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 인형의 방콕 여행기

by 빈칸센

2월 2일, 시원섭섭한 퇴사 이후 저는 태국으로 떠났습니다. 5일 출국이라 급하게 짐을 꾸렸는데요. 다들 아시다시피 여행이란 시간 났을 때 떠나야 하는 법. “지금이 아니면 언제?”라는 문구를 떠올리며 비행기를 예약했습니다. 사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데, 저만 갑자기 멈춰버린 느낌이 정말 싫었습니다. 전 직장 동료들은 2월 행사 준비에 열을 올리고 매일 홍보하며 지낼 게 눈에 선했어요.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일들 중 가장 반짝이는 ‘여행’을 택한 거예요. 퇴사에 흔들리지 않고 재밌게 즐기고 있다는 걸 사람들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수많은 나라 중 태국을 고른 이유는 딱 하나! 제 친구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대학 친구 ‘연’은 본인 고향이 태국이라며, 매년 겨울마다 태국에서 두 달 살이를 하는데요. 한국말을 할 사람이 없어 심심하다며 숙소비도 아낄 수 있으니 본인이 있을 때 놀러 오라고 노래를 불러대던 그녀. 드디어 그 노래에 맞장구를 칠 수 있게 된 거죠. 하지만 가족들에게는 쉿, 비밀이에요. 퇴사 소식을 전하지 않았거든요. 퇴사한다고 말하면 무슨 정신이냐부터 시작해서 다음 이직할 곳은 구했냐, 너무 대책 없는 거 아니냐, 요즘 취업하기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며 온갖 걱정을 늘어놓을 게 뻔했거든요. 취업 시장이 차가운 건 이미 알고 있고, 솔직히 대책 없는 것도 맞는 말이라 굳이 실랑이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안 그래도 아버지가 물으시더군요. “너 휴가를 며칠 쓴 거냐. 네가 없어도 회사가 굴러가냐”고요. 남이 운영하는 회사도 걱정하는 분이, 본인 자식이 퇴사했다고 하면 얼마나 놀라고 화를 내실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하.


휴가를 썼다고 해도 가족들의 걱정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저희 가족은 엄마, 아빠, 누나 두 명까지 총 다섯 명인데요. 큰 누나에게 여행 소식을 알리자 네 명 모두에게 연락이 왔어요. 왜 태국을 가는 거냐, 요즘 동남아가 얼마나 위험한지 아느냐, 그 친구는 뭐 하는 친구냐, 왜 태국에 있냐, 믿어도 되는 거냐, 관광지를 옮길 때마다 연락해라, 친구 번호도 알려 달라 등등. 온갖 걱정 펀치를 일방적으로 맞았습니다. 예견된 결과이긴 합니다. 저희 집에는 걱정 인형들이 삽니다. 누나가 가장 자주 보는 프로그램은 <그것이 알고 싶다>이고요. 매일 단톡방에는 온갖 사기 수법이 공유되며 조심하자는 말로 마무리됩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지하철과 기차를 제외한 모든 교통수단을 탈 때마다 불안해합니다. “이번이 내 마지막 비행이면 어떡하지?” “버스가 갑자기 충돌하면?” 등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떠올라요. 그 시작이 언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불안은 10년이 지나도 뜨문뜨문 제 머리를 두드립니다. 납치에 대한 걱정도 충분히 하고 있고요. 그래서 가족들의 걱정은 저를 더 무겁게 만듭니다. 가기 전날까지 이어진 걱정 속에서, 저는 친구에게 부탁했습니다. 비용은 내가 낼 테니 공항까지 마중 나와 달라고요. 그렇게 걱정 속에 시작된 여행은, 의외로 알차고 행복했습니다. 오늘 먹고 싶은 것과 가고 싶은 곳, 그리고 몇 시에 잠들지만 정하면 되는 아주 본능적인 삶. 걱정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어요.


그런데 여행 첫날, 오토바이를 타야만 했습니다. 태국에서는 오토바이 택시가 훨씬 저렴하고 빠르다고 하더군요. 도로 상황이 좋지 않아 차로 40분 걸릴 거리도 20분이면 갈 수 있는 효율적인 교통수단이라며. 심지어 카카오택시처럼 앱으로 부를 수 있었어요. 기술에 감탄하면서도 속으로는 걱정이 피어올랐습니다. 오토바이 뒤에 탔다가 넘어지면 어떡하지? 보험이 있어도 병원에서 내 증상을 어떻게 설명하지? 치료가 잘못되면? 남은 여행 일정은? 영원히 불구가 되면? 부정적인 상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그 끝에 오토바이가 도착했습니다. 저는 탈 수밖에 없었죠. (심지어 운전사는 여분의 헬멧도 없다 했습니다. ‘나는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냥 자유를 즐겨. 뒤에 손잡이 잡으면 떨어질 일 없어.”
친구의 말을 떠올려 봅니다. 아니, 자유도 좋지. 좋은데 안전장치도 없이 어떻게 자유를 즐기라는 건지 납득이 될 리가 없잖아요.


일단 몸을 실었습니다. 기사님의 시간을 뺏을 수 없고, 무섭다고 가만히 서 있을 수도 없으니까요. 친구가 말해준 손잡이를 꽉 잡고 허리와 허벅지에 힘을 줍니다. 5분쯤 달렸을까, 슬슬 몸이 아파오더군요. 다리는 우스꽝스럽게 달달 떨렸고요. 웃음이 피식 나왔습니다. 그때부터 긴장이 조금 풀렸습니다. 숨을 제대로 쉬어보고 싶었어요. 요가를 배울 때, 내 호흡에 집중하면 불안이 정리된다고 하셨거든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지 말자고. 지금을 살아보자는 마음으로 천천히 내쉬고 들이마셔 봅니다. 머리를 스치는 바람과 스쳐 지나가는 건물들, 거리의 소리와 가로등을 지나는 나를 바라봅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사무실에 앉아 몰두하던 나를 지나, 여행을 선택한 지금의 나를요. 여전히 다칠까 걱정되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지금의 자유와 바람은 누구도 뺏을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후의 여행에서도 오토바이 택시로 여기저기 누비며, 오늘 주어진 시간을 야무지게 즐겼어요.


저는 별탈 없이 한국에 돌아와 설 연휴도 잘 보내고 있습니다. 3월에는 부산을, 4월에는 일본을 가볼 예정입니다. 그때에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미리 겁먹지 않으려고 해요. 그저 주어진 오늘을 잘 즐기고 누려보려 합니다. 취업과 미래도 물론 걱정되지만, 그건 그때 가서 걱정하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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