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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탈리 Sep 24. 2023

코디가 필요해!

엄마가 엄마 뵈러 가는 날

형제자매 여러분, 저 9월 2일에 1박 2일 일정으로 고향을 방문할 예정이오니, 시간을 비워 놓으시고, 엄마 면회 시간을 예약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번의 서프라이즈 사건도 있고 해서 이번에는 2주 전부터 대대적인 홍보방송을 내보냈다. 처서를 며칠 앞둔 시점, 차표 예매가 되자마자 올린 카톡 메시지였다.


'그래, 잘하고 있어.'

동생의 즉각적인 반응이 왔다. 원망의 내음이 희미하게 감지되었다. '진작에 그랬으면 그 사달이 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짐작컨대 동생의 뇌리에서는 이러한 생각들이 뭉게구름마냥 피어오르고 있으리라.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괜스레 귀가 간지러운 듯했다. 아마도 동생은 두고두고 서프라이즈 사건을 우려먹을 것이다, 곰국처럼.

'언제든 맘만 먹으면 갈 수 있으니 좋겠구나'

캐나다에서 날아온 언니의 톡에는 진한 아쉬움이 묻어 나왔다.

'어쩔 수 없지, 면회하고 후기 올릴게, 언니.'


나의 충실한 예매 담당자(딸내미)는, 주말엔 이동인구가 많아서 기차표 구하기가 쉽지 않다고, 날을 정하면 꼭 2주 전에 얘기해 줄 것을 신신당부하였었다. 2주가 또 언제 지나가나.....  기다리기에 2주는 너무 길다 싶어, 일부러 잊고 일상에 전념하려 애썼다. D-데이 전날은 피곤을 무릅쓰고, 미리 욕실 청소와 베란다 청소를 해치웠다. 그래야 시간에 쫓기지 않고 여유롭게 떠날 수 있으니. 달밤에 운동 아닌 청소를 하는 것은 참 조심스러운 작업이었다. 아래층에는  불면증에 시달리는 아주머니가 사는데다가, 그이의 단잠을 방해할까 봐 어찌나 마음이 조마조마하던지.


알다시피, 주부가 자리를 비우려면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집 청소, 가족들 식사 준비, 세탁기 돌리기 등등. 해도 해도 끝이 없고, 일단 마쳐 놓으면 표가 나지 않지만, 손을 놓으면 바로 표시가 나는  게 집안일 아니던가. 다 내버려 두고 그냥 다녀오라는 남편의 말대로 하고 싶어도 주부로서의 자존심이 발목을 잡는 것이다. 어쨌거나 내 할 일은 마쳐 놓고 가든 오든 해야 개운하다.


드디어 날이 밝아오고, 평일과 똑같이 일어나 식사를 준비하고 여덟 시가 되기를 기다려(불면증 아주머니의 기상 시간이 여덟 시임을 감안하여) 청소기를 돌렸다. 틈틈이 시계와 눈을 맞추어 가며, 설렘은 다독다독 뒤로 미룬 채, 재빠르게 움직였다. 어디건 행차를 하려면 그날은  시설광풍을 내는 날이다. 당일이든, 며칠이든 시설광풍은 일어나고야 만다.


아침은 황제 아닌 걸인처럼 대충 때우고, 옷장을 열었다. 가을옷을 입자니 더울 것 같아 여름옷을 걸치고 칠보단장을 하는데, 딸내미가 다가와 고개를 젓는다. 노노! 다른 옷 없어? 그러더니 훈수를 둔답시고 한동안 안 입던 바지와 셔츠를 꺼내 입어 보란다. 졸지에 코디에게 몸을 맞긴 수동적인 모델이 되어 웅얼거렸다.

"셔츠 다려야  되는데......" 

"내가 다려 줄게." 

총알같이 증기다리미를 꺼내와 셔츠를 다리기 시작하는 딸내미!  벨트와 목걸이 메리야스까지 제 것을 가져와 착용하라 성화다. '거부'를 떠나 '거역'하기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코디의 빛나는 결단력 앞에서 어미의 우유부단함이 슬며시 꼬리를 내린다.


평소 멋이 '뭣'인지도 모르고 살던 촌스러운 모델은 변변한 액세서리도 벨트도 지닌 게 없다. 금 모으기 때 결혼 예물을 판 이후로 시계도 보석도 없이 지냈다. 늘 편한 옷만 입어버릇하다가 어디 외출이라도 하려면 난감할 때가 많았는데, 이번에도 역시나 그랬다.

"그래서, 쇼핑은 평소에 하는 거야, 엄마! 꼭 필요할 때 사려면 힘들다우!"

