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부 미국살이, 적응하는게 무슨 의미일까
하늘이 점지해 준다는, 모두가 원한다는, 주재원 기피 현상 속에서도 항상 경쟁률이 높다는 미국 주재원이었다. 동남아, 남미, 인도도 아니고 미국 본토에서 고액 연봉을 받으며 미국 전역을 여행하며 산다는 미국 주재원이었다. 몇 년 전만 해도 매일 새벽기도를 하며 우리 부부가 그렇게 원하고 원했던 바로 그 미국 주재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우린 30층이 넘는 고급 아파트의 40평으로 이사한 지 1년도 안 됐다. 캠핑카를 장만한 지 이제 5개월 차이고 우리 자동차는 1년 넘게 기다리다가 만난 아직 백일잔치도 못한 신생아란 말이다.
행복의 정점에 있던 우리는 절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맨몸으로 풍덩 바닷속에 던져지는.
남편은 혹시, 설마라는 생각으로 지원했는데 될 줄 몰랐다고 했다. 눈꼬리가 어깨까지 쳐진 채 미안하다고 하는 남편을 원망하고 탓할 시간이 없었다. 남편이 업무를 인계받아야 하는 장기 출장이 두 달 앞으로 다가왔기에 우린 빠르게 한국 생활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주재원인지라 4년 후 다시 돌아오기 위해 완벽히 정리하면 안 되고 적당히 정리해야 했다. ‘적당한 정리’라니 이 얼마나 애매하고도 답답하며 정답이 없는 작업이란 말인가. 똑떨어지는 정확한 상황을 좋아하는 우리 부부는 버텨내기 힘들었다. 앞으로 우리가 지낼 외국인 노동자로서의 4년은 얼마나 더 불확실한 애매함 속에서 지내게 될지 눈앞이 캄캄했다.
캠핑카에서 행복했던 불과 몇 달 전에는 30대였는데 그새 우린 생일이 지나 40대로 접어들었다. 기분 탓인지 40대에 낯선 곳에서의 새로운 시작은 공포와 두려움이 몇 배는 더 증폭된 듯했다.
역시 출국 준비의 하이라이트는 예상했던 대로 캠핑카를 중고로 처분하는 일이었다. 중고 캠핑카는 사고팔기가 워낙 힘든지라 폐차될 때까지 타고 다니자는 마음으로 샀었다. 상황이 이렇게 될 줄 그땐 몰랐으니까. 그때의 계획으로는 캠핑카 타고 제주도도 가고 대한민국을 곳곳이 누비며 오래오래 함께할 줄 알았으니까.
나와 남편은 중고 거래 커뮤니티에 글을 올리고 문의사항에는 구구절절 친절하게 답변을 달았다. 세상 행복해 보이는 캠핑카와의 사진들을 주변 지인들에게 보내며 영업에 열을 올렸다. 캠핑카를 볼 수 있겠냐는 문의가 오면 언제든 구경 오시라 했고 소중한 고객님이 오시면 캠핑카에 모셔 주차장을 한 바퀴 돌고 캐노피도 펼쳤다 접었다 하며 열혈 영업을 이어갔다. 심지어 밥 먹다가도 불안한 네 개의 눈동자가 마주치면 상황극을 만들어 연습하며 끊임없이 영업 전술을 연마했다. 하늘도 우릴 안쓰럽게 여겼던 걸까. 10월 남편의 출국 이틀 전 겨우겨우 우리의 추억 가득한 캠핑카와 세상 쿨하게 이별할 수 있었다.
캠핑카는 내가 해결해야 할 수많은 미션들 중 시작에 불과했다. 이것만 끝나면 우아하게 온라인 면세점 쇼핑하며 캐리어에 된장 고추장 정도 챙길 줄 알았던 건 단단한 착각이었다.
