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날은 그냥 구겨진 채로 넘어가기도 했다.
따뜻한 남쪽 지방에서 태어나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학창시절을 보냈다. 어디를 가도 남들보다 조금은 더 당당한 성격을 가졌던 이유 탓일까. 지방은 나에게 너무나 작은 우물처럼 느껴졌고 이곳에서는 그 어떤 것도 이루지 못할 것만 같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이 도시를 답답하게 느꼈던 이유는 딱 하나였다. 난 공부에 흥미가 없어서, 그냥 가만히 앉아서 문제 풀고 숙제나 하라고 하는 학교라는 공간 자체가 너무 답답했다. 그러니까 지방이 작았던 게 아니라 그때의 세상이 나에게 너무 단조로웠던 거다. 어디선가 더 넓은 세계가 있을 거라 믿었고 막연하게 서울에 대한 동경심을 가지며 자랐다.
그래도 서울은 높고 넓은곳이니까 일단 알바를 해도 페이는 높을것이며 넓은땅만큼 많은 일자리들이 있을거라 생각했다. 20살이 되면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시내를 내달릴것만 같았는데 어느새 엄마한테 서울보내달라며 징징거리는 어린애만 남아있었다.
그 당시 엄마가 한 달 넘게 잠을 못 주무셨다는 얘기를 나중에서야 전해들었다. 인서울로 대학을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서울 가서 살아보고 싶다”는 이유로 스무 살짜리 딸을 홀로 보내야 한다니. 스무 해를 품어온 자식을 갑자기 외딴 곳으로 내보낸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이었을까.
그렇게 나는 트렁크에 다 담지 못해 앞자리까지 넘어온 빨래건조대와 나란히 앉아 원룸살이 짐을 가득 싣고 서울로 올라왔다. 침대도 TV도 없는 작은 원룸방에 이부자리를 깔아주시던 부모님의 뒷모습이 기억 속에 유난히 오래 남아 있다. 그 후로 나는 연희동의 대학 교문을 매일 지나쳤다. 나는 교내 카페로, 함께 걷던 또래 학생들은 강의실로 향했다 같은 나이인데도 삶의 결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는 걸 그때 처음 실감했다. 걸음이 어긋나는 순간마다 내 삶이 어디로 미끄러지고 있는지만 희미하게 느끼고 있었다. 지 팔자 지가 꼰다는 말이 딱 맞는 그런 20대의 시작이었다.
서울에서의 삶은 생각보다 훨씬 거칠었다. 잡지 속 멋진 커리어우먼은커녕, 알람에 쫓겨 지각하지 않으려고 뛰어가는 모습은 학창시절의 나와 다르지 않았다. 북적이는 지하철. 집에 5분이라도 빨리 가겠다며 사정없이 밀고 들어오는 사람들.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힘든 8차선 대교들. 모든 것이 복잡했고, 조금씩 나를 닳게 했다. ‘왜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지?’ ‘언제 끝날까’ 어느새 좋아하는 것을 찾기보다 생활비와 월세를 벌기 위해 일하고 있었다. 꿈이 아니라, 생존을 먼저 배운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서울이라는 회색 틈바구니에서 그냥 버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별 기대도 없었고, 설렘 같은 건 이미 잃은 지 오래였다 회사와 집, 지하철과 편의점. 그 네모난 동선 위에서 하루가 접혔다 펴지기를 반복했고 어떤 날은 그냥 구겨진 채로 넘어가기도 했다. 그 안에서 새로운 감정을 찾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인생의 방향이 바뀌는 순간은 드라마틱한 사건도 인생이 뒤집히는 계기도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주 작은 생명 하나에서 시작됐다. 온기를 가진, 살아 있는 무언가를 바라보는 순간부터 내 하루가 조금씩 달라졌던 것 같다. 그때는 몰랐다. 그 존재가 나를 다시 살아보게 만들 거라는 걸. 그리고 이 회색도시 전체가 그 작은 존재를 통해 새로운 색을 띠게 되리라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