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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탈리 Aug 13. 2023

면접의 추억

참을 수 없는 내 존재의 초라함

고3 때, 어쩌다 보니  간호사관학교에 지원을 했다. 학비가 안 든다는  이유가 제일 컸지만 제복의 멋스러움도 한몫 거들었다. 몇몇 친구들과 함께 지원을  했는데 필기에서 혼자만  통과되어 혼자 면접을 보러 가야 했다. 필기는 광주에서  보았기에 그리 부담이 없었지만  면접 장소는  대구였다. 그것도 2박 3일 동안 치르는 면접이라니. 무슨 면접을 2박 3일 동안이나 볼까....  


그 좁디좁은 문은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 원한다면, 꼭 치러야 하는 관문이었다. 서류를 접수하고  기나긴 기다림 끝에 면접의 기회를 얻어 다행이다 싶다가도,  곧이어 시작되는 긴장과 불안, 온갖 생각들의 집중 공격에 머리는  포화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면접 기회마저 얻지 못하고  탈락하는 경우도 많으니 다행이지만 여기서 낙마할 경우, 1차 합격은 그야말로 희망고문에 그치고 말기에 온전히 기뻐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복장은 어떻게? 물론 면접룩처럼 단정하게. 머리는?  깔끔하면서도 세련되게. 무엇보다 자신감 있는 태도가 중요해. 나의 장점을 최대한 어필해야 한다.' 


희망고문에 빠져  있던 몇 주 동안 이런 고민들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로선 행복한 고민이었다.  행복한 고민은 유독 까다롭고 힘들게  느껴지던  그 면접을 마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J시에서 대구까지는 고속버스로 4~5시간 정도 달려야 하는 거리였다. 아버지께서 동행해 주셨지만  타지에서 보는 면접 걱정에 차멀미까지  겹쳐 컨디션은 엉망이 되었다.  알고 보니  그날 버스 안의 승객들은  거의 다 시험 보러 가는 학생들과 동행한  부모들이었다.  엄마와 함께인  학생들이 더 많아 은근히 부러웠다.  


숙소를 잡고 이튿날부터 보았던 면접시험.  나의 모든 것을 다 파악해 내려는 면접관들의 눈빛에 졸아 한껏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전국 각지에서 온 엄마 아빠들은 대구통합병원 운동장에서 해바라기를 하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하시고 딸내미들은 병원 한편의 간호사관학교 안에서  시험이란 걸 보아야 했다.  


인성검사, 보안검사, 무슨 무슨 검사까지, 적는 건 어찌 그리도 칸칸이 많고 모호하던지. 아버지의  본적, 원적, 할아버지 할머니의 성함, 생년월일, 동산, 부동산의 가치 등등. 초등학생처럼 일일이  선생님께 물어가며 작성하고 제출해야 했다.  제출한 내용은 인원을 보충하여 철저하게 재조사가 이루어진다고 했다. 혹여 사돈의 팔촌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여지없이 불합격 처리된다는 후일담이  생겨날 정도로 까다롭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신체검사는 더했다. 충치는 물론 팔다리의 상처 유무까지  육안으로 검사하고, 겨드랑이 암내 유무까지 검사하는 시험관들(물론 여자분이시다)! 수치스럽고 싫었다. 우리는 철저히 해부되고 있었다. 아아, 정말, 면접은 싫여! 참을 수 없는 내 존재의 '초라함'을 그때, 뼛속 깊이깊이, 느껴야 했다.


면접이라기보다 조사, 검사에 가까웠던 면접. 막상 면접다운 면접에서 받았던 질문은 취미가 뭐냐는 단순한 질문이었다. 정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던 대로 솔직하게 대답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면접관들이 그리 듣고 싶은 대답이 아니었던 듯하다.


숙소에서의 마지막 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문에  안 되어도 너무 낙심 말아 달라고. 실향민이신 아버지의 걱정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지만, 나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행운의  여신이 내 손을 들어주지 않았던 거라 믿는다. 짧은  커트머리, 청바지와 셔츠 차림(그땐 교복자율화 시절이라 단정한 교복도 없었다), 자신감도 없고 말주변도 없었다.  잘 보이려고 애써 꾸미지도 않았다.  간호사관생도로서의 소양이  부족해 보였던 겉모습 탓이 제일 컸으리라.  


그 당시도 요즘처럼 '사관학교 입학뽀개기 카페'나 '사관학교 입학컨설팅 학원'이  있었더라면  학원의 도움을 받아 근사한 제복을 입을 수 있지 않았을까. 산란을 위해 강물을 거스르던  연어의 수고에  견줄 만큼 힘겹게만 느껴지던  면접의 기억.  결국 고배를 마시는 걸로 끝이 났지만, 이제는 달콤 쌉싸름한  추억이라 일컫기에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세월이 더 흐르면 '완전한 달콤'으로 바어야 할 추억. 그리하여 먼 훗날 언젠가는, 

'옛날 옛적에 어느 시골에 사관생도를 꿈꾸던 여자애가 살았더래'

사랑스러운 손주에게 얘기보따리를 풀어내고 있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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