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지금, 그를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애틋하다’는 말조차 어색할 만큼.
어머니는 다정다감한 분이었다.
웃음으로 사람을 품었고, 늘 누군가 곁에 있었다.
반면 그는 평생 친구 한 사람 없이, 오직 가족과 친척만을 곁에 두었다.
말은 적고, 표정은 굳었으며, 일상의 공기는 늘 그의 권위에 눌려 있었다.
어린 시절 내가 기억하는 그의 온기는
여동생에게 향하던 짧은 미소 하나뿐이었다.
그것이 내가 본 그의 따스함의 전부였다.
사춘기에도, 고3의 막막함 속에서도, 재수의 불안 앞에서도
나는 그에게서 위로나 조언을 받은 적이 없다.
진심이 오간 대화는 단 한 번 뿐이었다.
대학에 들어가 늦은 반항을 시작했을 때,
그는 나를 불러 조용히 물었다.
“넌 꿈이 뭐냐?”
나는 일부러 담담히 말했다.
어떻게든 그를 실망시키고 싶었다.
“그냥 평범하게 살려고요.”
그는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낮게 읊조리듯 말했다.
“살아봐라. 평범하게 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언젠가 알게 될 거다.”
그 말의 무게를 이해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때는 그저 잔소리로 들렸던 말이
이제는 내 삶의 문신으로 남았다.
우리 집은 늘 팍팍했다.
어머니는 쉼 없이 일하셨다. 철물점, 부대찌개집, 호프집, 외판원, 보험 설계까지.
손을 놓은 적이 없었다.
그 모든 고단함 속에서도 어머니는 웃었다.
사람들은 그 웃음을 좋아했다.
그분은 보수적이었다.
일에 특별한 열정도, 표현의 따뜻함도 없었다.
자신 대신 생활전선에서 싸우는 아내에게 다정한 말조차 건네지 않았다.
그는 말보다 침묵을 택했고, 그 침묵으로 자신의 무력감을 감췄다.
어머니가 늦은 밤까지 일할 때면
“고생했다” 대신 “늦게 다니지 마라”, “늦은 시간 남자 손님 받지 마라” 같은 말로 마음을 닫았다.
결국 호프집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즈음부터였을까. 나도 그와 마주 앉는 일이 불편해졌다.
그때는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그 역시 견디기 벅찼을 것이다.
아내를 밤늦게까지 일하게 만드는 현실이 부끄럽고,
가족을 온전히 책임지지 못한다는 자책이 그를 짓눌렀을 것이다.
그는 성실한 가장은 아니었다.
오십 대 중반, 한창 일할 시절에 일을 그만두었고,
새로 시작한 일마다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나 마음만은 누구보다 성실한 가장이고자 했을 것이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간극이 그를 무너뜨렸다.
그 간극 위에서 버티기 위해 그는 말수를 줄이고 더 엄격해짐을 선택했다.
그것이 자신을 지탱하는 유일한 방식이었을지 모른다.
그의 굳은 표정과 권위는 성격이 아니라 생존의 언어였다.
저녁 식탁 위의 침묵은 된장찌개보다 무거웠다.
우리는 밥을 먹으며 서로의 눈을 피했다.
숟가락 부딪히는 소리만이 식탁 위를 채웠다.
세월이 흘러, 그 무게가 내 어깨로 옮겨졌을 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의 새벽 출근길, 구부정한 뒷모습,
퇴근 후 소파에 기대 눈을 감던 고요한 얼굴.
그 모든 것이 위태로움 속에서 가족을 지탱하려는 마지막 버팀목이었다는 것을.
‘달려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끝내 완주하지 못한 사람의 피로.
그 현실의 무게가 그의 말과 미소를 앗아갔음을.
그는 완벽한 아버지가 아니었다.
성실한 가장도 아니었다.
다만, 각박한 현실 속에서 마음의 짐을 짊어진 채 버티려 했던 한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내가 품었던 미움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았다.
그에게 미처 건네지 못한 이해와 연민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그분을 미워했던 시간보다,
사랑하지 못했던 시간이 더 길었다.
먹먹하다. 아프다.
그리고 그립다.
나의 그분—아버지.
BJ 58년 10월 어느 날
자성의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