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망치러 온 작은 구원자

검정 비닐봉투에 물티슈 3장

by 나아인

"발 빠진 쥐 발 빠진 쥐" 오후 6시 서울 지옥철 퇴근길을 경험해 본 신 적이 있나요? 그렇다면 유감입니다. 평일 오후 서울 지하철 2호선을 타면 마치 물류 컨테이너에 납치되어 강제로 이민을 가는 값진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하 왜 조그맣게 태어나가지고..' 한숨을 쉬며 앞사람 어깨너머로 틈틈이 어디 역에 왔는지 확인해 본다. 온몸에 무게를 싣고 밀고 들어오는 사람들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기 일쑤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약속에 늦거나 소중한 저녁시간이 줄어들게 뻔하니 CCM을 들으며 오늘도 선한 마음으로 하루를 마무리해 보자 생각해 본다.


지하철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타고, 출근길보다 두 배는 당찬 발걸음으로 집에 들어간다.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검정 비닐봉지를 꺼내 물티슈 세 장을 넣고, 서랍을 열어 옷가지를 챙긴다.


"산책갈까?"


<산책>이라는 단어에 꼬순내와 함께 꼬리가 프로펠러처럼 돌아가는 녀석.

내 인생을 망치러 온 작은 구원자,

산책 10분에 온 세상을 가진 것처럼 발발거리는 강아지를 키우고 있다.



5년 전, 코로나와 재택근무로 세상과 단절된 채 지냈다.

덕분인지 마스크를 벗을 때까지 나는 코로나가 한 번도 오지 않았던, 소위 ‘슈퍼 면역자’였다.

당시 주 3일 재택근무에 동반출근이 가능한 반려동물 회사를 다니고 있었는데, 우연인지 운명인지 강아지들을 만날 기회가 정말 많았다. 회사 모니터 앞에 앉아 업무를 보는 내내 강아지들과 함께 하다보니 어느새 집 한켠에 따뜻한 보금자리를 마련해두곤 유기견 임시보호를 하고 있었다.


(반려인이 되기까지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나중에 기회가 되면 써보도록 하겠다

지금까지도 매일 똥봉투를 들고 산책셔틀을 해야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덜컥 반려인이 된 이후, 생명을 키워내기 위해선 앞으로 결코 대충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좀 늦게 알아도 됐을뻔했다) 먼저 작은 원룸 생활을 정리했다. 서울부터 경기도까지, 공원이 있는 동네를 기준으로 지도 앱을 확대했다 줄였다 하며 투룸을 찾아다녔다. 역세권인지 주변에 편의점이 있는지 보다는 퇴근 후 산책이 가능한지, 주말에 마음 놓고 뛰어놀 공간이 있는지 같은 것들이 집을 고르는 기준이 됐다. 앞으로 지불해야 할 사료값과 병원비를 떠올리면 지금보다 더 벌어야 했고, 무엇보다 쓰러지면 안 됐다. 강아지는 여전히 귀엽기만 한데, 나는 이 작은 생명을 핑계 삼아 앞만 보고 달렸다. 어린나이에 서울에 올라와 인생이 자꾸 미끄러진다며 투덜대던 순간을 지나 어느새 '서울에 사는 20대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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