왔다. 일년중 가장 설레는 계절.
12월의 끝자락에 태어나
억울하게 한 살을 먹고 시작한 나는
유독 눈과 겨울을 사랑했다.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면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를 걷고 싶어
이리저리 새하얀 길을 찾아다녔고,
잔뜩 쌓인 눈 위에 손가락을 깊숙이 찔러
커다란 하트 모양을 그리곤 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높은 하늘에서
눈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하면
일 년 동안 고생한 나 자신에게
선물이 내려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누가 왜 그렇게 겨울이 좋으냐고 묻는다면,
겨울을 자랑할 기회만 주어진다면
누구보다 잘 해낼 자신이 있었다.
"형님 눈이 너무 많이 와서요
운전 조심하셔야 할거 같습니다"
"상황이 어때? 올라갈 수 있는거야?"
얼마 전, 갑작스레 눈이 펑펑내리던 날
집으로 올라가는 마을 버스안에서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무전기가 울렸다.
그날따라 반려견과 함께 외출했다 돌아가는 길이었고
또 그날따라 패딩입은 사람이 많았다.
이대로는 집까지 걸어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간이 제멋대로 찌푸려지며 눈에 힘이 들어갔다.
집까지 가려면 가파른 언덕을 오르고
구불구불한 빌라촌을 지나야만 했기에
'제발!!'을 외치며 무사히 집에 도착하기를 기도했다.
느릿느릿 거북이처럼 움직이는 버스안에서
멍하니 장대비처럼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때 앞에 있던 한 소녀가
손을 들어 습기로 가득 찬 창문을 닦았다.
머릿속에 물음표를 띄우고
고개를 들어 창문을 본 순간,
소녀가 내 가방속에서
머리를 내밀고 있는 강아지를 슥- 쳐다보더니
아까보다 더 크게 창문을 닦아 창밖에 내리는 눈이
더 잘 보일 수 있게 해주었다.
세상에.
아직 이 세상 아니, 겨울은 살 만하다.
초조하고 조급했던 내 마음이 무색하게도
소녀는 예쁘게 내리는 첫눈을 강아지와 함께 바라보며 뿌듯해했다.
"버스 운행 중지합니다. 바퀴가 돌아가서요.
여기서 모두 하차해주세요"
내가 낳은 딸도 아닌데
한껏 촉촉한 눈과 엄마미소로
소녀를 바라보기도 잠시,
마을버스 운행 중지를 알리는
기사님의 안내방송이 들렸다.
결국 나는 그날 머리가 다 젖을 때까지 눈을 맞으며
씩씩하게 집으로 걸어 올라가야 했다.
버스에서의 감동과는 대비되는 외롭고 살떨리는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겨울이 좋냐고 물어본다면
당연히 'YES'다.
버스에서 만난 소녀와의 겨울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이런 순간들이 눈처럼 내 마음에 가득 쌓여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어코 조금의 정성을 더해서
따뜻함을 향해 나아가는 계절
계절 내내 품었던 사랑을 고스란히 담아 건네며
새로이 피어오르기 전에 스스로를 잠시 감싸는 계절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마음으로,
모든 것을 다 품고만 싶어지는 이 계절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