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을 아껴온 친구.

by 빈칸센

나에겐 5년을 아껴온 친구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효. 늘 만나자 할까 말까 고민했던, 아끼고 아끼던 그녀를 드디어 오늘 만나러 간다. 정확히 말하면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녀의 아우라?를 느끼고 왠지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해외 연수 설명회에서 본 그녀는 빈티지한 셔츠에 노란 금발을 하고 있었다. 지방 대학교에선 꽤나 눈에 띄는 차림이었는데 - 자신 만의 고고함과 분위기가 확 느껴졌다. 어떤 생각을 갖고 사는지 궁금해지는 사람이었달까. 칠렐레 팔렐레 해파리 같은 내가 다가가면 헤치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순전히 나의 상상일 뿐이다.) 이후 말레이시아에 1달 동안 함께 했지만, 대화를 나눌 만한 상황은 몇 없었다. 30명의 연수생, 심지어 성이 다른 친구에게 먼저 손을 뻗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말 친해지고 싶은 마음인데, 요상한 소문이 돌 수도 있고. 그렇다면 타지에서의 30일이 고통스러워 질게 뻔했으니까.


하지만 나에게도 기회가 생겼다. 나의 룸메이트와 그녀가 같은 학과 선후배 사이였던 것! 그걸 빌미 삼아 한 찻 집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 나는 어색함을 느꼈기에 룸메이트를 불렀고, 다른 여자 일행 1명도 동행을 했다. 어색하지 않아 다행이면서도 애석했다. 단 둘이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말이다. 지레 겁만 먹은 거 같은 느낌이랄까? 내가 숨겨온, 속에 담아둔 사연들을 기꺼이 꺼내 보이고 싶었다. 내 비밀을 아무런 편견 없이 받아들여줄 것 같았기에, 그날 게스트를 부른 것이 지금도 후회가 된다. 그리고 지금 그녀를 만나고 가고 있다. 말레이시아에 다녀온 후 5년이 지나서야.


그동안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상에 퍼지고, 나는 3년 전 서울에 올라와 있었다. 운 좋게 취업이 되어 터를 잡을 수 있었고 - 그녀와는 간간히 SNS 메세지를 주고받는 사이로만 지내왔다. (나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러다 연말 회고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12월 중순부터 ~ 31일까지 한 해를 돌아보는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 활동으로, 나와 내 친구들을 초대했다. 익명 회고였기에 각자의 깊은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는데 - 문득 그녀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용기를 내어 연락했고, 흔쾌히 참여를 승낙했고, 매일 그녀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은은하고 따뜻한 글과 단어들은 방금 우려낸 홍차처럼 마음에 들어왔었다. 한동안 잠잠했었는데, 더 친해지고 싶어졌다. 이게 2024년의 일인데 - 25년 초 서울에 터를 잡았다는 소식을 듣는다. 일을 시작하러 온 사람에게 선뜻 만나자는 말이 나오질 않았고, 그렇게 6달 정도 지났었나. 그녀가 준비한 행사에 잠깐 들러 보기로 한다. 마침 내가 좋아하는 합정. 가는 길에 푸딩 2개를 골라 담고 신나는 마음으로 달려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날은 흐리고 습기가 턱 끝까지 올랐다. 하지만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수줍은 마음에 푸딩만 덜렁 쥐어주고 행사장을 빠져나왔지만 - 그날 나는 거대한 한 걸음이라 여기며 속으로 엄청 뿌듯했었다!


그게 벌써 5달 전이고, 2025년 회고에도 어김없이 그녀를 초대한 나. 매일 회고 질문을 보내고 쓰고 정리하고 공유하다 보니 - 정말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고. 대담하게 카톡을 날려 본다.


빈 : 효야 내일 모해~?

효 : 메리크리스마스! 내일 공부할 예정입니다.

빈 : 오잉 다른 건 아니구 ~ 내일 합정 - 망원 가는데에 그냥 뭐 하나 해서 ㅎㅎ

효 : 우와 약속으로 오는 거야! 잠시 차라도 마실 수 있는지~

빈 : 저녁에 공연 볼 거라서 차 한 잔 할 수 있어!


역시 홍차 인간 다운 따뜻한 환대, 너무 반갑고 설레었다. 쉽게 잡힐 약속을 5년이나 미뤄왔다니! 언젠가 서울에 정착하면 합정 - 망원에 살고 싶었는데, 하필 그곳에 살고 있다니. 이것은 인연이란 생각이 확 들었다. 망원역에서 10분 정도 기다리고 있자, 그녀가 걸어오고 역시나 따뜻한 말로 나를 반겨주었다. 역시 홍차 같은 사람! 속으로만 외치는 나였다. 익숙한 듯 망원시장 쪽으로 걸으며 - 효는 내게 선택지를 주었다. 인기 있고 핫한 카페와 잔잔한 분위기 있는 곳 중 나는 분위기 있는 곳을 고른다. 그녀와 찬찬히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역에서 10분 정도 걸어 도착한 곳은 옆사람의 온기가 닿을 만큼 작은 에스프레소 바였다. 역시 그녀 다운 공간이라 생각한다. 나는 달달한 에스프레소를 그녀는 오렌지와 함께 즐기는 에스프레소를 택한다. 어제까지도 본 듯 반갑고 익숙하고 편했다. 동경하는 가수를 보듯 그녀의 취향 하나하나 나에겐 호기심 가득이다. 작은 가게에서 우리의 이야기가 들리기라도 할까. 입을 가리며 소소하게 말을 나눈다.


그날 우리는 옆자리에 앉아 뜨개질하는 분의 엄청난 이력과 서울 한남동의 미용실을 가보려던 이야기.

자우림의 음악을 사랑하지만, 라이브로 듣지 못했다는 아쉬움.

함께 해외 연수 갔던 친구의 근황과 약간의 그리움에 대하여.

혀를 내두를 만큼의 서울의 물가, 그녀가 살고 있는 무지개색 빌딩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커피로 가득했던 잔이 바닥을 드러내고, 벌써 2시간이 흘러 건물 밖으로 나와 합정역까지 걸어간다. 그때까지도 각자의 결혼과 나의 이상형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헤어진다. 따뜻하고 쿨한 배웅까지 - 역시 내가 친해지고 싶은, 닮고 싶은 그 분위기였다. 왜 이제야 연락했을까 살짝 후회도 되었지만, 지금이 딱 적기였을 것이다. 네가 궁금하다고 물음표를 띄워 보내는 일, 기꺼이 친해지고 싶다 말할 용기가 지금에서야 올라온 거니까.


언젠가 다시 효를 볼일이 있다면, 내 집에 초대해보고 싶다. 직접 만든 음식을 대접하고 그녀와 어울리는 따뜻한 차 한 잔과 제철 과일을 내어 줘야지. 서울에서 느끼고 살았던 이야기들로 잔을 가득 채워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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