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오후, 남편과 시루를 데리고 집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평소 집에서는 나무늘보처럼 늘어져 있는 시루가 밖에만 나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발걸음도 가볍게 앞장서며 우리를 이끈다.
공원은 이미 산책을 나와 신나게 뛰어노는 강아지들로 가득했다. 우리가 공원에 도착하자 사루에게 다가와 냄새를 맡으려는 강아지들이 모여들었고, 다른 강아지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는 시루의 모습에 은근 기분까지 좋아졌다.
' 어머, 우리 시루 인기 좋은데?'
그중에서도 유난히 열정적으로 시루를 쫓아다니는 강아지가 있었는데, 흰색과 갈색 털을 가진 귀여운 아이였다. 견주는 이름은 '봄이', 나이는 세 살이라고 했다.
봄이는 다른 강아지들이 다가와도 관심이 없었고, 견주가 맛있는 간식으로 유혹해도 꿈쩍하지 않은 채 오로지 시루만 졸졸 따라다녔다.
' 너 해인이만 보이는 현우야...?'
얼마 전 끝난 드라마 '눈물의 여왕' 속 대사를 내가 읊조리자, 드라마를 보지 않은 남편은 무슨 얘기냐는 듯 의아하게 쳐다 보았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즐거워하며 봄이와 시루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정작 애정공세를 받는 시루는 전혀 흥미가 없다는 듯 철저히 무시한 채 시크하게 몸을 돌렸다. 사실 평소에도 시루는 강아지들의 털색에 따라 확연히 태도가 달라지곤 했다. 특히 갈색 털을 가진 푸들을 보면 적개심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고, 흰색이나 검은색 털을 가진 강아지들에게는 적극적으로 다가가 호감을 표시하곤 했는데, 하필 봄이는 흰색과 갈색 털이 섞여 있었다.
'아, 봄이 털색이 마음에 안 들었나....?'
잠시 머뭇거리는 나를 향해 시루가 빨리 가자고 재촉하며 줄을 잡아끌고 짖기 시작했다. 봄이는 시루의 무관심에도 여전히 시루를 바라보며 곁으로 다가왔다. 그런 봄이가 안쓰러워 남편이 시루를 향해 말했다.
" 시루야, 너 너무 매정한 거 아니야? 봄이가 저렇게 따라다니는데."
남편은 살짝 나무라면서도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봄이에게 무심한 듯 시크한 매력을 뿜어내는 시루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는 리모컨을 지키기 위해 우리와 신경전을 벌이고, 냉장고 문소리 하나에도 온 집안을 질주하며 작은 깡패처럼 행동하던 시루가 이럴 때는 마치 인기 절정의 꽃미남 배우라도 된 듯 시크하게 행동하는 게 귀여웠다.
나는 가방에서 시루의 간식을 하나 꺼내 봄이에게 건네며 미안한 마음을 대신했다.
' 봄이야, 우리 시루가 좀 까칠해서 그래.'
봄이는 간식을 받아먹으면서도 여전히 시루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결국 봄이의 견주가 봄이를 안아 올리자, 앞발을 허우적대며 마지막까지 시루에게 가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안 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렇게 매달리는데 같이 좀 놀아주지 그랬어."
남편이 안타까운 듯 말을 건네자, 나는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근데 혹시 봄이가 암컷인지 수컷인지 물어봤어?
" 아니, 근데 뭐... 설마 수컷이겠어?"
순간 나도 모르게 봄이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설마 봄이가 수컷은 아니겠지...?'
공원 입구를 빠져나오며 시루는 특유의 건들거리는 발걸음으로 앞장섰다. 언제나 그렇듯 뒤를 따르는 우리가 잘 따라오는지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며 여유 있게 걷는 모습이 오늘따라 더 우쭐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집에 돌아오지 마자 시루는 다시 작은 깡패 모드로 전환했다. 냉장고 문을 향해 총알처럼 달려갈 준비를 하며 간식을 달라고 애교 섞인 협박을 하기도 하고, TV리모컨을 호시탐탐 노리는 귀여운 깡패가 되어 있었다. 밖에서는 시크한 매력을 뽐내던 공원의 꽃미남은 온데간데 없고...
'오늘 시루는 완전 인기남이었네...'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꼬리를 흔들어대는 시루를 보며 남편과 나는 오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말이지 이 녀석과 함께하는 일상이 기분 좋고 엉뚱한 사건의 연속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