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 되어서야

by 빈칸센

12월, 겨울이다. 집에 있어도 한기를 느낄 수 있는 나의 집. 웃풍이 심해 보일러 온도를 높여도 큰 차이가 없는 오래된 원룸. 조금 따뜻해지기는 하나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해 옷을 껴입어야만 한다. 길게 늘어난 히트텍 위에 남색 티셔츠를 입고, 기모 잠옷 바지에 두 다라를 하나씩 넣는다. 어깨에 갈색 담요를 덮으면 겨울나기 완성. 차갑게 익은 이불 속, 몸을 비집어 넣는다. 이불을 넓게 벌려선 안 된다. 미약한 온기마저 빠져나가니까. 버슥버슥. 옷감과 이불의 안감이 부딪히는, 좋아하는 소리. 몸을 한껏 웅크리고 좁은 공간에 체온을 나눠 본다. 몇 번의 깊은 숨을 쉬면, 다시 아침이 온다. 밤새 틀어진 보일러, 건조한 방. 창 밖으로 들어오는 얕고 시린 빛이 익숙하다.


2015년의 12월이었다. 주변 그 어디를 둘러봐도 앳된 청년들 뿐이었다. 침울한 심정과 달리 하늘은 참 푸르고 겨울 답지 않게 포근했다. 입소하기 좋은 날. 나를 배웅하러 온 가족들을 시샘했던 2015년 12월 21일. 머리카락이 참 길구나…자유로운 사람의 모습은 이런 거구나. 앞으로 남은 1년 9개월이란 시간을 떠올리니 시야가 흐려졌지만, 애써 웃어 보였다.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뭐.. 가서도 살겠지.” 날씨처럼 동조하는 가족들이 미웠다. 그날 내 심정은 아-무도 모를 거다. 조금은 외로웠고, 많이 막막했다.


훈련소 생활에 준비 운동은 없다. 생전 입어보지 않던 색의 옷(이라 부르고 싶지도 않지만)과 무거운 듯 군화와 보급용 양말을 받고, 밥이란 걸 먹긴 했다만 손에 잡힐 만한 기억은 없다. 정체 모를 얼룩이 묻은 모포에 몸을 숨기고 잠에 들었다. 방해 받기 싫을 정도로 달콤한 잠은 오래가지 못했다. 누군가 나를 깨우더니 불침번이라 한다. 그땐 무엇이 맞는지도 모른채 그저 따라하기만 바빴고, 비몽사몽 군복을 입고 방문 앞에 정자세로 서있는다. 푸른 취침등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지러웠다. 입에 넣은 음식이 쏟아질 듯한 멀미. 이런게 현기증인가 싶다. 새근새근 잘도 자는 동기들을 부러워 하고, 잠깐 맛보았던 대학시절을 떠올리다 보면 다음 불침번에게 불행을 전달할 시간이 된다.


그런 하루 하루가 쌓여, 적응이란 단어를 새긴다.

군대도 사람 사는 곳 이라던 학회장 선배의 말을 이해하게 되고,

사회란 바다에서 숨쉬는 지인들의 편지에 위로를 얻는다.


오래되고 허름한 훈련소,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2층 건물, 2명이 나란히 서면 끝인 길고 좁은 복도, 10-15명을 우겨 넣은 좁은 방. 어딜 가도 짧은 머리의 청년들 뿐인 이곳은 어떠한 이유에선지 따뜻한 물이 아주 잠깐만 공급 되었는데, 나와 동기들은 간부와 조교들에게만 따뜻한 물을 주는 거라며 작은 음모론을 만들곤 했다. 게다가 샤워 헤드가 없어 일자로 흘러 나오는 찬물로 찌든 몸을 씻어야만 했다. 몸에 닿는 면적이 적어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내가 이렇게까지 빨리 씻을 수 있는지 21살이 되어서야 처음 알았다. 그래도 가끔은 새로 생긴 샤워 건물을 쓰게 해주는 날도 있었다. 훈련을 빡세게? 돌리는 날이면, 비누 하나를 챙겨 샤워실로 간다. 나의 건물을 빠져나와 걸어서 5분 거리인 곳인데 대기는 바깥에서 해야만 했다. 입김을 하- 하- 불며 장난치기 바빴던 우리들. 여기서도 빠르게 씻어야 했지만, 하얀 증기 속에서 씻는 기분은 정말 최고였다.


하루 하루를 주어진 대로 살다 보면 한 달은 꽤 금방이다.

이후 자대 배치란 걸 받게 될 때, 나는 깨달았다.

우리의 시작점은 같았지만, 도착점은 다르다는 걸.


아니, 크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전라도 광주로 후방 배치 받았고 동기들은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 길고 거대한 갈색 가방 속은 세금으로 보급된 물건으로 가득 채운다. 어깨에 들쳐 메면 누군가는 버스로 누군가는 기차를 타고 자신의 자리를 찾아 떠나야만 할 때, 한 달 간 쌓아둔’ 정’이란 댐이 넘쳐 버린다. 군대가 아니라면 만날 일 없는 사람과 함께한 찰나가 유독 깊게 남았다 보다. 한참을 아주 한참을 서럽게도 울었다. 어떤 잔여물도 남기지 않으려는 것처럼. (글을 쓰며 생각해보니 전우애인가 싶다, 10년이 지나서야 이해하는…) 헤어짐의 슬픔과 낯선 곳에 간다는 무서움을 아는 듯, 동기들은 나를 위로했다. 전역하고 다시 보면 되지 않겠냐며, 이게 끝이 아니라 말했다.


당연하게도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우리라는 이름의 끈은 꽤나 얄팍했기에.


10년이 지나, 다시 2025년 잊고 지낸 것들은 말이 없다.


잊혀진 지도 모른채 살아가다 문득 고개를 들고선

“내가 있었다”며 대답할 수 없는 안부를 묻는다.


매해 겨울 아침, 푸른 빛이 맺힌 창문과 한기.

몽롱한 채로 일어나 허공을 응시하면 떠오르는 기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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