크게 욕심부린 금액도 아닌데, 우리 부부에게 성공의 달콤한 맛을 보여주던 소중한 40평 아파트의 전세가 안 빠진다. 공교롭게도 집 근처 새 아파트 단지의 입주 시기와 맞물려버린 것이다. 될듯될 듯 되지 않았고, 계약파기와 수차례의 가격 조정 끝에 계약이 성사됐다. 그제야 우린 겨우 출국 날짜를 잡을 수 있었다. 가고 싶어 가는 것도 아닌데, 가는 길이 이리 험해버리니 이거 정말 확 다 엎어버리고 싶었다. 남들도 다 이런 건가. 이러면서까지 가는 게 맞는 걸까.
마치 온라인 게임의 퀘스트처럼 하나를 해결하면 또 하나의 문제가 나타났다. 게임에서는 뭐 레벨업도 시켜주고 이것저것 아이템도 주고 그러던데. 나는 손에 쥐어지는 거 하나 없이 다음 퀘스트를 깨기 위해 달려가는 여전사처럼 비장했다.
그렇게 비장하게 해상 컨테이너로 우리의 짐을 미국으로 잘 보냈고, 남은 짐들을 정리했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퀘스트였던 아이와 둘이 비행기에 몸을 싣는 것까지 위태위태했지만 무사히 잘 마칠 수 있었다. 짐이 너무 많아서 추가요금을 50만 원 결제한건 지금 생각해도 손이 부들부들 떨리긴 하지만. 어쨌든 다치지 않았고 아이에게 화내지 않았고 아이는 미지의 세계로의 출발에 설레어했다. 열 시간이 넘는 비행시간 동안 8시간은 기절한 듯 잤다. 그렇게 우린 아메리카 대륙에 랜딩 하게 되었다.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출국까지 석 달 남짓되는 기간 동안 공석이었던 남편의 자리였다. 남편의 잦은 출장으로 그의 빈자리는 내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미즈캠이라고 들어는 보았는가. 여자들끼리 남편 없이 캠핑한다는 미즈캠도 서슴지 않았던 그런 멋진 녀성이었건만. 해외 이주 과정에서는 많은 결정들을 해야만 했고 예기치 못한 일들이 짧은 시간 동안 내게 마구 쏟아졌다. 물어볼 곳 손잡을 곳 기댈 곳이 필요했다. 하지만 내겐 없었다.
난 그 시간 속에 혼자였다.
평소 알콩달콩 깨가 쏟아지고 서로가 꼭 옆에 붙어있어야 하는 그런 부부는 절대 아니다. 하지만 인생의 큰 전환점의 과정에 힘듦을 공유하고 위로할 나의 전우가 필요했다. 그는 항상 그랬듯이 멀리멀리 태평양 건너에 있었다.
날씨까지 완벽했던 그 해 5월 캠핑카에서의 행복감이 지금도 생생한데 경쾌하던 캔맥주 따는 소리도 귀에 맴도는데.. 난 지금 여기 지구 반대편에서 매일 새벽 5시 50분에 일어나 아이 도시락을 싸고 백반집처럼 매끼 식사를 만들어 내며 살아가고 있다. 가끔 한국의 캠핑장이 그리울 때에는 뒷마당 잔디밭에 우리의 낡은 텐트를 치고 맥주를 한잔하는데 하루는 남편이 눈치 보며 조용히 묻는다. 요즘 지내는 게 어떠냐는 물음에 나지막이 대답한다.
난 적당히 살만해, 매일이 걱정이고 불안하지만 어떻게든 살아지겠지, 괜찮아질 거야. 그런데 그렇게 살만해질 때쯤엔 복귀해야 하는 게 주재원이라더라.
4년이라는 시한부 미국살이는 분명 좋은 점도 많지만 감내해야 하는 게 너무나 많다. 살만해질 즈음엔 떠나야 할 이곳에 적응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자체가 무의미한 건 아닐까? 오늘도 도돌이표 같은 질문을 내게 던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