"그래 네 말이 옳다, 옳아!"

그래 철마다 외출복을 장만하자, 결심을 세우지만 지켜낼지는 미지수다. 둥지 만드는 걸 매번 잊고 추위에 떠는 새처럼.


핑계 같지만, 지나치게 알뜰한 사람과 살다 보니, 뭔가를 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거세당한 구매욕.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있을는지. 생필품을 사려도 수 차례 불편을 겪은 후에사 산다. 하물며 다른 것들은 말해 무엇 하리. 삼십여 년을 그리 살아 보라. 약간의 불편함이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지는 경지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아이들 보기에 너무 궁상스러워 보이지 않을까 하는 점. 아이들의 소비행태를 보면 그 우려가 기우가 아님을 깨닫는다. 뭐든 필요하면 일단 사고 보는 태도가 적잖이 걱정스럽다. 꼭 필요한지, 대체가 가능한 게 집에 있는지, 안 사도 되는 건 아닌지 생각을 좀 해 보고 샀으면 좋겠는데, 편리함에 길들여진 뇌에는 신중함이 자리할 틈이 없는지. 하루가 멀다 하고 택배가 온다. 그리하여, 잔소리는 늘어만 간다. 젊은이들이 싫어하는 꼰대 잔소리가.


신발까지 검정 단화로 정해 주고서야 딸내미는 만족스러움에 고개를 끄덕인다. 목걸이 탓일까. 목덜미가 간질간질하면서 더운 기운이 훅훅 달려드는 것 같다.

'엄마, 코디가 왜 필요한지 알겠지?'

'그래, 아주아주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네, 코디 양반!'

'코디 비용 십만 원!'

'치부책에 달아 놓으려므나!'

시간이 넉넉함에도 마음만 분주한 어미는 건성으로 받아치고,

현관 앞에 나와 배웅을 하며 최종적으로, 한 컷 찍어주는 딸. 방에서 목소리로만 배웅하는 작은애와 참 대조적이다.

"엄마, 사진 많이 찍어~"

충실한 코디는 말미에 힘을 주며 당부를 한다.

'응. 자신은 없다마는 노력은 해 보마, 사랑스러운 코디 양!'


핸드폰을 꺼내 중요한 장면들을 담는 것도 보통 이상의 바지런함을 가지지 않고서는 힘든 일이다. 한두 번이야 가능하겠지만, 매번 그러기에는  지구력이 달려 도저히 못 할 일이다. 맛깔스러운 요리 앞에서 수저가 먼저 향하는 세대에게, 먼저, 핸드폰을 꺼내드는 신세대의 민첩함을 기대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다. 멋진 풍광도, 아름다운 꽃도 눈에 담는 게 제일이라, 어안렌즈에 담긴 피사체는 언제고 기억만 하면 빛을 발하며 살아 숨 쉴 것이 분명하니, 사진은 나중이고 눈과 귀에 맘껏 저장하는 게 먼저가 아닐까..... 그래도, 궁금해할 가족들에게 상황을 보고하려면 열심히 찍어 올려야 하겠지만.


고용도 한 적 없는 코디네이터의 살뜰한 코디를 받고 고향 앞으로, 걸음을 떼었다. 아니나 다를까, 젊은 감각으로 꾸미고 길을 나서니 마음이 가뿐한 게 그다지 싫지 않다. 설레기도 심란하기도 한 여정, 그래도 틀을 벗어난다는 것은 언제나 설렘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차표 예매를 끝낸 순간부터 코디는 무얼 입고 갈 거야, 를 묻고 또 물었었다. '걱정 마, 알아서 아무 거나 입고 가면 되지. 엄마가 지금 옷차림에 신경 쓸 계제가 아니잖니.' 엄마의 심드렁한 대꾸에도 아랑곳 않고 질문을 반복하던 딸은, 달달한 늦잠을 포기하고 코디가 되기를 자청해 주었다. 그다지 세련되지 못 한 엄마의 외출이 영 마음에 걸렸던가......  무슨무슨 행사 때마다 엄마의 의상부터 염려하는  다정다감한 코디. 누가 걱정댁의 딸 아니랄까 봐, 이것저것 사서 걱정을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쓰인다.


코디 양, 미안하고 고맙구나. 엄마도 이제 세련될 연습을 조금씩 해야 할까 보다. 엄마 너무 근사해, 소릴 듣고 싶구나. 하루아침에 그런 감각이 생길 리는 만무하겠지만, 우공처럼 사복사복 흙을 퍼 나르다 보면 언젠가 산을 옮길 날이 오지 않겠니.

울 코디 귀엽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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