로 향했다.
초입의 “추파남점빵(추억을 파는 남자 점빵)”이 우리 시선을 끌었다.
가게 안에는 어린 시절의 물건들이 빼곡히 진열돼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신기한 낯선 세상, 우리에게는 돌아간 듯한 시간이었다.
가게 앞 달고나 뽑기 판 앞에서 우리는 모두 진지해졌다.
“오징어 게임”의 장면이 겹쳐져서일까, 숨을 죽이고 막대를 돌렸다.
“와우~ 이게 되네! 하하하!”
성공의 순간, 환호성이 터졌다.
그 짧은 순간이 우리 가족의 오래된 사진처럼 마음속에 새겨졌다.
저녁 무렵,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마트에 들러 장을 보고 숙소로 향했다.
고기를 굽는 동안 방 안은 금세 연기로 가득 찼다.
지글지글 소리, 아이들의 재잘거림, 아내의 웃음.
둘째 한을이 상추에 고기를 싸서 내게 건넸다.
“아빠, 드셔보세요. 이거 진짜 맛있어요!”
그 한마디에 하루의 피로가 녹아내렸다.
밤이 깊어갈수록 대화는 길어졌다.
누가 제일 많이 웃었는지도 모를 만큼 웃었다.
둘째 날은 경주의 느린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날이었다.
점심은 고래등 한정식. 반찬이 하나씩 놓일 때마다 손맛이 느껴졌다.
“이게 다 나오는 거야?”
놀란 아이들은 MZ세대답게 인증샷을 찍어 휴대폰에 저장했다.
식사 후 다시 황리단길로 향했다.
전날보다 부드러운 햇살, 느릿한 걸음.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을 시켰다.
아이들은 에이드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봤다.
그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그 시간이 참 좋았다.
밤이 되자 우리는 동궁과 월지로 향했다.
입구를 지나자, 눈앞 풍경이 숨을 멎게 했다.
물 위로 번지는 조명, 흔들리는 버들가지, 잔잔한 파문.
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센스 있는 패션 룩의 한별이와 이제는 한껏 성숙해진 한을이의 원피스가 바람에 흔들려 주변의 시선을 빼앗는 모습을 보니 묘한 자부심이 생긴다.
주변의 소란과 빛을 뒤로하고, 오직 가족에게 집중하는 아이들의 미소가 동궁과 월지의 어떤 조명보다도 따뜻했다.
그래서 사진보다, 그 웃음과 함께한 시간이 더 소중했다.
숙소로 돌아와 아이들이 꺼낸 건 ‘찍찍이 동전 붙이기’와 ‘자판기 선물 뽑기’.
방바닥에 둘러앉아 게임을 시작했다.
“아빠 탈락!”
“엄마 이겼다!”
웃음이 겹치고, 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이기고 지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함께 있다는 것, 그것 하나로 충분했다.
마지막 날 아침, 맷돌순두부집에서 따끈한 순두부를 먹었다.
고소한 콩 내음이 코끝을 간질였다.
보문호 근처 카페에 들러 마지막 커피를 마셨다.
잔잔한 물결, 천천히 걷는 사람들, 날아가는 새들.
시간이 조금만 더 머물러줬으면 했다.
기차에 올라 창밖을 본다. 경주가 멀어진다.
아이들은 졸음에 고개를 기대고,
나는 휴대폰 속 사진을 넘기며 추억을 저장했다.
“이 사진 잘 나왔다.”
사진 속 우리 얼굴에는 같은 표정이 담겨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 얼굴.
이번 여행이 남긴 건 풍경이 아니라 웃음이었다.
그 웃음에서 번진 잔잔한 행복이 우리를 더 단단하게 묶어줄 것이다.
그 기억 하나면, 충분했다.
B&J 32년 7월 어느 날
웃음으로 쉼표를 품은 우리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